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시작(Nikon F501촬영)하늘과 가까운 마을은, 늘 까마득한 언덕을 먼저 내어준다. 숨이 조금 차오를 즈음, 시야는 천천히 열리고 발끝 아래로 도시가 겹겹이 내려앉는다.
이재필
느림의 미학, 신세동 벽화마을
이 시끄럽고 무거운 친구와 함께 향한 곳은 1월 마지막날 안동의 신세동 벽화마을이었다. 도시재생 사업으로 벽화와 조형물이 들어섰지만, 마을의 골조는 여전히 수십 년 전의 시간을 간직한 곳이다. 가파른 언덕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만큼 좁은 골목, 비켜 서려면 남의 집 담벼락에 몸을 붙여야 하는 모퉁이들.
나는 가방 한구석에 최신형 디지털 미러리스를 챙겨 왔었다. 빠르고, 정확하고, 가볍고, 소리 없이 찍히는 완벽한 기계. 하지만 이상하게도 신세동의 골목을 걷는 내내, 내 손은 계속해서 F-501을 찾았다.
초기 AF 시스템은 느리다. 뷰파인더 중앙의 작은 초점 영역에 피사체를 맞추면, 렌즈는 '지잉- 지잉-' 소리를 내며 앞뒤로 움직인다. 초점을 찾기 위해 망설이는 그 짧은 시간. 현대의 기준으로는 답답할 수 있는 그 지연(Lag)이, 신세동의 골목과는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이곳은 서두르면 안 되는 동네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며 숨을 고르듯, 카메라도 피사체를 명확히 보기 위해 숨을 고른다. 렌즈가 초점을 찾아 헤매는 동안, 나는 뷰파인더 너머의 풍경을 한 번 더 응시하게 된다. 낡은 창틀 사이에 널린 빨랫줄의 흔들림, 담벼락 위에서 졸고 있는 고양이의 수염, 갈라진 시멘트 바닥 틈새로 피어난 이름 모를 풀꽃.
기계의 망설임은 곧 시선의 머무름이 되었다. "빨리 찍고 넘어가라"고 재촉하지 않는 카메라 덕분에, 나는 골목의 시간을 천천히 음미할 수 있었다.

▲고양이마을(Nikon F501촬영)신세동의 골목은 햇살이 들면 가장 먼저 고양이들이 자리를 차지한다.
이재필
골목과 기계가 나누는 대화
오후의 빛이 벽화 위로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그림자는 길어졌고, 골목의 질감은 더욱 도드라졌다. 나는 다시 셔터를 눌렀다.
"철-컥! 징-"
고요한 골목에 F-501의 셔터 소리가 메아리쳤다. 누군가는 소음이라 할지 모르지만, 그곳에서 그 소리는 마치 골목과 나누는 대화처럼 들렸다.
덜 다듬어진 벽돌의 거친 표면, 세월의 풍파에 페인트가 벗겨진 대문, 불규칙하게 이어진 전깃줄들. 신세동의 풍경은 매끄럽지 않다. 그리고 F-501 역시 매끄럽지 않다. 완벽하지 않은 AF 성능, 미세하게 손끝에 남는 셔터 쇼크, 뷰파인더 주변부의 어둑함.
그 불완전함이 서로 겹쳐졌다. 너무나 선명하고 깨끗한 최신 렌즈로 담았다면 오히려 이질감이 들었을지 모른다. 전자식의 편의를 받아들였으되 기계식의 야성을 버리지 못한 과도기의 카메라와, 현대적인 벽화를 입었으되 옛 시절의 가난과 정을 품고 있는 골목. 두 세계는 서로의 결핍을 이해한다는 듯 묘하게 닮아 있었다.
나는 뷰파인더 속의 붉은 LED가 깜박이며 초점이 맞았음을 알릴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확신이 든 순간, 과감하게 셔터를 눌렀다. 사진을 '찍는다(Shoot)'기보다, 시간을 '새긴다(Engrave)'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신세동정상(Nikon F501촬영)마을 꼭대기까지 오르면 도시는 한 번에 펼쳐진다. 골목은 비좁게 몸을 세우며 이어지지만,그 끝에서 만나는 시야는 뜻밖에 넉넉하다. 발아래로 겹겹이 놓인 지붕들, 멀리 번지는 강빛과 낮은 연기.좁은 길을 지나왔기에 더 크게 열리는 풍경이다.
이재필
경계에 서서 바라본 풍경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안동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해가 넘어가며 도시를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최신 장비로 이 풍경을 담았다면, 암부의 디테일을 살리고 노이즈 하나 없는 매끈한 이미지를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F-501로 바라본 세상은 조금 달랐다. 뷰파인더는 광학식이기에 있는 그대로의 빛을 보여주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이미 필름 특유의 입자감이 덧입혀지고 있었다.
기계적 신뢰와 전자적 편의가 어색하게 공존하던 1980년대. 누군가는 그것을 '미완성'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실패'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이 언덕 위에서 나는 그것을 '낭만'이라 부르고 싶었다. 정돈된 것과 균열이 간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상. 과거와 미래가 충돌하며 빚어내는 파열음. F-501은 그 경계선 위에서 가장 솔직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악기였다.
마지막으로 셔터를 눌렀다. 여전히 소리는 우렁찼고, 손맛은 짜릿했다. 그 묵직한 울림이 골목의 낡은 벽을 타고 흘러, 내 심장 가장 깊은 곳으로 되돌아왔다. 이 카메라는 단지 '자동초점의 시작'이라는 기술적 이정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니콘이라는 거인이 새로운 시대로 건너가기 위해 내쉬었던, 뜨겁고 거친 숨결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숨결은 나의 호흡과 섞여 신세동의 어느 골목에 영원히 박제되었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진동하며 현실의 시간을 알렸지만, 나는 한동안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못했다. 아직 그 투박한 진동의 여운이 손바닥에 남아 있었기에. 전자식의 문턱, 그 어스름한 경계에서 만난 F-501은 그렇게 나에게 '살아있는 기계'의 온기를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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