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적립금 증가 추이
고용노동부 ‘2024년 퇴직연금 투자 백서'
서두르는 사외적립 의무화, 1년 미만 노동자 적용은 나중에?
이번 공동선언문에 담긴 '퇴직급여 사외적립 의무화'라는 제목 자체가 혼동이 있을 수 있다. 좀 더 명확하게 하자면 퇴직금의 사외적립 의무화이다. 퇴직연금은 이미 사외적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확정급여형의 경우 최소 100% 의무 적립 비율이 있지만 임금인상을 반영하지 않거나 미납 등으로 과소 적립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관리 감독과 집행의 문제이지, 의무화 여부와는 상관없다. 하지만 퇴직금은 사정이 다르다. 장부상으로만 적립해 놨다가 기업이 도산하거나 부도가 나면 퇴직금을 전부 받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퇴직금의 사외적립 의무화는 체불 예방과 수급권 보호 차원에서 필요한 조치다. 하지만 그런 순수한 의도로만 해석하기엔 석연치 않다. 사외적립 방식을 오직 퇴직연금으로만 한정했기 때문이다. 즉, 퇴직금의 사외적립 의무화는 곧 퇴직금 폐지와 퇴직연금 도입을 의미한다.
체불 예방과 수급권 보호라는 명분 이면에는 중소형 사업장의 퇴직금을 퇴직연금 상품으로 전환하는 의도가 깔려 있다. 기업은 사외 적립하더라도 이자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수수료를 부담해야 한다. 그래서 "정부는 사외적립 의무에 따른 소규모 사업장의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재정지원 방안을 마련한다"는 내용이 따라붙었다.
결국 퇴직연금으로 전환하면서 부담해야 할 추가 비용, 즉 퇴직연금 사업자의 수수료 수익을 정부가 공적 재원을 통해 지원하겠다는 의미가 포함돼 있는 셈이다. 게다가 퇴직금을 없애고 퇴직연금을 의무화한다면 아직 퇴직금제도를 운영하는 중소형 기업들 대부분은 기업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확정기여형으로 도입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실제 미국의 401(k)나 일본, 영국도 중소사업장은 확정기여형이 지배적이다.
특히 가장 중요하고 오랫동안 방치되고 있는 '1년 미만 노동자의 퇴직급여 적용' 문제는 이번 선언문에 담기지 못했다. 현행 제도는 계속근로기간이 1년 미만인 노동자를 지급 대상에서 원천 배제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근속을 전제하지 않는 초단기 계약, 플랫폼 특수고용 등이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적한 바 있는 '11개월 쪼개기 계약'의 편법도 퇴직급여 부담을 줄이려는 얄팍한 꼼수다.
대법원 판례를 보더라도 퇴직급여는 노동력을 제공한 대가로 발생하는 후불(이연) 임금이지, 사용자가 시혜적으로 베푸는 보너스가 아니다. 한 달 일하든 두 달 일하든 제공한 노동의 가치만큼 퇴직급여를 지급해야 한다. 네덜란드, 영국, 덴마크, 독일, 심지어 미국의 401(k)조차 근속 1년 요건은 없고 고용 즉시 또는 월 단위로 비례 적립하고 있다.
같지만 다른 3가지 기금화 유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퇴직연금이 노동자의 노후소득 보장을 위한 올바른 궤도로 올려놓을 수 있을까.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보자면 공공기관 개방형 기금 활성화의 가능성이다. 이번 선언문에는 크게 세 가지 형태의 기금형 퇴직연금을 도입·활성화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첫 번째는 금융기관 개방형 기금이다. 은행, 증권, 보험 등 민간 금융회사가 별도 수탁법인을 설립해 다수 사업장이 참여하는 방식이다. 외형상 기금형이지만, 성격상 시장형 집합운용 모델에 가까운 초대형 계약형 펀드에 불과하다. 장기적 안정성과 집단적 위험 분산을 특징으로 하는 전통적인 기금형과는 완전히 다르다. 지배구조 역시 가입자가 추천한 일부(30% 이상)만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며, 투자 운용의 이해 상충 문제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두 번째는 연합형 기금이다. 복수의 특정 사용자가 연합해 공동 수탁법인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집합적으로 운영하는 방식이다. 네덜란드, 덴마크 등과 같이 노사 동수로 운영되는 '산업별 퇴직연금'이 대표적인 모델이다. 퇴직연금 도입 초기, 민주노총이 대안으로 제시한 방안이지만 당시 계약형만을 고집했던 정부와 퇴직연금 사업자의 반대로 제도화되지 못했다.
연합형 기금은 현행 계약형이나 금융기관 개방형보다 더 민주적인 지배구조를 갖추고,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투자와 자산 운용, 규모의 경제를 통한 비용 절감 등이 가능하다. 특히 기금으로 묶인 산업·업종 내에서 이직하거나 단기 근속을 반복해도 해지할 필요 없이 적립을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현 가능성은 낮다. 연합형 기금은 안정적인 노사관계와 제도화된 산별교섭 구조를 전제로 하는데, 한국은 거리가 멀다. 게다가 기금의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할 규모 있는 사업장은 이미 계약형 체계에 편입되어 있고, 금융계열사와의 거래 관계도 고착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로복지공단은 30인 미만 중소사업장을 대상으로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인 ‘푸른씨앗’을 운영한다. 3년간 수수료를 면제하고 최저임금의 130% 미만의 노동자와 사용자에게 최대 3년 재정을 지원한다
푸른씨앗
세 번째는 공공기관 개방형 기금이다. 공공기관이 수탁법인이 되어 중소·영세사업장의 퇴직연금을 기금으로 묶어 운영하는 방식이다. 현재 근로복지공단이 30인 미만 중소사업장을 대상으로 '푸른씨앗(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을 운영하고 있다. 3년간 수수료를 면제하고, 최저임금의 130% 미만의 노동자와 사용자에게 최대 3년 재정을 지원하고 있다.
민간 퇴직연금 사업자와 달리 이윤을 추구하지 않고, 정부가 재정지원을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하지만 이러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인 대규모 자산운용 인프라와 역량을 보유한 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전적으로 외부 자산운용사에 위탁해 운용한다. 위탁 수수료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장기적 자산배분 전략 등을 독자적으로 설계하거나 집행하기엔 제약이 따른다.
사실상 유일한 대안: 국민연금공단의 등판
공공기관 개방형 기금의 효과를 극대화하고, 안정적인 수익률을 통해 퇴직연금의 노후소득 보장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 사업자로 참여할 필요가 있다.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의 적용 대상을 300인 미만까지 확대하면, 장기 안정적인 기금운용과 체계적인 위험 관리, 그리고 대규모 운용 역량 등이 더욱 중요해진다. 특히 퇴직금의 사외적립 의무화도 공공기관 개방형 기금과 결합했을 때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다.
퇴직연금이 고용노동부 소관 사업이라는 부처별 칸막이만 넘어선다면,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 사업자로 참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 사업자로 참여한다는 자체가 퇴직연금제도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고유 역할과 지위를 침해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다소 생뚱맞지만 지난 1월 송언석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퇴직연금 기금화가 "개인 자산을 국유화"하겠다는 위헌적 발상이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기금형은 개인 자산의 소유권이 국가로 이전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그대로 귀속되며, 이미 국제적으로도 일반화된 모델이다. 예컨대 영국은 중소기업 노동자를 위한 공적 퇴직연금(NEST)이 있고, 네덜란드, 덴마크 등 주요 선진국에서는 기금형의 집합운용 방식이 이미 표준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퇴직연금은 금융자본의 이익이 아니라, 노동자의 노후소득 보장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20년 동안 방치한 채 제대로 내딛지 않은 길이기도 하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노동자의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분명한 나침반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번 노사정선언에도 노후소득 보장을 위한 명확한 경로는 가려져 있거나, 나중 과제로 미뤄져 있다. 가뜩이나 풍랑도 거세고 암초도 많은데, 목표마저 잃은 나침반으로는 안전하게 바다를 항해할 수 없다. 더 이상 표류하지 말고 노동자의 노후를 향해 바른 항로를 잡아야 한다.
▲이재훈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실장
본인
필자 소개 : 이재훈은 현재 사회공공연구원 연구실장,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정책위원입니다. 민주노총 정책실에서 일했고, 국민연금심의위원회, 국민연금심사위원회, 제4차국민연금제도발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공저로는 <국민연금 개혁의 논쟁지형과 쟁점 평가>, <연금민영화 되돌리기>, <노후보장성 강화를 위한 연금제도 개선방안>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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