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2.28 20:30최종 업데이트 26.02.28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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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대시위> 강요배 화백강요배

1919년 3월 1일 다음으로, 3·1절과 관련해 중요한 또 다른 날은 1947년 3월 1일이다. 1919년 그날이 일제에 맞서 독립만세를 외친 날이라면, 1947년 그날은 제주도민들이 3·1운동을 기념하는 한편 새로운 의미의 자주독립을 외치기 시작한 날이다.

1946년 12월 18일 자 <경향신문>에 실린 보건후생부 발표에 따르면, 그해 8월 25일의 제주 인구는 27만 6148명이다. 이를 감안하면, 1947년 그날의 제주가 3·1절 때문에 얼마나 들썩였겠는지를 알 수 있다. 국무총리 소속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리던 제주북국민학교 주변에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날의 군중 수는 대략 2만 5천~3만 명으로 추산됐다. 이날 10개 면에서도 별도의 기념식이 열렸는데, 각 지방마다 수천 명씩 모였다."

1951년에 제주북국민학교로 개칭될 제주북공립국민학교에 최대 3만 정도가 모이고, 나머지 10개 면에 각각 수천 명씩 모였다. 그날 28만 인구의 제주 전역은 3·1절 행사장에 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 당시엔 도로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행사장 가는 길이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주섬 북부 해안가의 중간쯤인 위 학교에서 동쪽으로 6킬로미터쯤 되는 곳에 삼양동이 있다. 삼양동 출신으로 국민학교 교사가 된 황후길도 동료 교사 및 고학년 학생들과 행사에 참석했다.

그를 비롯한 제주 사람들이 기념식에 간 것은 28년 전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 행사는 향후 전개될 제2의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이는 식민지배의 산물인 남북분단을 거부하고 진정한 독립을 지향하는 4·3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도민들 분노 촉발시킨 만행에 미군정의 미온적인 대처

이 행사가 그런 성격을 갖게 된 것은 항일운동가 출신의 대회장인 50대 중반의 안세훈 등이 "3·1혁명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라며 미국의 지배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행사가 그렇게 발전한 데는 수만 명의 대중이 그런 의식을 갖게금 만든 그날의 불상사가 결정적 작용을 했다.

11시에 시작된 기념식이 끝난 뒤인 오후 2시경부터 가두시위가 전개됐다. 수만 명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벌이는 시위였다. 시위는 두 갈래로 진행됐다. 제주 읍내를 기준으로 서쪽에 사는 거주자들은 서쪽 시위대에, 반대편 거주자들은 동쪽 시위대에 가세했다.

미군정은 가두시위를 불허했다. 그렇지만 수만 명의 기세를 당해낼 수 없어 그냥 지켜볼 뿐이었다. 귀가하는 길에 벌이는 시위였기 때문에, 얼마 안 있어 상황이 잠잠해지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서쪽 시위대가 지나가는 관덕정 앞에서 사고가 터졌다. 조선시대의 제주목 관청에 건축된 관덕정은 군사 훈련을 지휘하는 일종의 사열대였다. 기념식장으로부터 약 300미터 거리인 관덕정 앞은 오후 2시 45분경에는 다소 한산해져 있었다. 이 시각은 서쪽 시위대의 본대가 통과한 뒤였다. 그때는 그 앞 광장에 100~200명 정도가 있었다고 위 보고서는 알려준다. 그 시각 상황은 이랬다.

"사건은 한 기마경관이 관덕정 옆에 자리잡았던 제1구 경찰서로 가기 위해 커브를 도는 순간 갑자기 튀어나온 6세 가량의 어린이가 말굽에 채이면서 시작됐다. 기마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몰랐던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는 관람 군중들이 야유를 하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일부 군중들은 '저놈 잡아라!'고 소리치며 돌멩이를 던지며 쫒아갔다. 당황한 기마경관은 군중들에 쫓기며 동료들이 있던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고,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총파업의 관덕정 광장> 강요배 화백제주4·3 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

뺑소니 경관을 쫓는 시위군중을 향해 경찰의 일제 사격이 개시되고, 그 자리에서 6명이 희생되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도민들의 분노를 촉발시킨 이 만행에 대한 미군정의 미온적인 대처가 도민들을 정치적으로 단결시켜 이듬해 4월 3일의 항쟁을 유발했다.

학생들을 인솔하고 기념식에 참석한 황후길은 발포 현장에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재판에 넘겨져 징역 6월과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1947.4). 그리고 제주에서 대학살극이 자행된 이듬해에 행방불명됐다.

3·1절 사건 이전에도 제주섬에서는 항일진영과 미군정·친일진영 사이의 긴장감이 존재했다. 흔히 좌우 대립으로 불리는 이 구도에서 우위를 점한 쪽은 전자다. <한국전쟁의 기원>에서 브루스 커밍스는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한 탓에 일제강점기 제주 사람들의 항일의식은 여타 지역민들에 비해 높았다고 말한다. "일본과의 근접과 잦은 내왕은 제주도 이주민들을 급진화시켰다"라며 "해방 후 이 섬은 급격한 인구의 유입을 경험했다"고 설명한다.

일본에 돈 벌러 갔다가 항일의식이 높아진 제주 출신들이 해방 뒤에 대거 귀환했다. 이는 이 섬의 정치 상황에 영향을 미쳤다. 브루스 커밍스는 미군 전술부대, 미군 제6연대, 미군 제59군정중대가 순차적으로 상륙한 뒤에도 제주도인민위원회가 이 섬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다고 설명한다.

"우파집단들은 경찰과 군정이 인민위원회의 탄압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다고 불평했다"라는 내용이 <한국전쟁의 기원>에 적혀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아무 일도 하기 힘들 정도로 항일진영의 역량이 우세했던 것이다.

4·3사건 피해자 20명에 대한 재심에서 전원 무죄

이런 구도가 이어졌다면, 1947년 3·1절 때 경찰이 함부로 발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날의 동시 사격은 섬의 역학구도에 변화가 생겨 제주도 보수진영이 자신감을 갖게 된 뒤에 벌어진 일이다.

제주는 1946년 8월 1일에 제주도가 됐다. 제주의 격이 높아진 것은 좋은 일이지만, 친일진영의 입김이 크게 작용했던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도 승격은 육지 병력이 제주도에 증파되는 법적 토대가 됐다. 미군 병력만 갖고는 항일진영을 이길 수 없었던 친일진영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일이었다. 제주4·3평화재단이 발간한 <제주 4·3 바로알기>에 이런 설명이 있다.

"제주도의 도 승격은 우익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도 승격을 줄곧 주장하여왔던 우익세력의 손을 미군정이 들어준 셈이 되었다. 이후, 도 수준에 맞게 경찰 병력이 증강되고 조선경비대 9연대가 창설되는 등 공권력이 강화되었다. 이에 맞추어 1946년 말부터 인민위원회에 대한 미군정의 직접 탄압이 시작되었다."

도 승격에 따라 육지 병력이 상륙한 일은 3·1절 발포에도 연쇄작용을 미쳤다. 위 진상조사보고서는 "(1947년) 2월 23일 충남·충북 경찰청 소속 각 50명씩 100명으로 편성된 응원경찰대가 제주에 들어왔다"라며 "이 응원경찰대가 일주일 후 3·1절 발포 사건을 유발한다"고 기술한다. 뺑소니 경관 뒤에 있는 군중을 향해 발포한 쪽은 2월 23일에 상륙한 경찰들이었다.

도 승격 전에는 경찰이 주민들에게 총을 쏘기 힘들었다. 그랬던 구도가 친일진영에 유리하게 변경되면서, 경찰이 제주 민중보다 친일진영을 더 의식하게 되는 상황이 생겨났다. 이것이 그날의 발포가 손쉽게 일어나는 배경이 됐다.

발포 현장에 있다가 유죄선고를 받고 이듬해에 행방불명된 황후길의 한(恨)은 2023년 9월 26일에 약간이나마 풀렸다. 이날 제주지방법원은 그를 비롯한 4·3사건 피해자 20명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유죄의 증거가 없다며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 역시 무죄를 구형했기 때문에 이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황후길을 비롯한 제주 사람들은 4·3 당시에 폭도로 간주됐다. 이들이 외쳤던 구호들도 폭도의 선전선동으로 폄하됐다. 그랬던 것이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어지면서 새로운 위상을 확보하고 있다. 그날 이들은 28년 전의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민족분단을 조장하는 새로운 지배구도에 맞서는 제2의 독립운동을 개시했다. 이 선택이 옳았다는 것이 재심 판결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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