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파업의 관덕정 광장> 강요배 화백
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뺑소니 경관을 쫓는 시위군중을 향해 경찰의 일제 사격이 개시되고, 그 자리에서 6명이 희생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도민들의 분노를 촉발시킨 이 만행에 대한 미군정의 미온적인 대처가 도민들을 정치적으로 단결시켜 이듬해 4월 3일의 항쟁을 유발했다.
학생들을 인솔하고 기념식에 참석한 황후길은 발포 현장에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재판에 넘겨져 징역 6월과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1947.4). 그리고 제주에서 대학살극이 자행된 이듬해에 행방불명됐다.
3·1절 사건 이전에도 제주섬에서는 항일진영과 미군정·친일진영 사이의 긴장감이 존재했다. 흔히 좌우 대립으로 불리는 이 구도에서 우위를 점한 쪽은 전자다.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브루스 커밍스는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한 탓에 일제강점기 제주 사람들의 항일의식은 여타 지역민들에 비해 높았다고 말한다. "일본과의 근접과 잦은 내왕은 제주도 이주민들을 급진화시켰다"라며 "해방 후 이 섬은 급격한 인구의 유입을 경험했다"고 설명한다.
일본에 돈 벌러 갔다가 항일의식이 높아진 제주 출신들이 해방 뒤에 대거 귀환했다. 이는 이 섬의 정치 상황에 영향을 미쳤다. 브루스 커밍스는 미군 전술부대, 미군 제6연대, 미군 제59군정중대가 순차적으로 상륙한 뒤에도 제주도인민위원회가 이 섬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고 설명한다.
"우파집단들은 경찰과 군정이 인민위원회의 탄압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고 불평했다"라는 내용이 <한국전쟁의 기원>에 적혀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아무 일도 하기 힘들 정도로 항일진영의 역량이 우세했던 것이다.
4·3사건 피해자 20명에 대한 재심에서 전원 무죄
이런 구도가 이어졌다면, 1947년 3·1절 때 경찰이 함부로 발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날의 동시 사격은 섬의 역학구도에 변화가 생겨 제주도 보수진영이 자신감을 갖게 된 뒤에 벌어진 일이다.
제주는 1946년 8월 1일에 제주도가 됐다. 제주의 격이 높아진 것은 좋은 일이지만, 친일진영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도 승격은 육지 병력이 제주도에 증파되는 법적 토대가 됐다. 미군 병력만 갖고는 항일진영을 이길 수 없었던 친일진영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일이었다. 제주4·3평화재단이 발간한 <제주 4·3 바로알기>에 이런 설명이 있다.
"제주도의 도 승격은 우익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도 승격을 줄곧 주장하여왔던 우익세력의 손을 미군정이 들어준 셈이 되었다. 이후, 도 수준에 맞게 경찰 병력이 증강되고 조선경비대 9연대가 창설되는 등 공권력이 강화되었다. 이에 맞추어 1946년 말부터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직접 탄압이 시작되었다."
도 승격에 따라 육지 병력이 상륙한 일은 3·1절 발포에도 연쇄작용을 미쳤다. 위 진상조사보고서는 "(1947년) 2월 23일 충남·충북 경찰청 소속 각 50명씩 100명으로 편성된 응원경찰대가 제주에 들어왔다"라며 "이 응원경찰대가 일주일 후 3·1절 발포 사건을 유발한다"고 기술한다. 뺑소니 경관 뒤에 있는 군중을 향해 발포한 쪽은 2월 23일에 상륙한 경찰들이었다.
도 승격 전에는 경찰이 주민들에게 총을 쏘기 힘들었다. 그랬던 구도가 친일진영에 유리하게 변경되면서, 경찰이 제주 민중보다 친일진영을 더 의식하게 되는 상황이 생겨났다. 이것이 그날의 발포가 손쉽게 일어나는 배경이 됐다.
발포 현장에 있다가 유죄선고를 받고 이듬해에 행방불명된 황후길의 한(恨)은 2023년 9월 26일에 약간이나마 풀렸다. 이날 제주지방법원은 그를 비롯한 4·3사건 피해자 20명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유죄의 증거가 없다며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 역시 무죄를 구형했기 때문에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황후길을 비롯한 제주 사람들은 4·3 당시에 폭도로 간주됐다. 이들이 외쳤던 구호들도 폭도의 선전선동으로 폄하됐다. 그랬던 것이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어지면서 새로운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그날 이들은 28년 전의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족분단을 조장하는 새로운 지배구도에 맞서는 제2의 독립운동을 개시했다. 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이 재심 판결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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