26.03.14 19:20최종 업데이트 26.03.1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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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이정민

이른바 '반국가세력'에 대한 경고장인 12·3 계엄포고령 제1호에 "전공의"와 "의료인"이라는 구체적인 직업 명칭이 등장했다. 유신체제 때는 특정 학교가 그런 경고의 대상으로 거명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임시국무회의 의결 직후인 1975년 4월 8일 오후에 발표한 긴급조치 제7호 제1항에 "75년 4월 8일 17시를 기하여 고려대학교에 대하여 휴교를 명한다"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제3항은 휴교령을 어기거나 이 학교 내에서 집회·시위를 열면 3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경고했다.

제4항은 국방부 장관이 병력을 투입해 학교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당시의 고려대 운동권 학생들을 많이 감금한 서울 성북경찰서장 등에게 맡겨도 됐을 법한 일을 치안본부장(경찰청장)도 아니고 국방부 장관에게 맡겼던 것이다.

고려대 학생들을 간첩으로 몰아간 박정희 정권

1973년부터 박 정권은 고려대를 유독 심하게 다뤘다. 그해 봄부터 불거진 고려대 NH회 사건(고려대 민우지 사건)이 그 시작이었다.

NH회라는 명칭과 관련해 행정안전부 산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운영하는 <민주화운동사전> 홈페이지의 '고려대 민우지 사건' 편은 "NH는 Nationalism과 Humanism의 약자로 당시 학생들이 지향한 민족주의와 인간화를 뜻하는 것이었다"라고 설명한다.

NH회는 그런 이념을 지향했지만, 박 정권은 이 그룹이 공산주의를 추구했다고 몰아세웠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은 엉뚱하게도 간첩단 사건으로 둔갑됐다. 그해 6월 21일 자 <매일경제>는 "중앙정보부는 고대 노동문제연구소 사무국장 김낙중(37)을 중심으로 한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 관련자 11명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했다고 한 뒤 재판에 넘겨진 피고인들을 거명했다.

이에 따르면, NH회 회장 정발기(23세)와 최기영·박영환·정진영·윤경로·박세희 6명은 고려대 재학생이고, 고문 함상근(22세)과 김영곤·양재덕 3명은 고려대 퇴학생이었다. 유명한 통일운동가였던 김낙중은 1953년에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다가 4년 뒤 고려대 경제학과에 편입했다. 피고인들 중에서 고려대에 적을 두지 않은 사람은 동국대 2학년 강태희뿐이었다. 위 기사는 거의 다 고려대 출신들인 사건 관계자들의 행적을 검찰 공소장을 근거로 이렇게 보도했다.

"이들은 북한의 지령에 따라 김낙중을 중심으로 사립의 명문인 고대에 침투, 반국가단체인 NH회를 조직하는 한편, 지하신문인 '민우지'를 발간, 학원 내에 살포, 학생들로 하여금 반정부 봉기를 획책하고 제3국을 통해 북한과 서신연락을 해온 혐의를 받고 있다."

이 그룹이 실제로 벌인 일은 박정희 식의 거짓 민주주의인 '한국적 민주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위의 <민주화운동인명사전>에 따르면, 1972년 12월 이들은 고려대 정문에 걸려 있던 '한국적 민주주의 이 땅에 뿌리박자'라는 박정희 찬양 현수막을 불태워버렸다. 휘발유를 이용해, 그것도 대낮에 그렇게 했다. 대학에 대한 감시가 가장 심했던 시기에 대담한 행동을 벌였던 것이다.

이들은 1973년 3월과 4월에는 기관지 <민우>를 학교 구성원들과 언론에 배포했다. 신문사들에도 배포했으니 지하신문이라 할 수도 없었다. <민우> 4월호에는 "현 정권은 국민의 의식을 강압적으로 획일화하고 야당을 어용화하고" 있다면서 "금년 UN총회에서 국제적인 고립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대(對)정부 경고문이 들어갔다.

박 정권이 국민들의 기를 꺾고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유신체제를 선포한 1972년 10월 17일 이후로 처음 몇 개월간은 운동권이 잠잠했다. 이런 상황에서 돌출한 것이 고려대생들의 모험적인 움직임이다. 이를 간첩단 사건으로 뻥튀기한 것은 정권이 그만큼 당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김낙중을 제외한 위의 10명은 그의 조카뻘이었다. 그중 9명은 편입생 출신인 김낙중과 달리 입학할 때부터 고려대 학생이었다. 스물세 살인 재학생 정발기가 회장이고, 한 살 적은 퇴학생 함상근이 회장을 위한 고문 역할을 했다. 이는 이 그룹의 리더십이 김낙중보다는 20대 초반 학생들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김낙중은 학생들의 대부 역할은 할 수 있어도 직접적으로 이끌 만한 입장은 아니었다. 그가 실제 리더였다면, 스물두 살 함상근을 스물세 살짜리 회장의 고문으로 파악한 중앙정보부 및 검찰의 수사 결과가 어색해진다.

그런 문제점이 있는데도 공안기관들은 김낙중을 중심인물로 내세웠다. 이는 공안사건을 조작하기 위한 부득이한 선택이다. 얼마 전까지 고등학생이었던 20대 초반들이 간첩단을 구성해 북한과 연락했다는 스토리는 누가 봐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통일운동가를 끼워 넣은 것은 스토리를 좀 더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유사한 조작 방식은 다른 공안사건에서도 나타난다. 일례로, 육군보안사령부가 간첩단 18명을 일망타진했다고 1974년 11월 5일에 발표한 '통일혁명당 재건위원회 사건'에서는 농민·노동자·행상·교수·사업가 등과 더불어 군무원과 육군 소령이 각 1명씩 구속됐다. 이 둘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군 수사기관이 공안사건을 맡을 명분이 없었다.

누가 진짜 죄인인가

2005년 4월 유신시절 집단 제적을 당했던 고려대 출신 여야 정치인과 각계 인사들이 `긴급조치 7호' 발동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8일 모교 기념탑 앞에 한자리에 모여 희생자에 대한 추모 묵념을 올리고 있다.연합뉴스

NH회 사건은 유신체제하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고 이해찬 총리가 서울대 학생들과 함께 벌인 1973년 10월 2일의 '10·2데모'가 유신체제에 대한 최초의 반대 시위였다면, 이보다 앞서 발생한 NH회 사건은 또 다른 의미에서 중요성을 띠었다.

26세 때인 1971년에 민주수호청년협의회 회장이었던 이재오 전 국회의원이 1984년에 발표한 <해방후 한국학생운동사>는 "10월유신 이후 학생운동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73년 6월 21일 고대 NH회 사건, 일명 민우지 사건으로 12명이 구속"됐다는 말로써 이 사건의 의미를 보여준다. 이 사건은 "거의 전무"해 보이던 학생운동이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준 궐기였다. 위의 <민주화운동사전>은 "유신 이후 서울에서 발생한 최초의 학생운동 관련 사건"이라고 평한다.

유신 선포 이후 한동안 이어지던 적막한 긴장 상태를 깨는 것이 NH회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정권의 주목을 받은 고려대는 그 뒤 집중적인 탄압을 받았다. <해방후 한국학생운동사>는 이 사건의 직접적인 결과를 이렇게 설명한다.

"검은시월단, 일명 야생화 사건으로 7명이 구속되었다. 71년 고대 학생운동에 관계하였던 함상근·박영환·정진영 등이 이 사건으로 구속되었고, 고대 교수 김낙중, 고대 노동문제연구소의 노중선 등도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민주화운동사전>은 "박정희 정권은 고려대 학생운동을 완전히 뿌리뽑기 위해, 1971년 위수령 이전 한맥과 더불어 고려대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한사회 출신 학생들도 조작사건을 통해 처벌했다"라고 한 뒤, 한사회 멤버들이 결성한 등임회가 검은시월단 사건으로 엮였다고 기술한다. 이 사건이 재판에 넘겨진 것은 1973년 7월 25일이다. NH회 사건이 기소된 다음 달의 일이다.

박 정권은 이름이 등임회인 서클을 1972년 뮌헨올림픽 때의 검은9월단과 비슷한 검은시월단으로 둔갑시켰다. NH회 사건을 계기로 박 정권이 이처럼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고려대를 압박하던 분위기가 1975년에는 이 학교 하나를 상대로 긴급조치를 발포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NH회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1974년 6월 12일 자 <조선일보>는 "대법원 형사부는 11일 고려대 NH회 사건 상고심 판결공판에서 피고인들의 상고를 기각, 김낙중 피고인 등 9명에게 원심대로 최고 징역 7년, 최저 징역 2년 6월, 집행유예 4년까지의 유죄를 확정했다"라고 알려준다.

이 엉터리 재판 때문에 43년 뒤 서울고등법원 판사들은 재판석에서 일어나 사죄를 해야 했다. 2017년 9월 22일 이 판사들은 사건 관련자 6명이 신청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할 때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검찰이 상고를 포기해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유신체제 당시의 공안기관들은 공산주의 간첩들이라며 고려대생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하지만 이 대학에 실제로 침투한 것은 붉은 색안경을 낀 반공냉전세력이었다. 2017년의 재심 결과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가 죄인들이었음을 재확인시켜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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