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폭력의 범주현행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은 성별에 기반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여성폭력으로 정의하고, 관련 법률에 따라 다양한 유형의 폭력 예방과 피해자 보호·지원에 대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을 규정하고 있다. (그림 출처: 저자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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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기반 폭력은 가정폭력, 성폭력, 스토킹, 디지털 성범죄 등을 아우르는 개념으로, 성별에 따른 권력관계나 친밀한 관계를 매개로 발생하며 반복·지속되는 특성을 갖는다. 그럼에도 우리 법체계는 형법상 폭행·상해·강간 등의 구성요건과 맞닿아 있는 폭력들을 하나의 구조적 문제로 통합 관리하기보다 발생 장소와 관계에 따라 법률을 분절적으로 규정해 왔다.
이로 인해 폭력의 가해자 처벌에 관련해서만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스토킹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이 병존하고,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법률로는 '가정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성매매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스토킹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별도로 존재한다. 이처럼 국가 기능이 처벌과 지원으로 분기되고 사안마다 개별 특례법이 양산되면서, 폭력에 대한 국가의 개입 기준은 점차 복잡한 미로처럼 변모했다.
최근 성평등가족부는 '여성폭력방지기본법'의 정의에 남성 피해자를 포함하고, 법의 명칭까지 바꿀 수 있는지 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보편적 권리 구제라는 시적 요구에 부응하려는 시도로 평가할 수 있다. 다만 형법 자체의 구조적 개편이 동반되지 않은 채 명칭이나 정의만을 조정하는 방식이 폭력의 심층적 원인까지 해결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법치국가가 진정 '국민의 기본권' 보장하려면
폭력을 어떻게 명명할 것인가 보다 먼저 살펴봐야 할 지점은 폭력이 타인의 신체와 정신, 사회적 관계를 파괴한다는 권리 침해의 본질에 있다. 교제폭력, 스토킹, 디지털 성착취처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사건들 역시, 공통적으로 불평등한 권력 구조와 친밀성을 매개로 한 동일한 지배 기제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반복되고 확산되는 양상을 띤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할 때,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나 폭력의 유형에 따라 법을 세분화하여 대응하는 현재의 방식은 오히려 폭력의 구조적 원인을 가리고, 일상 속에 깊이 뿌리내린 폭력의 전파와 확산에 조기에 개입하는 데 명확한 한계를 드러낸다.
이 때문에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규율하는 기본법으로서 형법의 역할이 중요하다. 형법은 단지 범죄의 목록을 나열한 법전이 아니라, 국가가 개인에게 행사할 수 있는 형벌권의 한계를 정하고 동시에 개인의 기본권을 보호하겠다는 사회적 약속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사법제도는 관행처럼 여성에 대한 폭력을 '사적인 문제'나 '관계 내의 갈등'으로 축소해 다루어 왔다.
그 결과 사회적 공분이 일 때마다 '가족의 회복'이나 '가중처벌'을 명분으로 한 특별법들이 누더기처럼 덧붙여졌고, 폭력 대응의 기준은 파편화되어 제도 전체가 지향하는 일관된 보호 원칙을 찾기 어려워졌다. 법치주의가 단지 개별 사안에 대한 즉시적인 응징을 넘어, 국민의 기본권을 안정적으로 보호하는 유기적인 체계로 기능하고 있는지 엄중히 되물어야 하는 이유다.
따라서 이제 필요한 것은 국가가 어떤 행위를 범죄로 규정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피해를 어떤 기준으로 보호할 것인지에 대한 원칙을 법의 근간에서부터 다시 세우는 일이다. 그 출발점 중 하나는 형법이 더 이상 여성을 처벌의 대상으로 전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정비하는 것이다. 2019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형법상 낙태죄 조항은 처벌 효력을 상실했으나, 국회의 입법 미비로 인해 조문은 여전히 형법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사문화된 조문의 존재 문제를 넘어, 형법이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가치 척도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한 국가의 태도를 방증한다. 이제 형법의 정비를 통해 제도적 전환이 필요하다.
사법 정의, '검거'를 넘어 '결과'로 말해야
법이 지향하는 가치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 법이 현장에서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면밀히 살피는 일이다. 2014년부터 2020년까지의 여성폭력 사건 처리 통계를 살펴보면 우리 형사사법 시스템의 구조적 허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래 두 개의 그림에서 확인되듯, 경찰 단계에서의 높은 검거율에도 불구하고 사건이 기소와 재판 단계로 이행될수록 최종 처벌에 이르는 비율은 급격히 감소하는 경향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성폭력의 검거율·기소율·징역형 선고율 추이 변화(2014?2020)여성폭력 유형별로 사건 처리 단계별 비율을 살펴보면, 경찰 단계에서의 높은 검거율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피의자는 기소로 이어지지 않으며, 최종심에서 금고형을 포함한 징역형을 선고받는 비율은 그보다 더 낮게 나타나고 있다. (그림 출처: 2022년 여성폭력통계 보고서, 저자 2차 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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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사건 처리 단계별 비율의 연도별 분포(2014-2020)검거율은 한 해 동안 입건된 여성폭력 사건 대비 경찰이 피의자를 검거한 사건의 비율을, 기소율은 전체 피의자 중 검사가 약식재판 또는 정식 공판을 청구한 피의자의 비율을, 징역형 선고율은 최종심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은 범죄자의 비율을 의미한다. (그림 출처: 2022년 여성폭력통계 보고서, 저자 2차 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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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사법기관과 처리절차별 수치만 살펴보면 전체 여성폭력 사건 건수 대비 최종 처벌 비율이 상당하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하지만 기소율은 검거된 인원 중 기소처분을 받은 사람을, 징역형 선고율은 최종심에서 판결이 내려진 사람들 중에서 무죄나 집행유예 등을 제외한 징역형 이상을 의미한다.
만약 경찰이 가해자 100명 중 97명을 붙잡아도, 검찰 단계에서 절반가량이 걸러지고 재판 단계에서 다시 그 절반 이하만이 실형을 선고받는다면, 전체 범죄 중 가해자가 실질적인 엄벌에 처해지는 경우는 손에 꼽을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이는 가해자에게는 범죄의 대가가 낮다는 잘못된 신호를, 피해자에게는 법이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절망감을 안겨줄 뿐이다.
국가가 아무리 강력한 처벌 의지를 천명하고 최고형량을 향상하더라도 형사 사법 처리의 과정에서 사법적 관용이나 입증 한계라는 명분 아래 정의가 증발해 버린다면 법치주의가 설 자리는 없다. 진정한 사법개혁은 단순히 수사 기구의 명칭이나 권한을 기계적으로 조정하는 차원을 넘어, 형사사법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정의의 누수'를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폭력 예방과 피해 회복을 담당하는 제도의 역할 역시 재정비될 필요가 있다. 국가의 역할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위계적 관계와 권력 구조에 개입하고 이를 변화시키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데 있다. 이는 시민이 존엄을 유지하며 자신의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실질적 역량을 보장하는 일과 직결된다. 보호 대상을 누구로 설정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쟁에 앞서, 왜 특정한 조건에서 폭력이 반복되는지 구조적 맥락을 먼저 점검해야 한다.
헌정 질서를 뒤흔들었던 계엄이 국가에 의한 폭력이었다면, 그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이 보여준 연대와 참여는 기본권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이러한 시민 정신은 이제 사적 영역에서 발생하는 침해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구체적인 정의의 실현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처벌과 보호의 기준을 분명히 하고, 사법 현장에서 이 기준이 제대로 구현되도록 점검하는 일이다. 폭력에 대응하는 국가의 기준이 명확해질 때, 법은 처벌을 넘어 권리를 지키는 제도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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