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10월 23일 대통령 재임 당시 국무회의 주재하는 전두환
연합뉴스
전두환의 사조직이 아닌 박정희의 사조직을 우연히 들춰낸 강창성의 수사는 왕조시대식으로 말하면 역린을 건드리는 사안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역공을 받았다. '강창성이 경상도 장교들의 씨를 말리려 한다'라는 여론이 군부 내에 조성됐고, 이로 인한 압력을 견디지 못한 그는 그해 8월 중순에 보안사령관직에서 물러나 제3관구사령관으로 옮겨갔다. 전두환에게 일격을 가하려다가 실패한 직후에 사실상의 좌천을 당했던 것이다.
전두환이 준장 계급장을 단 것은 1973년 1월이다. 전두환은 "나는 의욕과 사명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는 말로 그때의 설렘을 회고했다. 그 직후에 강창성이 전두환을 사지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관련되지 않았거나 박정희가 모른 체 했다면, 윤필용 모반사건이 아니라 전두환 모반사건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을 수도 있다. 전두환이 이때의 원한을 잊지 못하고 12·12 및 5·17 쿠데타 뒤에 강창성에게 보복을 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제3관구사령관으로 밀려났다가 군복을 벗은 강창성은 1976년 3월 13일에 항만청장이 됐다. 이듬해 12월 16일부터 해운항만청장으로 명함을 바꾼 그는 12·12 쿠데타 2개월 뒤인 1980년 2월 22일까지 재직했다. 그런 뒤, 5·17 쿠데타 2개월 뒤인 7월 23일 자택 앞에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돼 청장 재직 당시의 비리와 금품수수에 대한 조사를 받았다.
합수부는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그 본인뿐 아니라 해운항만청 직원들도 압박했다. 해운진흥과장이었던 최아무개는 서울시청 인근인 무교동 국제호텔로 연행돼 전임 청장의 비리를 제보하라는 협박을 받았다. 수사관들은 그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1981년 4월 8일 자 <경향신문>은 강창성에 대한 2심 선고가 확정된 사실을 보도하면서 "해운항만청장으로 재직하면서 해운업계 대표 등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가 인정됐다고 전했다. 대법원 상고를 포기한 강창성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됐다가 1982년 12월 24일 가석방됐다.
2024년 5월 28일, 진실화해위원회는 강창성이 구속영장 없이 불법 구금된 사실과 수사 과정에서 협박 등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면서, 고 강창성 및 가족에게 사과하고 피해를 회복시켜줌과 동시에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대한민국 국가에 권유했다.
재심을 담당한 법원은 유죄 인정의 근거가 된 자백의 효력을 부인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서울고법은 "영장 없이 강제로 연행된 후 가혹행위를 당해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에서 허위로 공소사실 기재와 같은 자백 진술을 했다고 판단"된다고 인정했다. 자발적 진술을 하기 힘든 상태에서 자백한 내용이 검찰 공소장에 기재됐으므로 자백 내용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자백 이외의 다른 증거들로는 혐의를 인정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내렸다.
전두환은 박정희의 강권을 뿌리치고 군에 남았다. 그런 그를 강제 전역시킬 뻔했던 인물이 강창성이다. 전두환 정권이 강창성에게 씌운 혐의가 아무 근거가 없다는 서울고법의 재심 판결은 1980년의 강창성 체포 및 기소가 전두환의 보복이었다는 시각에 한층 더 힘을 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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