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차를 타는 사람들>(김숲 지음, 강혜진 그림) 본문 중에서.
노란상상
'필수노동'은 코로나19 이후 등장한 개념이다. 재난 상황에서도 사회 기본 기능을 유지해주는 직업군으로, 타인과 접촉이 불가피한 이들은 전염에 취약하다. 의료, 돌봄, 물류, 안전 분야에 분포하는데 경비원, 간호사, 조리사, 택배기사, 환경미화원 등이 속한다. 이들 유니폼에는 명찰이 붙어 있지만, 대다수는 '클레임' 걸 때만 눈에 불 켜고 이름을 확인 후, 고객이란 이름으로 군림하려 든다.
이들은 투명 인간으로 묘사된다. 빌딩에 광을 내고, 대형 밥솥에 밥을 짓고, 택배를 나르는 사람들을 그림작가는 회색 외곽선으로 여리게 표현한다. 글작가도 발맞춰 노래한다. "우리는 그저 이름 없는 사람. (중량) 조용해서 들리지 않는 사람. 투명 인간으로 사는 사람." 이어지는 장면은 점심시간. 변기 위와 트럭 짐칸에 도시락과 컵라면이 놓여 있다. 이들은 '투명 식사'를 하듯 끼니를 때운다.
그러나 이 그림책은 단단하고 명랑한 서사로 끝내 활보한다. "나도 이름은 있어" 말하는 인물들은 온전한 자기 존재("나도 누군가의 엄마라네")를 밝히고, 나의 일이 사회에 필수 역할을 하므로 냉대 받을 이유가 없음을 증명한다. "아줌마, 아저씨"로 불리는 현실을 솔직히 드러내면서도, "몸 쓰는 일보다 머리를 쓰라고?" 내뱉는 몰상식한 발언들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유쾌하게 일축한다.
버스 하차 후 집으로 닿는 오롯한 저녁들
이야기 끄트머리, 종일 일하던 사람들의 전쟁 같은 하루가 지나간다. 그림작가는 인물들의 퇴근 시간을 네 컷으로 표현해 펼침면 가득 보여준다. 땀내 나는 유니폼을 시원하게 갈아입는 이들은 경비원, 조리사, 청소원, 택배기사. 연령도 성별도 다양한 이들은 이른 새벽, 6411 버스를 함께 탄 탑승객들이다. 6411을 타고 돌아가는 이들은 "오롯한 나"가 되려 사랑하는 가족을 만나러 간다.
▲<첫차를 타는 사람들>(김숲 지음, 강혜진 그림) 본문 중에서.
노란상상
책의 백미는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 모습을 표현한 장면이다. 청소원은 한 손에 통닭 한 마리를 든 채 발걸음이 가볍고, 종일 요리하던 조리사는 고양이와 침대에서 포근한 밤을 맞이한다. 삼각김밥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택배기사는 된장찌개가 놓인 식탁에서 가족과 피로를 녹인다. 각자 소중한 것이 드러난 장면에서 노동자는 자기 취향과 기호가 있는 입체적인 존재가 된다. 이들은 일찍 잠든다. 다시, 첫차를 타기 위해.
고 노회찬 의원의 연설에서 비롯된 이 책은 '평화의나무 합창단'이 부른 곡 <첫차를 타는 사람들>을 작사한 글작가 김숲의 노랫말을 풀어낸 것이다. 여기에 우리 이웃의 "내일이 조금 더 다정한 날이길 희망"하는 강혜진 그림작가가 힘을 합했다. 그림책을 낸 출판사 노란상상은 미화원의 하루를 그린 <어둠을 치우는 사람들>, 여성 노동자들의 생생한 일터를 그린 <오! 미자> 등 '노동인권 그림책 시리즈'를 꾸준히 내왔다. 어린이와 읽기에 탁월한 이웃의 이야기니, 펼쳐보길 권한다.
여전히 출근길은 억겁의 과업이고, 유쾌하지 않는 생존의 도돌이표다. 그래도 우리 삶 어딘가 살맛이 묻어난다고 말하는 이 그림책에서 단단한 아침의 기원을 본다. 새벽 4시가 가까운 시간, 먼저 출발한 선배들의 기운을 이어받아 문간을 나선다. 오래전, 비상구 계단에서 사탕을 쥐어줬던 파란 작업복 언니의 품위를 따라서. 새벽을 열어준 기운들에게 배턴을 이어받는다. 어깨를 쫙 편다.
첫차를 타는 사람들
김숲 (지은이), 강혜진 (그림), 노란상상(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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