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2.08 18:52최종 업데이트 26.02.0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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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11기 출신들이 군에서 차지한 위상은 대단했다. 전두환·노태우로 인해 이 기수의 명예가 깎이기는 했지만, 이들은 1960년대 이후로 육군의 중추 그룹이었다.

육사 1기부터 10기까지는 최단 3주(8기 특1반)에서 최장 6개월(7기·8기)의 교육을 받았다. 이런 단기 코스를 계속 유지할 수는 없으므로, 일반 대학 방식의 교육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과제였다. 4년제 육사의 첫 기수인 11기의 등장은 바람직하고도 필요했다.

육사 11기 이하들은 자부심과 결속력이 강할 뿐 아니라 성실성과 실력도 우수하다는 평을 받았다. 이런 평가를 낸 곳은 주한미국대사관이다. 대사관은 1962년 8월 17일 케네디 행정부의 딘 러스크 국무장관에게 보낸 '한국 군부 내 파벌주의' 보고서에서 "훈련과 성실도에서 그들의 선배보다 뛰어난 4년제 육사 졸업생들"이라는 표현을 썼다.

누구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육사 11기의 긍지는 상당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육사 1기'로 생각했다. 김충식 전 <동아일보> 기자의 <KCIA 남산의 부장들>에도 인용됐듯이, 이들은 "정규 1기를 뽑는다고 해놓고 왜 11기라고 졸업시키느냐?"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사실, 이들은 '너희가 1기다'라는 보장을 받고 입학했다. 그런데 정부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은 육사 졸업반 때인 1955년 4월에 "정규 육군사관학교 제1기생을 11기생으로 한다"라는 통보가 육군본부에서 육사에 전달됐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생도들의 반발이 일어났다. "애당초 진해에서 육사를 창설할 때 육사 11기를 모집한다고 할 것이지, 온 천지에 정규 1기생을 모집한다고 공포해놓고 이제 와서 일방적으로 바꾸겠다는 것은 정부가 우리에게 사기를 친 것이나 다름없다고 반발했다"라는 내용이 위 회고록에 적혀 있다.

실력과 성실성도 대단하지만 자부심과 위세 또한 만만치 않았던 육사 11기를 길러낸 주역이 있다. 독립군 장교 출신이었던 안중근의 조카인 안춘생(1912~2011)이다. 친일파 장군들이 득실대는 그 속에서도 독립군 출신이 '정규 육사 1기'를 양성했던 것이다.

육군사관학교의 기틀을 세운 사람

광복군 출신으로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맡은 안춘생위키미디어 공용

육사 11기 입학식은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월에 있었다. 안춘생은 1951년 10월 30일부터 1952년 11월 10일까지 제9대 교장으로 재직했다. 당시의 전두환·노태우가 볼 때는 그가 '초대 교장'이나 다름없었다.

안춘생이 육사 11기를 길러냈다고 말한 것은 단지 그가 11기 입학 당시의 교장이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11기 이하가 공부하고 훈련받는 기틀을 만든 장본인이다. <순국> 2023년 7월호에 실린 김승기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국방사부장의 기고문 '안춘생의 항일독립전쟁과 국군 창군 및 호국전쟁'은 육군 감찰감이었던 안춘생 준장이 육사 교장에 임명된 일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교장 안춘생 등 216명의 창설요원들은 4년제 육사 창설의 임무를 명 받아 미 군사고문단의 협조하에 미국 육사의 제도·내규 등을 면밀히 검토하여 각종 제도를 정립하였다. 육사는 11기 생도들을 모집·선발하여 마침내 1952년 1월 20일 경남 진해에 최초의 4년제 정규 사관학교, 일명 '한국의 웨스트포인트'로 다시 태어났다."

안춘생이 교장이 된 시점과 육사 11기가 입학한 시점 사이에 근 3개월이 존재한다. 이 기간 동안 안춘생은 2백여 명의 요원들과 함께 4년제 창설을 준비했다. 정규 육사의 산파역이었다고 부를 만한 인물이다.

육사의 교훈(校訓)은 지(智)·인(仁)·용(勇)이다. 이를 채택한 교장도 안춘생이다. <24-25 육군사관학교 요람>은 "안춘생 교장은 전인교육과 군인의 특성을 고려하여 다방면에 걸친 의견수렴 끝에 지금의 지·인·용을 육사의 교훈으로 채택"했다고 알려준다. 그러면서 유교 경전인 <중용>을 근거로 세 가지 덕목이 선택됐다고 말한다.

육사 2기 출신인 박정희가 집권하던 시절인 1969년 12월 5일에는 "참되게 자라자! 배워서 이기자! 나라를 빛내자!"로 교훈이 바뀌었다. 이것이 원래의 지·인·용으로 돌아간 것은 전두환 집권기인 1982년 5월 1일이다.

육사 요람은 안춘생이 지닌 독립군의 정통성을 높이 평가한다. 요람은 육사가 위치한 서울 태릉의 지리적 중요성을 거론하는 대목에서 "태릉은 국군의 모체인 제1연대가 창설되어 우리 국군의 발원지로 역사적 전통 계승의 상징적 장소"라며 "김홍일·안춘생 장군 등 광복군 출신 육군사관학교장과 사관생도 특별기 임관제도를 통해 광복군 출신 장교를 대거 양성한 군의 인적 정통성과 정체성의 뿌리를 두고 있는 곳"이라고 설명한다.

국군의 모체가 창설되고 광복군 출신들이 교육을 받은 장소라는 점과 더불어 광복군 출신 사관학교 교장이 근무한 지역이라는 점이 태릉 캠퍼스의 정통성을 높여주고 정체성을 확인시켜 준다는 설명이다.

졸업 3년 만에 교장으로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정문.권우성

1948년 여순항쟁(여순사건) 이후의 군부 숙정 과정에서 친일파가 국군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이로 인한 그 이후의 악조건 속에서도 독립군 출신들은 한국 군대가 옳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사관생도 양성 시스템을 구축한 안춘생은 그런 독립군 중 하나다.

안춘생의 해방 이전 경력을 살펴보면, 그가 육사 교장이 되어 장교 교육의 기틀을 세운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된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5권은 황해도 벽성 출신인 그가 여섯 살 때인 1918년에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 일을 언급한 뒤 "일제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자 산해관을 넘어 남경으로 가서 1936년에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했다고 기술한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의 세계적 위기 속에서 24세 나이로 군관학교에 들어갔던 것이다.

사관학교 시스템 속에서 양성된 안춘생은 중국군 장교로 임관해 항일전쟁에 참전했다. 1937년에는 상하이를 무대로 한 항일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왼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1939년 10월부터는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에서 복무했다. 이때의 계급은 소령이다.

일본은 미국의 핵 공격을 받은 직후에 항복했지만, 이미 그 전에 중국대륙에서 한중연합군에 밀리고 있었다. 일본군 100만 이상이 중국에 발이 묶인 상태에서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심리적으로 쉽게 무너졌다.

안춘생은 세계적 강군인 일본군을 그런 상태로 몰아넣는 데 참여한 항일 장교였다. 거기다가 정규 군사교육까지 받았다. 해방 이후의 한국에서 육사 교장이 되고도 남을 만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해방 뒤 귀국한 안춘생은 1948년 12월에 육사 8기 특별반 제1반에 입학했다. 역대 육사에서 교육 기간이 가장 짧은 기수였던 것이다. 3주 만에 졸업한 그는 3년 뒤 교장이 되어 4년제의 기틀을 세웠다. 과도기의 특수한 산물이기는 하지만, 그는 졸업 3년 만에 그 학교 교장이 되는 진귀한 이력을 세웠다.

그가 육사에서 일을 잘했다는 점은, 과도하다 싶을 만큼 대단했던 육사 11기들의 자부심에서도 확인된다. 일을 제대로 못 했다면, 광복군 출신들을 기피하는 친일파 장성들은 그의 업적을 어떻게든 폄하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육사 11기 이하가 강한 긍지를 드러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주한미군과 친일 군인들이 군을 주도했음에도, 해방 직후에는 독립군 출신들이 국군에 많이 들어갔다. 독립군의 입대를 막을 명분이 미군에게도, 친일파에게도 없었다. 이런 공백을 활용해 국군에 들어간 안춘생은 육군사관학교의 기틀을 세우고 한국군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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