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3월 6일 전면 해금조치로 동교동에서 4년 만에 만나 반갑게 해후하는 김영삼(오른쪽 두번째)과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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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호적에는 42세)이 된 김영삼이 김대중(45세)·이철승(47세)과 함께 1969년부터 제창한 40대 기수론은 그 당시 쿠데타로 불렸다(1969.11.10.<경향신문>). 1929년생이 1924년생 및 1922년생과 함께 일으킨 이 쿠데타는 야당인 신민당의 세대교체를 촉진하고 박정희의 정국 운영에도 연쇄작용을 일으켰다.
박정희는 1905년생인 신민당 부총재 유진산이 야당의 1971년 대선 후보가 되기를 희망했다. 유진산은 박정희와 '통'했다. 1964년 8월에 박정희의 언론 장악을 위한 언론윤리위원회법의 국회 통과를 도운 인물이다. 이 때문에 사쿠라라는 악명이 유진산을 따라다녔다. 40대 기수론 제창은 유진산이 야당 후보가 되는 것을 막는 일이기도 했다.
1917년생인 박정희의 기대와 달리,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의 최종 생존자는 김대중이었다. 김대중은 45.3%를 득표해 박정희(53.2%)의 간담을 서늘케 만들었다. 이는 박 정권이 김대중에게 과민반응을 보이다가 2년 뒤 김대중 납치사건이라는 초대형 자충수를 두는 한 가지 원인이 됐다.
대선 후보가 되지는 못했지만 40대 기수론을 발판으로 위상을 한껏 높인 김영삼은 1974년과 1979년에 신민당 총재가 되어 대여투쟁의 선명성을 높였다. 그와 박정희의 대결은 1979년 10월의 부마민주항쟁을 촉발시키는 주요 원인이 됐고, 부마항쟁은 박 정권의 내분을 촉진해 10·26의 총성이 울려 퍼지게 되는 배경을 제공했다.
이처럼 공화당 정권의 명운에까지 연쇄작용을 일으킨 40대 기수들의 화려한 등장을 도운 조력자가 있었다. 1963년 제6대부터 1979년 제10대까지 국회의원을 지내고 1979년에 국회부의장이 된 고흥문(1921~1998)이 40대 기수론의 숨은 공로자였다.
40대 기수론이 국민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줬지만, 신민당 내부의 정치 지형에는 즉각적 영향을 주지 못했다. <김영삼 회고록> 제1권은 "당 원로와 중진들은 보수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이면서 한결 같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 뒤 "특히 진산의 태도는 격노 그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파 당원들에게 나의 지명운동에 동조하지 말도록 지시했고, 이재형·정일형 씨 등 다른 파벌의 노장층도 여기에 대해선 진산과 보조를 같이했다"고 회고록은 말한다. 이처럼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칠 수도 있었던 40대 기수론이 역사를 바꾸는 에너지를 갖게 된 데는 유진산 계열인 고흥문의 힘이 컸다.
고흥문의 숨은 공로
고흥문은 유진산이 40대들에게 길을 비켜주게 만들었다. 김충식 전 <동아일보> 기자의 <KCIA 남산의 부장들>은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민주당 전당대회(1970.9.29.) 직전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진산계인 신민당 사무총장 고흥문은 9월 어느 날 진산에게 후보 경쟁에서 물러서라고 권유했다"고 알려준다.
고흥문은 '대선 출마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40대 셋 중 하나를 지명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라'는 말로 유진산을 누그러트렸다. 1970년 9월 25일 자 <경향신문>은 "고흥문 사무총장 등 당 간부들의 힘이 크게 주효"했다며 이들이 9월 24일 저녁에 "출마선언을 취소한다는 조건으로 40대 후보에게 지명을 요청해보라"고 건의한 것이 유진산의 마음을 바꿔놓았다고 전했다.
결국에는 유진산이 후보 지명권을 갖지 못했지만, 고흥문의 설득은 유진산이 스스로 물러설 명분을 갖도록 만들었다. 자파 지도자를 사퇴시킨 이런 노력은 야당이 세대교체를 이뤄 한층 강력한 대여투쟁을 펼치는 데 기여했다.
위 김충식 책에 등장하는 당시 중앙정보부 간부는 "박 대통령은 어떤 형태로든 진산이 후보로 올라오길 바랐"다면서 김계원 중앙정보부장도 한밤중에 유진산 집을 드나들었다고 증언한다. 당내 기반이 단단한 데다가 이처럼 정권의 지원까지 받은 유진산은 아군인 고흥문의 설득을 받고 뜻을 꺾었다. 고흥문의 숨은 공로가 크다고 평하지 않을 수 없다.
호가 '인지'인 고흥문은 40대 기수들보다 조금 빠른 1921년에 태어난 서울 사람이다. 갓 출생한 그의 이름을 짓기 위해 할아버지가 생각해 낸 한자는 두 글자가 아니라 네 글자, 흥인지문(興仁之門)이다. 고흥문과의 인터뷰를 담은 1991년 1월 5일 자 <경향신문>의 설명이다.
"사람의 이름 자에 흔하지 않는 문(門)자가 들어간 것은 그의 조부께서 동대문의 정식 명칭인 흥인지문에서 가운데 2자는 별호로, 처음글자·끝글자를 이름으로 지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유인즉 그의 모친이 자신을 수태했을 때 조부께서 동대문의 모습을 꿈꾸었다는 소위 현몽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스무 살 때인 1941년에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에 도매상사 지배인이 된 고흥문은 1947년에는 흥한무역 사장이 됐다. 20대 초반에 경영자가 되어 재물이 오가는 '문'이 된 그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이 되는 정치활동에도 참여했다. 해방 직후에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 참여해 황해도당 재정부장이 됐다. 제2대 총선이 있었던 1950년에는 조병옥의 선거 참모가 됐고, 그 뒤 재정 후원자를 겸하면서 조병옥의 대권 행보를 지원했다.
1963년에 국회의원이 된 고흥문은 46세 때인 1967년에 신민당 사무총장이 되어 야권의 핵심 인물로 부각됐다. 그는 야당의 재정뿐 아니라 인적 통합에서도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했다. 1976년 9월 16일 자 <조선일보>는 그 두 가지를 이렇게 설명했다.
"5·16 이후 민정이양과 함께 결성된 제1야당에 적극 참여, 바람 잘 날이 없이 고달픈 야당의 사무총장을 5회나 연임했다. 매사를 상식선에서 다룬다는 평을 듣는 그는 인화와 조정, 인간적 신의라는 생활철학으로 야당 살림을 꾸려 당내외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자주 해결했다."
군사정권의 러브콜도 거부

▲1979년 4월 21일 서울 도봉구 신민당 지구당 개편대회에 참석한 고흥문 위원장(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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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흥문이 신민당 간부로 활약한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는 중앙정보부를 앞세운 야당 파괴 공작이 극렬할 때였다. 이 시기에는 야당이 재정 안정과 통합을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유진산 같은 인물이 야당 지도부에 있었던 것이 그런 현실을 웅변한다.
바로 그 시기에 고흥문은 자신의 사업 기반을 발판으로 신민당 재정에 기여하고 사람들을 두루두루 포용하며 당내 화합에 기여했다. 이는 그가 한국 민주화에 기여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사람과 재물이 오가는 '문'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지만, 그 문이 독재정권의 통로가 되는 것까지는 허용하지 않았다. 유진산에게 접근한 박 정권이 그에게도 손길을 내밀었지만, 그는 뿌리쳤다. 2019년도 창원대 박사논문인 이명인의 '박정희시대 제일야당의 파벌 연구'는 1974년에 고흥문이 신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한 일을 거론하는 대목에서 이런 설명을 한다.
"고흥문에 따르면 자신이 당권도전 선언을 한 뒤 청와대에서 사람이 찾아와 '윗선의 분부'라면서 원한다면 자신을 돕겠다는 제의를 하였다고 한다. 고흥문은 권력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 싫어 이를 거절했는데, 얼마 후에 그 보복 조치로 동생의 사업체에 세무사찰이 나와 경리장부를 압수해갔다고 하며 이후 3년간 장부를 돌려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흥문은 대의원 729명 중 111명의 지지를 받아 김영삼·김의택·정해영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 과반 득표가 나오지 않아 2차 투표에 들어간 뒤에 그는 김영삼을 지지해 총재로 만들었다. 박 정권이 고흥문을 돕고자 한 것은 김영삼을 떨어트리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김영삼 당선을 도왔던 것이다.
1980년에 전두환의 정권 장악으로 인해 정치활동이 규제된 그는 관제 야당들이 민정당과 함께 국회를 이끈 1980년대 중반에 정치권의 복귀 요청에 응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발을 디딜 무대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노태우 정권 때는 국무총리직도 고사했다. 1988년 12월 2일 자 <동아일보>는 이현재 총리의 후임 문제에 관한 보도에서 "후임 총리 물망에 구야당 중진인 고흥문 전 국회부의장이 올랐으나 본인은 간접대화를 통해 사양했다는 전문(傳聞)"이라고 전했다.
고흥문은 박정희의 독재로 한국 사회가 신음하던 시절에 야당의 재정 및 내부통합을 챙김으로써 야당이 생명력을 지키는 데 기여했다. 그는 군사정권의 러브콜도 거부했다. 반독재 투쟁노선을 일관되게 고수한 한국 현대사의 숨은 공신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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