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촬영작은 몸체이지만 팝업식 플래시가 귀여운 모습이다.
이재필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을 교차하며 즐기는 여행은 묘한 해방감을 준다. 6×12가 공간을 압도하며 풍경의 숨결을 길게 펼쳐낸다면, 110 규격의 작은 카트리지 필름은 시간을 아주 밀도 있게 압축한다. 그날 나에게 주어진 것은 거대한 장면이 아니라 단 한 시간의 여유였다. 24번의 셔터, 손가락 한 마디만 한 작은 프레임. 한 시간의 산책으론 충분한 분량이다.
Fujica 350 Flash는 요란하지 않다. Fujinon 렌즈와 셀레늄 노출계 기반의 자동 노출, 그리고 기계식 셔터. 배터리 없이도 빛이 닿는 순간 스스로 전기를 만들어내는 셀레늄 노출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지기 마련이지만, 내 손안의 개체는 여전히 성실하게 바늘을 움직인다.
이 카메라는 사용자를 시험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담백하게 묻는다. "빛은 충분한가?" 35mm 필름을 반으로 쪼개 쓰는 하프프레임 카메라들이 세로 프레임을 강요하는 것과 달리, 110 필름을 쓰는 이 녀석은 태생부터 가로로 길쭉한 시선을 가졌다. 작지만 당당한 가로 프레임. 나는 오히려 이 작은 창으로 거리의 단면을 수평하게 쌓아 올리는 감각이 즐겁다.
한 시간의 을지로 산책
망우삼림을 나서자 익숙한 계단이 보였다. 아래로 내려가는 사선의 벽, 열려 있는 유리문, 그리고 분주히 지나가는 누군가의 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발끝의 방향과 보폭의 속도가 그 사람의 하루를 말해주는 듯했다.

▲Fujika350Flash촬영을지로 망우삼림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길에 뷰는 지나가는 행인들의 부지런한 발만 보인다.
이재필
나는 잠시 멈춰 섰다. 셀레늄이 빛을 읽고 기계가 준비를 마치기를 기다려 셔터를 누른다. 찰칵.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미세한 소리. 이 카메라는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 않는다. 덕분에 나는 그저 지나가는 행인과 같은 속도로 걷고, 같은 리듬으로 숨 쉬며 을지로의 일부가 될 수 있었다.
골목 깊숙이 들어서자 구수하고 달콤한 간장 냄새가 흘러왔다. 오래된 오뎅집이다. 이미 순대국밥에 소주 한 잔을 걸친 뒤였지만, 후각은 무심하게 또 다른 욕망을 부추긴다.
문 앞에 덩그러니 놓인 빨간 플라스틱 의자, 바랜 간판, 손때 묻은 냉장고. 로모 타이거 CN200 필름은 이 풍경을 과장 없이 따뜻하게 받아낸다. 빛이 부족한 골목이라 플래시를 켰다. 펑, 하는 섬광과 함께 빨간 의자가 어둠 속에서 선명하게 피어오른다. 필름은 솔직하다. 빛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닿으면 닿는 대로 기록한다.

▲Fujika350Flash촬영을지로의 유명한 도루묵, 어묵 맛집 한번쯤은 들어본 노포의 풍경
이재필
현상된 결과물을 보니 실내의 어둠과 외부의 빛이 생각보다 근사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셀레늄 노출계가 아직 살아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골목을 돌자 어르신들이 물살처럼 골뱅이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가게 앞에는 투박한 통닭 사진 하나가 큼직하게 붙어 있었다. 세련된 디자인도, 미려한 카피도 없다. 그저 "우리는 통닭을 판다"는 강력한 선언뿐이다.

▲Fujika350Flash촬영을지로의 골벵이 골목중에 직관적인 홍보물 옛날통닭의 먹음직한 모습이 파괴적인 비주얼을 보여준다.
이재필
디자인을 업으로 삼아 30년 가까이 살아왔지만, 이토록 정직하고 직관적인 광고를 나는 떠올려 본 적이 있었나 싶다. 110 필름의 작은 화면 안에 그 통닭 사진을 담는다. 플래시가 유리 표면을 스치며 간판의 색을 또렷하게 세운다. 미학보다 생존, 장식보다 명확함. 거리의 선배들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다.
흐린 하늘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해시계처럼 시간을 가리킨다. 오후 세 시. 골목 한가운데 멈춰 선 노란 지게차가 눈에 들어온다. 밤이면 비밀스럽게 로봇으로 변신할 것 같은 상상력이 발동한다.

▲Fujika350Flash촬영노란색 지게차가 이렇게 팬시해 보이다니 마치 장남감 모델을 옮겨 놓은 듯 했다.
이재필
Fujica 350 Flash의 렌즈는 과장되지 않는다. 나는 한 걸음 더 다가가 셔터를 눌렀다. 플래시가 지게차의 노란색을 한 번 더 밀어 올린다. 작은 프레임일수록 집중력은 높아진다. 불필요한 것들을 쳐내고 나니, 노란 지게차의 존재감이 필름 위에 꽉 차게 내려앉는다.
크기가 아니라 마음의 밀도
사진하는 사람들은 흔히 '행복은 판형 순'이라고 말한다. 큰 필름은 더 많은 정보와 디테일, 풍부한 계조를 담아내는 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오늘의 행복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가장 큰 판형을 잠시 맡겨두고, 가장 작은 프레임으로 걷는 시간. 주머니 속 작은 금속 덩어리 하나가 도시의 오후를 정성껏 받아 적는다.
110 필름의 작은 프레임은 욕심을 덜어내게 한다. 장면을 장악하려 하기보다, 스치듯 지나가는 순간들에 점을 찍듯 기록하게 한다. 계단, 간판, 의자, 지게차… 이 작은 점들이 이어져 한 시간의 산책이라는 선이 된다.
Fujica 350 Flash는 화려하지 않다. 하지만 셀레늄 노출계가 읽어낸 빛에 기계가 반응하고, 나는 그 선택을 신뢰하며 셔터를 누른다. 사진은 결국 기계와 사람의 협업이다. 거대한 풍경을 욕심내지 않고 그저 걷고, 멈추고, 기록했다.
▲Fujika350Flash촬영110mm 작은 판형이지만 충분히 빛을 표현해준다. 겨울 한낮의 긴 그림자는 추위를 잠시 잊게 만들어준다.
이재필
망우삼림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깨달았다. 카메라는 결국 내 리듬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을. 6×12가 장엄한 호흡이라면, 110 필름의 350 Flash는 조용한 맥박이다. 오늘 나의 맥박은 작고 단정했다. 벨에어가 돌아오면 다시 넓은 세상을 펼쳐 보겠지만, 이 작은 카메라는 또 다른 소박한 오후를 준비하며 내 주머니 속에서 숨죽이고 있을 것이다.
판형의 크기가 아니라 태도가 사진을 만든다. 을지로에서 충무로까지, 한 시간의 여유. Fujica 350 Flash와 함께한 작은 프레임의 오후는 그 어떤 대형 인화지보다 깊고 오래도록 내 마음속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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