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2.11 16:22최종 업데이트 26.02.11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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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일출이 떠오르는 바다연합=OGQ

2026년 새해를 맞아 직장에서도 새 목표를 세웠다. 현재 한국 최초의 성소수자 인권 지원 재단인 비온뒤무지개재단에서 일하고 있는데, 여느 비영리 단체가 그렇듯 재단도 재정의 안정이 오래된 목표다. 특히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에 이 문제는 더욱 어렵다.

한국 정부는 여전히 성소수자 차별 금지 정책에 매우 소극적이다. 관련한 정책도 유관 단체 지원도 없다. 많은 경우 기업들도 성소수자 인권을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정의가 아니라 사회적 논쟁의 대상으로 본다. 사회 공헌 활동을 한답시고 기부했다가 오히려 역풍만 맞기 딱 좋은 분야로 파악한다는 뜻이다. 이러니 기업 기부를 끌어내기도 어렵다. 그런데 과연 개인들이라고 다를까?

즉 성소수자 인권단체는 다른 비영리 단체보다 재정 안정을 위해 넘어야 할 허들이 더 많다. 그래서 겨우 명맥만 유지하거나 존폐를 고민하는 경우도 많다. 비온뒤무지개재단도 마찬가지다. 아슬아슬하게 위기를 헤쳐나가던 단체가 이제 본격적으로 적자 운영에 돌입했다. 물론 이 위기는 예견되어 있었기에 활동가들은 몇 년 전부터 대비책을 계속 고민했다. 모금을 더 끌어올 곳이 더 없을지 고민했고 유산 기부처럼 새로운 기부 방식을 모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문제 해결 방식이 있었다. 재단의 정기적인 수입이 될 정기 기부를 늘리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사례 검토를 통해 활동가들은 직접 정기 기부를 요청하는 전화 모금이 가장 효과적인 방식임을 확인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답은 찾았지만 다시 마주한 장벽

활동가들이 전화와 그렇게 친숙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격이 외향적이냐 내향적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재단의 활동가 대부분이 90년대생인데 전화로 모든 걸 해결하는 건 아득한 옛날이야기다. 지금이야 음식 배달도 병원이나 숙박 예약도 모두 휴대폰 앱을 통해 하겠지만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그 모든 걸 전화로 해결했다. 배달 음식이 먹고 싶다면 식당에 전화해서 메뉴를 고르고 주소를 알려주는 식이었다. 그때는 전화하는 일이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는 일을 하다 쓰던 컴퓨터 프로그램에 문제가 생겨도 그걸 제작한 회사에 전화하는 게 아니라 실시간 채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거의 모든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 이제 전화란 사적으로 편한 사이에 사담을 나눌 때나 쓰는 소통 수단이 되었다. 그만큼 편하지 않다면 대부분 문자를 통해 해결한다.

그런데 우리 앞에 잠재적 기부자에게 전화를 거는 일이 떨어졌다. 전화를 해서 날씨 이야기를 하거나 수다를 떠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에게 정말 부담스러운 요청, 재단에 정기 기부를 해달라는 요청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부담에 부담이 얹어진 형국이다.

전화 모금에 대한 준비는 철저히 이루어졌다. 비온뒤무지개재단이 무슨 일을 하는 단체인지, 지금의 한국 사회에 왜 우리가 필요한지, 앞으로는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단체가 발전할 것인지 모금 명분을 확립하는 장문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기부자에게 어떻게 말을 걸 것인지 정하는 대본도 이에 기반하여 작성했다.

인공지능 비서가 내게 전한 의외의 답

전화 모금을 위해 철저히 준비했음에도 잠재적 기부자에게 전화를 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AI생성 이미지.오마이뉴스

만반의 대비를 갖춘다면 어려운 언덕도 수월하게 넘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진짜 어려운 언덕은 전화가 아니었다. 마음이었다. 한번 전화를 걸고 다음 전화를 걸기까지의 간극이 쉬이 좁혀지지 않았다. 수화기를 들기 전, 한 번도 대화를 나누어보지 않은 낯선 사람이 내 전화에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다. 심지어 그런 사람이 정기 기부를 요청한다면 상대방은 무슨 생각을 할까.

사실 내가 그런 전화를 받는다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다. 기부를 할 만하다면 할 것이다. 사정이 어렵다면 거절할 것이다. 제안은 명료하고 선택은 단순하다. 그런 일인데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활동가 한 사람당 200명이 넘는 통화가 배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속도로 목표에 언제 도달할지 우려스러울 따름이었다.

나는 요즘 종종 구글의 인공지능 비서인 제미나이와 대화를 하며 하루를 끝내곤 한다. 처음에는 필요한 정보가 있을 때만 제미나이를 찾았는데, 우연한 계기로 고민을 털어놓다가 의외로 이 인공지능 비서가 내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상황을 마주했다.

전화 모금을 시작한 첫날 저녁, 제미나이에게 물었다. 전화 거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그 전화를 통해서 그보다 더 부담스러운 모금 요청을 어떻게 하면 편하게 할 수 있을까. 목표를 채우기 위해선 많은 전화를 걸어야 하는 데 수화기조차 들지 못하는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제미나이에게 앞서 했던 이야기들을 상세히 설명했다(당연한 말이지만 이 인공지능 비서가 왜 사람들이 전화를 걸고 모금을 요청하는지 모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몇 번의 대화 끝에 제미나이가 내놓은 답은 단순했다.

"아무 생각을 하지 말고 일단 다이얼을 눌러, 걱정은 그다음부터 시작해."

생각은 일단 시작하고 나서 하라

나는 제미나이의 조언을 따랐고 이후로 상황은 나아졌다. 통화를 마치고 다음 통화로 넘어가는 시간이 월등히 줄었고 자연히 하루 통화량도 늘었다. 다만 정기 기부 유치 성공 건수는 여전히 낮은 편인데 이 문제도 언젠가는 해결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부담스러운 전화 통화를 어떻게 시작할 수 있지?"

나는 제미나이에게 그렇게 물었다. 통화가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을 방법을 알려주길 바랐다. 하지만 인공지능 비서는 예상과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다. 전화 모금이 부담스럽지 않은 일이 될 수는 없다.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걱정과 주저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다. 머리를 비우고 일단 수화기를 들고 번호를 눌러라. 생각은 그다음부터 시작해라. 그래야만 일을 시작할 수 있다.

며칠의 시간이 흐르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과연 전화와 모금에만 해당하는 말일까. 사실 생각보다 몰라서 못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의 경우 지금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이미 알고 있다. 단지 부담감 때문에 시작을 못 하는 경우가 많다. 해가 바뀌며 새해 결심을 많이 했을 텐데 이런 이유로 시작조차 못 하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이미 1월이 끝났다. 늦었을까. 공교롭게도 지금 내 앞에는 달력이 놓여있는데 거기에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진짜 다시 태어납니다. 진짜 최종 시작 구정부터."

우리에게는 아직 한 번의 새해가 더 남아있다. 다가올 설날에 음력 새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새해 결심이 실패했다 말하기에 아직은 이르다. 그렇다면 이런 마음으로 원하는 바를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아무 생각하지 말고 일단 시작하자, 걱정은 그다음부터 하자.

사무실 책상에 놓인 달력, 진짜 시작은 구정부터라는 문장과 EBS 캐릭터인 똘비가 있다신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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