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경남경찰청장이 지난 2월 25일 국립3.15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경남경찰청
열여섯 살 김주열 등이 희생된 1960년 3·15의거의 희생자와 유족들에 대한 김종철 경남경찰청장의 사과가 무려 66년 만에 이뤄진다. 이달 14일 국립3·15민주묘지에서 거행되는 3·15의거 추모제가 그 공간이다.
3·15의거가 4·19혁명으로 이어진 직후에 이승만 정권이 무너졌으므로, 이 사과는 1960년경에 있었어야 했다. 3·15와 4·19의 최대 수혜자인 장면 정권이 그해 8월에 출범했으므로, 이 무렵에 사과가 이뤄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군사정변이 발생한 것은 이듬해 5월이므로 시간은 충분했다.
장면 정권은 3·15의거의 가해자는 아니다. 하지만 정부를 승계했으므로 사과를 하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1961년 5월 16일 아침까지도 그 사과는 이뤄지지 않았다.
마산 시민들에게 사과하지 않은 장면
자유당이 이끌든 민주당이 이끌든 다 똑같은 대한민국정부라는 인식은 장면 정권 내에도 있었다. 정부 체제가 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변경됐다는 점에서 장면 정권을 제2공화국으로 지칭하는 편의상의 분류법이 1960년부터 사용됐지만, 이것이 대한민국 정부의 연속성을 단절시키는 게 아니라는 인식은 이때도 당연히 있었다.
그해 6월 15일 개정돼 의원내각제 정부를 출범시키는 계기가 된 당시 헌법 제100조는 이승만 정권이 1954년에 통과시킨 헌법의 효력을 인정했다. 102조는 자유당이 233석 중에서 126석을 차지한 1958년 총선의 효력을 인정했다. 103조는 자유당 정권하에서 임용된 공무원들의 신분을 보장했다.
정부 체제가 내각제로 바뀌어도 정부의 연속성은 계속 이어진다는 헌법적 근거는 이처럼 명시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 하야 이후의 새로운 정부가 뒤늦게나마 3·15에 대해 사과했다면 희생자와 유족들의 원한은 조금이라도 더 풀릴 수 있었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3·15의거가 마산에서 발발한 일을 계기로 전국이 시민혁명 열기로 들끓던 1960년 4월 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이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됐다. 이로 인해 제2차 마산항쟁이 폭발한 그달 13일, 민주당 소속의 장면 부통령은 자유당 소속의 이승만 대통령에게 '마산사태 수습 건의'라는 문건을 보냈다. 15일 자 <동아일보> 1면은 이렇게 보도했다.
"장 박사는 마산사태는 3·15 부정선거로 빼앗긴 자기 표를 달라는 정당한 주장에서 일어난 것이므로 정부와 자유당이 그 과오를 솔직히 자인하고 국민 앞에 사과하는 동시에 반성하는 태도로 이 문제를 수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장면은 3·15의거에 대한 정부 차원의 사과를 공식적으로 촉구했다. 그랬던 그가 4개월 뒤 내각제 총리가 되어 정부를 인수했지만, 정작 그는 사과를 하지 않았다. 그는 3·15 당시의 부통령이었다는 사실 때문에도 사과 책임을 지고 있었다. 대통령이 사과하지 않으면 부통령이라도 나서서 하는 게 지당했다. 사과를 해야 할 이유가 두 가지나 됐는데도 그는 하지 않았다.
위 기사에 따르면, 건의서를 보낸 다음 날 기자회견을 연 장면은 "마산에 직접 내려갈 생각이 있는가?"라는 질의를 받았다. 장면 본인이 마산 시민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사과 필요성을 언급한 직후에 나온 질문이므로, 이 물음 속에는 마산에 가서 사과할 의향이 있느냐는 뜻이 담겨 있었다. 장면은 "갈 때가 되면 어련히 갈 것 아닌가?"라는 답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3·15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4·19혁명 정신까지 퇴보시키는 국정운영으로 인해 국민적 지탄을 받았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제5권은 "자유당과 민주당은 그냥 보수세력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분단·반공 세력으로 이란성 쌍생아로도 불렸다"라며 장면 내각의 전 정권 청산에 관해 이렇게 기술한다.
"허정 과도정부는 말할 것도 없고 장면 정권도 한국사 최대의 비극인 민간인 집단학살 문제에 관심이 없었다. 김구 암살 사건 등 많은 의혹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3·15 부정선거 원흉, 발포 책임자, 부정축재자와 함께 이승만 자유당정권 때 비민주적 행위를 한 자들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지만, 장면 정부는 이 부분에 대해서도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같은 분은 하루속히 특별법을 제정해 혁명 과업을 완수하라고 촉구했지만 허정 과도정부, 장면 정부한테는 마이동풍이었다."
장면 내각은 4월혁명 정신을 구현하라는 요구에 대해 "마이동풍"의 태도를 보였다. 그는 '이란성 쌍둥이 형'의 유산을 과감히 지우지도 않았다. 국민들의 거센 요구에 떠밀려 이따금 찔끔찔끔 호응할 뿐이었다. 이런 정권이 마산시민들에게 사과할 리는 만무했다. 4월 13일의 그 건의서는 이승만을 압박하는 용도에 그치는 것이었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사과

▲창원마산 3.15의거기념탑.
윤성효
1960년 당시의 민중시위 때문에 골머리를 더 많이 앓은 쪽은 이승만 정권보다는 장면 정권이다. 3·15 부정선거로 촉발된 그해 시위의 열기는 허정 과도정부가 성립한 4월 27일 이후는 물론이고 장면 내각이 출범한 8월 23일 이후로도 계속됐다.
이는 민중시위 덕분에 집권한 민주당이 도리어 그것을 규제하는 원인이 됐다. 1961년 4월 16일자 <조선일보> '데모의 왕국 코리아'는 "툭하면 데모, 데모. 이것을 만능으로 알고 저마다 일어나는 데모사태에 지친 정부는 데모규제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회부"했다고 기술했다. 국민들의 시위 때문에 지칠 정도가 됐는데도 그 요구의 대부분을 끝끝내 외면했던 것이다.
장면 정권이 민중시위에 시달린 것은 지난날의 악습을 청산하자는 국민적 요구에 미적지근하게 대응했기 때문이다. 개혁 요구를 전폭 수용했다가 기득권을 잃지 않을까 하는 이기심이 만들어낸 현상이다.
"대한민국이 잘못했습니다"라는 공식 사과 한마디가 나오지 않은 것은 이승만 청산을 불철저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이'어게인을 차단할 골든타임을 놓치는 일이었다. 그 뒤 이승만의 망령이 되돌아와 오늘날까지 한국을 어지럽히는 것은 그때의 청산작업이 불철저했던 데 기인한다.
이승만 정권의 과오에 대해 대한민국 명의로 "잘못했습니다"라는 언명을 남기는 것은 그 망령이 무덤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봉인하는 효과를 갖는 것이었다. 이는 그의 추종세력이 향후 국가권력을 넘보지 못하게 견제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때 봉인을 하지 못해 대한민국은 지금까지도 그 망령을 신경 쓰며 살아가고 있다. 재작년 12월 3일에는 그 망령에 빙의된 세력이 한밤중에 군대를 일으키기도 했다.
경남경찰청장의 사과는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정부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사과까지 더해져야 그 봉인의 효과가 한층 확실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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