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메릴랜드주 화이트오크에 위치한 식품의약국(FDA)
로이터 연합뉴스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가장 폭넓게 신약을 사용할 수 있는 국가는 단연 미국이다. 다국적 제약사들은 전체 신약의 70%를 미국 FDA에 가장 먼저 제출한다. 덕분에 미국 국민들은 유럽보다 평균 5.2개월, 일본보다 8.4개월 일찍 신약을 접한다. 출시 비율도 압도적이다. 조사된 신약의 98%가 미국에 출시되었지만, 호주(63%)나 일본(49%)은 절반 안팎에 그쳤다.
하지만 미국의 빠른 접근성은 결코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미국은 제약사가 출시 시 신약 가격을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어 약값이 매우 비싸다. 더 큰 문제는 무분별하게 빨리 도입된 고가 신약들이 정작 환자에게 꼭 필요한 '치료적 가치'를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이다.
미국 FDA가 암 환자들을 위해 초고속으로 심사해 준 신약들의 추후 성적표를 보면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한 국제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조기 허가된 암 치료제 가운데 후속 연구에 '환자의 수명을 실제 연장했다'고 확인된 약은 32%에 불과헀다.[2] 환자가 덜 아프고 편안하게 지내도록 '삶의 질을 개선했다'고 증명된 약은 12%로 더 처참하다. 진짜 오래 사는지, 고통은 줄여주는지 증명되지 않은 수많은 약들이 엄청나게 비싼 값에 팔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약사의 숨은 전략이 여기서 드러난다. 치료 효과가 확실한 좋은 약은 여러 나라에 신속하게 허가 신청을 서두르지만, 효과가 모호한 약일수록 여러 국가의 검증을 피해 미국에만 출시하는 꼼수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규제 완화인가
한국의 환자들이 신약을 사용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식약처의 심사 속도가 느려서가 아니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불확실한 약을 선별해 내기 위한 '급여결정 과정(의료기술평가, HTA)'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존 치료제와 비교해 정말 환자에게 이득이 있는지 검증하는 이 과정 때문에 제약사들은 굳이 한국에 먼저 출시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선등재 후평가'같은 제도가 속속 도입되며 급여 절차마저 간소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식약처의 규제가 유연해지고 실제 치료 효과를 입증하지 않은 조건부 허가가 남발되는 상황에서 급여 평가의 문턱까지 낮추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이는 임상적 유용성을 제대로 입증하지 못한 비싼 약들을 미국처럼 무비판적으로 사주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효과 좋은 약의 접근성 개선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치료 가치가 낮은 약의 출시만을 부추겨 건강보험 재정을 갉아먹고 불필요한 약물 사용을 늘리는 결과를 낳을 우려가 크다.
식약처가 내세우는 '심사기간 단축'은 결코 환자의 신약 접근성을 높이는 마법의 지팡이가 되지 않는다. 신약이 우리에게 빨리 도달하지 않는 가장 큰 장벽은 제약사의 철저한 시장 논리다. 심사 기간을 아무리 줄여도 효과가 불분명한 약들은 건강보험 급여의 벽을 넘을 수 없으며, 넘어서도 안된다. '세계 최단 기간 허가'라는 식약처장의 화려하고 현혹적인 구호에 속아 우리는 속도전을 즐기고 있어선 안 된다. 오히려 제약기업들의 숨은 의도를 의심하고, 진짜 환자를 위한 제도가 무엇인지 돌아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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