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3.11 06:47최종 업데이트 26.03.11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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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도톤보리, 글리코상, 타코야키, 유니버설스튜디오, 우메다, 난바.... 오사카, 하면 연상되는 단어들입니다. 오사카라는 지명 뒤에 무슨 말이 가장 어울릴지 AI에게 물었더니 '여행'이라고 답을 합니다. 여기, 오사카 여행이 아닌 오사카살이를 시작한 특이한 중년 남성이 있습니다. 마천루가 즐비하고 네온사인과 휘황찬란한 불빛을 자랑하는 오사카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두리에서 오사카 주민으로 살아가는 중년 남성의 독거 일기를 시작합니다. 반년간 펼쳐질 좌충우돌, 실수 만발 오사카 생존기를 시작합니다.[기자말]

히로시마 미야지마구치에서 미야구치로 가는 페리호김용국

오사카 생활도 석 달이 되어 간다. 이제 반환점을 돌려고 한다. 비교적 단조로운 생활이지만 뜻밖의 일도 많이 겪는다. 돌아보니 세상살이는 우연의 연속이다. 내가 반년간 연구원 자격으로 오사카에 오게 된 것도 예상치 못한 우연 아니었던가.

내 행동반경은 오사카, 교토, 고베 정도다. 전철로 이동이 가능한 여기까지는 여행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짧은 일본 생활 동안 가끔씩 뜻밖의 장거리 '여행'을 경험하기도 한다.

"고객님, 무료여행에 당첨되셨습니다"

"고객님, 안녕하세요. 30만 원 상당의 당일 투어에 당첨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안내문을 참고하시어 투어에 참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고객님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느 날 이런 메일을 받았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도 의심부터 할 것이다. 이거 사기 아닐까. 사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갖은 명목으로 돈을 요구할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더구나 일본어로 된 메일이었으니 오죽 했겠는가.

내가 이 메일을 받은 건 1월 중순. 오사카 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을 때다. 게다가 투어 장소는 히로시마다. 오사카에서 히로시마까지는 330킬로미터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순천 거리다.

안내문을 보니 장소는 히로시마 시내도 아니고 산속이다. 집결 장소인 히로시마역에서 버스로 이동한 뒤 해설사 안내에 따라 유적지도 둘러보고 온천도 하고, 만찬을 즐긴 다음 전통공연도 보는 일정이라고 했다. 정가가 3만 5천엔인데 이번 참가자는 모두 무료라고 했다. 내 메일주소를 어떻게 알았을까. 곰곰 생각해보니 작년 호기심에 히로시마 관광사이트를 보다가 관광대사에 가입한 적이 있었다. 말이 관광대사이지 이름과 메일 주소 등 간단한 인적사항만 입력하면 끝이었다. 나는 무려 2만 9천 번째였다.

그 중에서 내가 당첨이 되었다고? 그렇다 쳐도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무슨 봉변을 당할 줄 알고. 아니면 유료 프로그램이라면서 거액을 요구하면 어쩌지. 걱정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고민 끝에 속는 셈 치고 가보기로 했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탈출하겠다면 되지. 마침 그 주에는 특별한 일정도 없던 터였다.

그런데 당일 여행 프로그램은 무료라고 하더라도, 왕복 교통비, 숙박 비용과 식비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신칸센 왕복 요금만 해도 2만엔이 넘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왕복 모두 야간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심야에 출발해서 새벽에 도착하는 버스는 예상보다 좁았다. 창문은 커튼을 고정시켜서 바깥을 전혀 볼 수 없었고, 옆사람과의 불필요한 접촉을 막기 위해 좌석 중간에 칸막이까지 되어 있었다. 그러다보니 내내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버스에서 6시간 반을 보내는 이틀밤을 포함하여 '1박 4일' 강행군이 시작되었다.

바다 위에 세워진 도리이로 유명한 섬 미야지마. 이쓰쿠시마 신사의 도리이가 보인다.김용국

바다 위 도리이, 이츠쿠시마 신사에 가다

그래도 예상치 못한 히로시마 여행을 하게 되어 설레기도 했다. 첫날 새벽부터 원폭돔, 평화기념공원, 자료관, 한국인 희생자 위령비까지 방문하게 되었다. 바다 위에 세워진 도리이로 유명한 섬 미야지마의 이쓰쿠시마 신사도 직접 볼 기회도 얻었다. 새벽에 바다 위에 떠있는 도리이를 보니 장관이었다. 시내에서 미야지마까지는 노면전차와 페리를 이용하면 왕복 1천엔이 채 들지 않는다. 히로시마에 가면 섬 전체가 절경인 미야지마에 꼭 가볼 것을 권한다. 오후에는 히로시마성과 약 400년 전 만들어진 전통 정원인 슛케이엔(縮景園)까지 둘러보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드디어 투어 당일이 되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집결장소인 히로시마역으로 갔더니 안내 직원이 관광버스 앞에서 안내 팻말을 들고 대기 중이다. 참가자들이 속속 모였다. 가족 동반도 더러 있는 걸 보니 다소 안심이 되었다. 참가자는 총 20명 정도로 일본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히로시마 원폭돔히로시마 원폭돔. 주변에 평화기념공원, 평화기념자료관, 사망자 위령비 등이 있다.김용국

버스가 시내에서 산속으로 들어간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시내에서 북쪽 산속으로 1시간 반 정도를 들어갔다. 도착한 곳은 아키타카타시. 전국시대 인물인 모리 모토나리의 본거지이자 최후를 맞은 곳으로 유명한 소도시였다. 그곳에서 관광해설사의 안내를 들으면서 1시간 남짓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모두 일본어로 진행되어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희귀한 경험이라고 여기면서 열심히 따라다녔다. 이때부터 의심은 사라지고 마음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무료여행 버스히로시마역에 대기중이던 무료여행 버스. 일행을 태운 버스는 시내에서 북쪽 산속으로 1시간 반 정도를 들어갔다.김용국

그때였다. 나이가 지긋한 일본인 여성이 나에게 일본어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후미짱'이라고 해요. 한국분이시죠?"
"예. 저는 '용'이라고 불러주세요. 지금은 오사카에서 사는데 혼자 왔습니다."

일본인은 성격상 먼저 말을 거는 경우가 흔치 않다. 후미짱은 나를 지켜보고 있다가 큰 용기를 내서 대화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 뒤부터 한국과 관련된 경험담과 각자 살아가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70대 중반의 후미짱은 히로시마에 혼자 사는데, 출가한 딸들과 수시로 왕래하면서 지낸다고 했다. 후미짱은 딸만 있고 아들이 없어서 허전하다고 했다. 내가 농담삼아 "오늘은 제가 아들 노릇을 할까요?"라고 말하자 표정이 밝아졌다. 우리 어머니와 나이도 비슷해서 더 부담이 없었는지 모른다.

히로시마현 아키타카타시. 전국시대 인물인 모리 모토나리의 본거지이자 최후를 맞은 곳으로 유명한 소도시였다. 그곳에서 관광해설사의 안내를 들으면서 1시간 남짓 유적지를 둘러보았다.김용국

내 일본어 실력은 부족했지만 그때부터 남은 일정을 말동무 삼아서 함께 보내게 되었다. 한국인들과의 인연이나 손주 자랑을 하다가도 후미짱은 나의 일본생활을 걱정해주기도 했다. 산길을 내려갈 때 앞에서 길을 살피거나 짐을 들어주는 일은 '아들'인 내 몫이었다. 마음을 열어준 후미짱과의 시간은 나홀로 여행과 비할 바가 못되었다.

온천에, 공연에, 코스요리까지 무료?

유적지 탐방을 마치고 도착한 곳은 '카구라' 민속촌이었다. 여기는 전통공연과 식사, 숙박, 공연 감상을 한 번에 할 수 있는 전통체험마을이었다. 카구라는 일본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 가무인데, 풍년 기원, 감사 등의 의미로 신에게 바치는 춤과 연주, 노래 등으로 구성된다. 영화 <귀멸의 칼날>에서도 카구라가 등장한다. 일본 곳곳에서 아직도 전수, 공연되고 있고 이곳도 유명한 곳 중 하나였다.

히로시마 카구라 공연히로시마현 아키타카타시의 카구라 공연. 카구라는 일본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 가무인데, 풍년 기원, 감사 등의 의미로 신에게 바치는 춤과 연주, 노래 등으로 구성된다.김용국

저녁 공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어서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온천욕, 전시관 관람을 마치니 저녁시간이 되었다. 큰 기대 없이 식당에 들어섰는데 이날의 메뉴가 가이세키(정식 코스) 요리다.

히로시마의 슛케이엔400년 역사의 히로시마의 대표 정원 슛케이엔. 정원 경내에 원폭자 추도비가 세워져있다.김용국

전채요리부터, 생선회, 구이, 튀김, 찜, 전골에 디저트까지 메뉴는 계속 나왔다. 재료도 버섯, 우엉, 닭, 멧돼지, 사슴, 참치, 피조개 등 다양했다. 그냥 먹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1시간 반 정도의 식사로 배를 채우니 공연을 볼 시간이다. 카구라 공연은 처음이었지만 비교적 단순한 구성으로 되어 있어서 관람에 큰 불편은 없었다. 옆에서 후미짱이 간단한 설명을 해주기도 했다.

가이세키 정식 식사큰 기대 없이 식당에 들어섰는데 이날의 메뉴가 가이세키(정식 코스) 요리다. 전채요리부터, 생선회, 구이, 튀김, 찜, 전골에 디저트까지 메뉴는 계속 나왔다. 재료도 버섯, 우엉, 닭, 멧돼지, 사슴, 참치, 피조개 등 다양했다.김용국

모든 일정이 거의 마무리 될 즈음, 직원이 앙케트 조사에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주최측은 이번에 새로운 여행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관광대사에게 받기 위해서 시범적으로 무료 투어를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주최 측이 참가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성실한 설문조사가 전부였다. 이런 행운도 있나 싶었다. 선의를 섣불리 의심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히로시마에서 맺은 새로운 인연

버스로 히로시마역에 복귀한 시각은 밤 11시 무렵이었다. 거의 12시간 걸린 무료여행이었다. 이제 다시 심야버스를 타고 오사카로 돌아가야 한다. 하루를 함께 보낸 후미짱이 버스 출발 전에 '차라도 한 잔 하자'고 제안한다. 상점이 거의 문을 닫은 시각이라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서 벤치에 앉았다. 후미짱에게 낮에 내게 말을 먼저 건 이유를 묻자 "말을 걸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아서"라고 답했다. 한국 사람을 좋아하기도 하고, 처음 봤을 때 나같은 아들이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살짝 걱정이 되었다. 후미짱이 나의 실체(?)를 알면 후회할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이것도 인연이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후미짱, 자주 볼 순 없겠지만 자주 연락할 게요. 괜찮다면 내가 아들이 되어 줄 게요."

히로시마에서 맺은 인연히로시마에서 무료여행을 통해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 나에게 먼저 마음을 열어준 후미짱(오른쪽)과 함께 찍은 사진.김용국

헤어지는 순간 포옹을 하니 후미짱은 눈물을 흘린다. 내가 놀라니 기뻐서 우는 거라고 괜찮다면서 "다음에 히로시마에 오면 우리집에서 묵어도 좋다"고 했다. 서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면서 작별을 나누었다.

온천욕에, 전통공연에, 코스요리까지 낯선 히로시마에서 무료로 즐기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그 뿐 아니다. 나는 여기서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 메신저로 연락할 때 이제 나는 후미짱을 마마(일본의 엄마라는 표현)라고 부른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서로 건강한 모습으로 조만간 만나기를 바랄 뿐이다. 비록 몸은힘들었지만, 1박 4일의 일본 히로시마 무료여행은 이렇게 추억과 인연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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