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시 사동 장애인 재활시설 명휘원 내 이방자 여사 기념관을 찾은 한 제자가 이방자 여사의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 2007.10.12.
연합뉴스
그는 1916년에는 일본 왕족의 이미지로 한국인들에 각인되고, 1963년에는 비운의 대한제국 황실의 일원으로 한국인들에게 각인됐다. 그랬던 그가 한국 귀국 뒤에는 복지활동가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한국인들에게 다가갔다. '황태자비 이방자'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자선사업가 이방자'가 기억되는 것은 그가 그 일을 그만큼 열심히 수행한 결과다.
이전부터 산코가이(찬행회)라는 자선단체를 운영했던 이방자는 한국 귀국 뒤에 이를 자행회(慈行會)로 개칭하고 한국자행회와 일본자행회를 각각 운영했다. 오타베 유지 시즈오카복지대학 교수가 쓴 이방자 평전인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에 따르면, 일본자행회는 해마다 100만 엔 정도의 기금을 이방자에게 보냈다. 일본자행회 기금의 일부가 이방자의 한국 활동에 사용됐던 것이다.
이방자는 1966년부터는 신체적으로 불편한 아동들과 함께 목공·재봉·편물 등을 공부했다. "처음에 모은 학생은 15명으로 농아, 소아마비, 지팡이를 이용하는 정도의 장애인도 있었다"라고 평전은 알려준다.
그의 활동은 계속 확장됐다. 1967년에는 영친왕의 아호가 들어간 명휘원이라는 복지시설을 출범시켰다. 이곳도 그가 아이들과 함께하는 공간이 됐다. 평전은 "빵을 굽거나 찌는 등 이방자도 자주 함께 일했다. 그것을 아이들과 함께 앉아 같이 먹었다"라는 증언을 소개한다.
그는 정신적 불편함을 가진 아동들과도 함께했다. 평전은 "1972년 10월 정신지체아를 위한 교육기관인 자혜학교를 설립했다"라고 한 뒤 아이들의 지적 능력 계발에 신경을 썼다고 알려준다. "아무리 IQ가 낮아도 그 아이만의 능력이 있을 겁니다"라며 그가 열정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런 활동에 소요되는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방자는 공예작품을 만들고 창덕궁 낙선재 일부를 개방했다. 또 해외에 나가 궁중 의상쇼를 열었다. 그 자신이 일본을 돌아다니며 작품도 팔고 후원금을 받기도 했다.
일본 왕족 출신인 그가 옛 식민지 땅에서 벌이는 이런 활동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각도 있었지만, 그는 소신을 갖고 이 활동에 인생을 걸었다. 이 때문에 아들 이구가 서운한 말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위 평전의 한 대목이다.
"아들 구마저도 말다툼할 때 무심코 '어머니는 거지입니다'라고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구걸을 하면서 자신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이방자는 일제의 정치적 목적에 희생돼 한국 황태자의 배우자가 됐지만, 이 결혼을 계기로 그 자신도 한국 황족들의 비애를 공유하며 일생을 살게 됐다. 그런 뒤에는 한국 장애인들과 고락을 공유하며 인생의 나머지 절반을 보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이 소명을 수행했다. 1989년에 향년 88세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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