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연구가'인 박종평 서울여해재단 연구소장이 1월 2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우리들의 이순신> 특별전에서 이순신 장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성호
- '이순신 연구가'로서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순신의 면모를 소개한다면.
"이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우리들의 이순신> 특별전을 보면, 이순신의 친필본 <난중일기>가 전시돼 있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의 다양한 면모가 드러난다. 제가 인상 깊게 봤던 대목은 이런 깊은 감정을 표현했을 때다. '다행(多幸)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우리가 글을 쓸 때 똑같은 말이 반복되면 '땡땡(")'을 치듯이 <난중일기> 원문에도 이처럼 강조하는 '땡땡'이 등장한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강조하는 '땡땡'의 대표적인 사례가 '어머니가 평안하시다'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다. 그때 이순신이 쓴 일기를 보면 '다행(多幸)'을 한 번만 쓴 게 아니라 '땡땡'을 여러 번 쓰면서 '다행이다, 다행이다, 다행이다'를 반복해 강조한다. 일본군이 침략해 엄청난 만행을 저지를 때는 분노가 치밀어 ''화가 났다, 화가 났다, 화가 났다'라고 하거나, 조선 수군이 궤멸했을 때는 '간담이 찢어진다(肝膽焚裂)'는 표현을 반복해서 썼다.
(이순신 특별전을 기획한) 서윤희 학예관이 말씀하셨듯이, 이순신이 둘째 아들 면의 전사 소식을 듣고 난 뒤 쓴 일기를 보면 맨 마지막에 '하룻밤이 1년 같다'고 했는데, 그 표현도 세 번을 반복해서 쓴다. 그렇게 '땡땡'으로 표현한 대목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여러 모습의 '인간 이순신'의 면모가 드러난다. 만약, '다행이다', '화가 난다', '하룻밤이 1년 같다'고 한 번만 썼다면, 조금 건조하고 인간미도 덜 느껴졌을 것이다. 특히, 어머니의 안부를 듣고 '다행'이라면서 일기에 '땡땡'을 친 이순신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는 듯 생생하다."
역사의 행간(行間)을 읽으며, 사료의 빈 공간을 채운다
- 역사 해석은 기본적으로 사료를 바탕으로 하지만, 공백이 있다. 그 공백을 어떻게 메우며 해석하는지.
"1980년대 대학을 다닐 때 선배들이 늘 '신문을 읽을 때 행간(行間)을 보라'고 했다. 기사에 직접 표현되지 않은 이면의 사실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라는 얘기였다. 그런 훈련이 도움이 많이 됐다. 일본어와 중국 정치를 공부한 것도 사료나 정보를 얻고 해석하는데 보탬이 됐다. 제가 살아온 모든 경험이 그러한 '공백'을 메우는 능력을 기르는 바탕이 됐다.
예를 들자면 '상유십이(尙有十二)', 즉 '신에게는 아직도 12의 배가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문장의 뒷배경을 살펴본다고 하자. 그 문장과 직접 연결된 사료 외에도 간접적인 사료들을 들여다보면 더욱 풍부하게 전후 배경을 살필 수 있다. 그런 게 쌓이다보면, 해석의 폭이 넓고 깊어진다.
제가 번역한 <난중일기>를 본 분들은 '각주가 왜 이렇게 많아'라고 하실 거다. 본문보다 각주가 더 많을 때도 있고, 책에 다 싣지 못한 각주도 적지 않다. 그 각주는 '공백'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다. <난중일기>를 읽다보면 생기는 질문들, 행간으로 해석해야 하는 빈 공간, 사료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고민한 결과물이 그 각주와 주석들이다."

▲1월 2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우리들의 이순신> 특별전에서 관람객들이 이순신 영정 전시품을 사진 찍고 있다.
유성호
- 충무공 이순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오자(吳子)'를 꼽았는데.
"조선시대에 문과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공부하고, 무과는 무경칠서(武經七書)를 공부한다. '무경칠서'는 중국 병법의 고전으로 여기는 7종의 병법서인데 손자병법·오자병법·사마법·육도·울요자·삼략·이위공문대를 가리킨다. 사마천의 사기열전(史記列傳)에는 손자와 오자가 다 등장하는데, 이순신의 삶을 살펴보면 오자와의 접점이 더 잘 드러난다.
오자나 이순신이나 모두 유학을 했고, 용병술 측면에서도 유사한 측면이 많다. 오자 용병술의 핵심은 '부자지병(父子之兵)'이다. 장수와 병사가 아버지와 아들처럼 마음을 나누는 관계를 비유한 말로, 동고동락으로 단결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부하 군사의 종기 고름을 입으로 빨아서 빼준 오자의 모습이나, <임진장초(壬辰狀草)>에서 이순신이 전투에 참가해 공을 세운 병사와 노비의 명단을 기록해 임금에게 보고하는 모습이 모두 '부자지병'의 용병술이다.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헌신하고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고 또 그 사랑이 전투의 승리로 선순환 되는 모습이 서로 닮아 있다. 물론, 대조적으로 다른 측면도 있다. 두 사람의 후반기 삶의 모습은 대조적이다."
오자(吳子)의 영향을 받은 이순신, 후반기 삶은 대조적
- 이순신이 <오자병법>의 오자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나.
"손자의 병법은 이론서이자 개론서라서 실전에 큰 도움이 안 된다. 상상을 많이 해야 한다. 반면, 오자의 병법은 실전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복잡하지 않고, 실제 전투에 적용할 때도 직접적인 도움을 준다.
명량해전 전날, 이순신이 부하 군사들에게 당부했던 말이 '일부당경 족구천부(一夫當逕 足懼千夫)'와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다. '한 사람이 길목을 제대로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죽기를 각오하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뜻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는 오자병법에 나오는 '필사즉생 행생즉사(必死則生 幸生則死)'에서 '幸'을 '必'로 한 글자만 달리해, 같은 의미로 쓴 것이다.
이는 이순신이 <오자병법>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필사즉생 필생즉사'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와는 결이 다르다. 충무공 이순신의 삶 곳곳에서 오자의 영향이 나타난다. 오자의 말, 오자의 행동을 이순신은 끊임없이 반추했고, 현장을 가거나 전투를 하거나 지휘를 할 때는 끊임없이 오자의 방법론을 고민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명량해전 전날 일기의 내용이다."
- 이순신이 오자의 영향을 받았지만, 후반기 삶의 모습은 대조적이었다고 했는데.
"오자와 이순신이 장수로서의 고민은 비슷하지만, 삶의 마지막은 100% 다르다. 오자는 출세를 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고 부인을 죽이고 또 나라를 바꾸고 했던 사람이었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순신의 죽음과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달랐다. 오자의 비참한 최후는 이순신이 반대하고 거부했던 삶이었다. 이순신이 오자의 최후를 반면교사로 삼지 않았을까 싶다."

▲'이순신 연구가'인 박종평 서울여해재단 연구소장이 1월 2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우리들의 이순신> 특별전에서 <난중일기>의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글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성호
- 백승종 교수가 최근 <원균의 진실>(논형)이라는 책을 펴냈다. '원균이 비겁하고 무능했다'는 후대의 평가는 과장됐고, 이순신을 영웅으로 부각하는 과정에서 원균을 의도적으로 악역으로 만든 게 아니냐는 문제제기다. 이순신 연구가로서 이같은 지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원균 명장론'이라든가 '선무공신(宣武功臣, 임진왜란에서 무공을 세운 사람에게 부여된 칭호)에 이순신, 권율, 원균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역사적 평가가 끝났다'고 얘기하지만, 본질은 하나다. 임진왜란 시기를 되돌아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도망을 갔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왕조실록의 기초가 되는 사초를 불지르고 도망간 사관도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원균은 전투에 나섰고 전사했다. 거기까지다.
원균이 국가를 위해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은 것은 맞고 존중해야 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온몸을 바친 사람, 그래서 백성을 살린 사람과,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 온몸을 바쳤지만 그 백성을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게 만든 사람을 같은 급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이것 역시 명확한 사실이다.
이순신은 이순신, 원균은 원균...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 전제를 인정한 상태에서 이순신과 원균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명장은 명장다워야 한다. 명장은 주장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역사의 기록과 후대의 평가에서 나온다. 그 시기에 나온 수많은 기록을 읽어보고 평가해야 한다. <선조실록>에 나와 있는 일부 문장이 떼어내 원균을 명장이라고 얘기하는 건 한계가 있다. 본질은 하나다. 백성을 사랑한 사람과 백성을 힘들게 한 사람은 다르다는 것이다.
이순신과 원균을 선과 악의 대립구도로 몰고가면 안 된다. 이순신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원균을 낮추는 게 아니다. 이순신은 이순신으로 보고, 원균은 원균으로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다. 자꾸 구분하고, 비교하려고 하니까 문제가 되고, 본질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 충무공 이순신 서거 420주기를 맞았던 2018년 1200쪽이 넘는 <난중일기> 완역본을 펴냈다. 당시 상당히 화제가 됐고, 수작(秀作)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집필 과정이 녹록지 않았을텐데.
"번역본 작업이 7년가량 걸렸다. 사실 그 책은 각주가 생명이었는데, 정리한 각주 중에 빠진 게 A4 용지 200장 정도 분량이다. 이 각주까지 포함됐다면, 책도 400페이지가량 늘어났을 거다. 아쉽기도 하고 잘 뺐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쇄를 거듭하면서 조금씩 바꿨다. 그 이후로 A4 용지 150장가량의 추가 원고 작업을 했다. 이 내용을 책에 넣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깝다. 개정판을 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시간이 지나면 각주 량도 늘텐데, 걱정이 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도 개정판을 못 낸다면, 그 자료를 그냥 공개할 생각도 있다."

▲1월 2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우리들의 이순신> 특별전에서 관람객이 충무공 이순신이 직접 쓴 <난중일기> 친필본을 살펴보고 있다.
유성호
- 이순신의 어록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몇 가지 꼽는다면.
"첫 번째는 1593년 5월 1일 일기 앞에 다른 종이에 써서 붙여놓았던 메모다. 이날부터 다시 일기를 쓰면서 붙여놓은 메모로 추정된다.
기록할 생각이 있었으나, 바다와 육지에서 아주 바빴고, 또한 휴식도 할 수 없어 잊고 손 놓은 지 오래 되었다. 이제부터 이어간다 (意於筆硯 而奔忙海陸 亦不休息 置之忘域久矣 承此).
두 번째는 조카 이분이 저술한 <행록>에 나오는 문구인데,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지금 신(臣)에게는 전선이 아직도 12척이 있습니다. 죽을힘으로 막고 싸운다면, 오히려 해낼 수 있습니다. … 전선의 수가 비록 적을지라도 미천한 신이 죽지 않는다면,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 戰船雖寡, 微臣不死, 則賊不敢侮我矣)
세 번째는 1593년 9월 15일 일기 뒤 메모다. <화포(조총)를 봉해 보내는 일을 임금님께 보고하는 장계, 1593년 8월, 封進火砲狀>에도 나온다.
정철총통(正鐵銃筒)은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그것을 만들고 다루는 미묘한 이치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온갖 생각 끝에 얻어내(今者百爾思得) 조통(鳥筒, 조총)을 만들었습니다. 왜통(倭筒, 왜의 조총)에 비교해도 아주 절묘합니다. … 도(道) 안에서 같은 형태로 많이 만들 일을 순찰사와 병사(兵使)에게 견본을 실어 보내며 공문을 보내 시행하도록 하게 했습니다.
(正鐵銃筒 最關於戰用 而我國之人 未詳其造作妙法 今者百爾思得 造出鳥筒 則最妙於倭筒 唐人到陣 試放無不稱善 則已得其妙 道內一樣優造事 巡察使兵使處 見樣輸送 移牒知委爲乎事)
네 번째는 1594년 11월 28일 일기 뒤 메모다. <손자병법> '모공'에 나오는 '知彼知己 百戰不殆 不知彼而知己 一勝一負 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와 비슷한 내용이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 번을 싸워도 백 번 승리한다. 나를 알지만 적을 모르면, 한 번은 이기나 한 번은 진다. 나도 모르고 적도 모른다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한다. 이것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이론이구나. (知己知彼 百戰百勝. 知己不知彼 一勝一負. 不知己不知彼 每戰必敗. 此萬古不易之論也)
다섯 번째는 '떠도는 백성들을 돌산도에 들어가 살게 하고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릴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려 주시기를 임금님께 청하는 장계'다. (1593년 1월 26일, 請令流民入接突山島耕種狀)
지금은 나랏일이 어렵고 위태롭고 백성은 살 곳을 잃었기에, 비록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이 들어가 농사를 짓게 해도 특별히 말을 기르는데 해를 끼칠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말을 기르고 백성도 구할 수 있어 양쪽 모두 편리하게 될 듯 합니다. (今則國事艱危 民生失所 雖使無賴之氓入作 別無貽害於牧馬 則牧馬救民 庶使兩便)
1943년 미국 상원의원 알렉산더 와일리, 세계 최초로 외국의 국회에서 이순신을 언급

▲미국 상원의원 알렉산더 와일리 연설문이 미국에서 발행하는 우리 동포의 언론 매체인 <국민보>(1943년 6월 2일)에 실렸다. 이 연설문에는 "세계에서 일본인을 쳐 이긴 나라는 조선뿐이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여러 번 전쟁이 있었는데, 1592년에 조선 해군대장 이순신이 철갑선을 처음으로 창조해 침략하는 일본 해군을 함몰시켰다. 그 후에 조선이 350여 년 동안을 무사히 지냈다."는 내용이 나온다.
국민보
- 이순신 연구가로서 누구보다 많은 사료와 기록을 접했을텐데, 다른 이들이 이순신을 평가한 말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을 몇 가지 꼽는다면.
"첫 번째는 대제학 이식의 <택당집> 중 '이순신 시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활 쏘는 군사들에게는 언제나 화살 없이 활만 주고는 반드시 적선이 바짝 다가왔을 때를 기다린 뒤에 화살을 나눠주었으며, 또한 스스로 활을 들고 활 쏘는 군사들과 함께 나란히 쏘았다. 장사와 군사들은 공이 다시 탄환에 다칠까 걱정해 붙들고 멈추길 간청하며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몸을 어찌 사랑하지 않으십니까"라고 했다. 공(公)은 하늘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내 운명은 저기에 달려있다. 그런데 어찌 너희들에게만 홀로 적과 마주하도록 시킬 수 있겠는가(我命在彼 豈可令汝輩 獨當賊乎)"라고 했다.
두 번째는 미국 상원의원 알렉산더 와일리(Alexander Wiley, 1884~1967, 위스콘신주)가 1943년 4월 22일 미국 상원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미국 승인을 요청하는 연설이다. 이 연설문은 당시 미국에서 발행하는 우리 동포의 언론 매체인 <국민보>(1943년 6월 2일자)에도 소개됐다. 알렉산더 와일리는 이 연설에서 '일본의 미국 침략에 따라 미국이 일본과 싸워 승리하기 위해 당시 중경에 위치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연설문에는 세계 최초로 외국의 국회에서 이순신을 언급한 내용이 담겨 있다.
세계에서 일본인을 이긴 나라는 조선뿐이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여러 번 전쟁이 있었는데, 1592년에 조선 해군대장 이순신이 철갑선을 처음으로 창조해 침략하는 일본 해군을 함몰시켰다. 그 후에 조선이 350여 년 동안 무사히 지냈다.
They are the only people who ever defeated Japan. Many wars have been fought between the Koreans and the Japanese. It was in 1592 that the Korean Admiral Yi Soon-Sin invented ironclad warships and annihilated the Japanese invading fleet. After this defeat Korea remained at peace for 300 years.
세 번째는 이에인 딕키(Iain Dickie) 등이 지은 <해전의 모든 것(Fighting Techniques of Naval Warfare)>(이에인 딕키 외, 한창호 옮김, 휴먼 앤 북스, 2010)에 실린 내용이다.
조선의 구세주는 자비롭고 인정 많은 인물로, 피난민들이 그에게 도움을 청해 의탁할 정도였다, 그러면서 피난민들은 일본 침략자들의 위치와 의도에 관한 귀중한 정보들을 제공했다. 이순신은 해안 어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해안과 조류에 관한 지식을 늘렸고, 백성들에게 호의를 베풂으로써 조선 수군이 목표물을 추적하도록 도와주는 전문적인 관측망을 구축할 수 있었다. ... 이순신의 연이은 승리로 조선은 5년 동안 여유를 누릴 수 있었으며, 이 기간 동안 히데요시는 침공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Korea's saviour was a humane and compassionate man to whom refugees fled for assistance, bringing with them priceless knowledge of the location and intentions of their Japanese tormentors. Yi augmented his own knowledge of the coast and tides by good relations with the coastal fisherman, acquiring by his courtesy a network of expert observers who helped him to track his fleet's objectives …… Yi's victories bought Korea a space of five years in which Hideyoshi suspended his invasion.
[관련기사] 서윤희 학예관 "죽을힘을 다해 싸운 이순신, 죽을힘을 다해 준비한 특별전"
▲서윤희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과 충무공 이순신 연구가인 박종평 서울여해재단 연구소장이 1월 2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우리들의 이순신> 특별전에서 '정왜기공도병' 병풍을 바라보고 있다. 1598년 왜군을 무찌르는 명군의 모습을 담은 채색화 병풍 ‘정왜기공도병’은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과 국립중앙박물관이 각각 앞·뒤 부분을 보관해왔는데,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나란히 공개됐다.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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