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정문.
권우성
1948년 여순항쟁(여순사건) 이후의 군부 숙정 과정에서 친일파가 국군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이로 인한 그 이후의 악조건 속에서도 독립군 출신들은 한국 군대가 옳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사관생도 양성 시스템을 구축한 안춘생은 그런 독립군 중 하나다.
안춘생의 해방 이전 경력을 살펴보면, 그가 육사 교장이 되어 장교 교육의 기틀을 세운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된다. 국가보훈부가 발간한 <독립유공자공훈록> 제5권은 황해도 벽성 출신인 그가 여섯 살 때인 1918년에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한 일을 언급한 뒤 "일제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자 산해관을 넘어 남경으로 가서 1936년에 중앙군관학교를 졸업"했다고 기술한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의 세계적 위기 속에서 24세 나이로 군관학교에 들어갔던 것이다.
사관학교 시스템 속에서 양성된 안춘생은 중국군 장교로 임관해 항일전쟁에 참전했다. 1937년에는 상하이를 무대로 한 항일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왼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1939년 10월부터는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에서 복무했다. 이때의 계급은 소령이다.
일본은 미국의 핵 공격을 받은 직후에 항복했지만, 이미 그 전에 중국대륙에서 한중연합군에 밀리고 있었다. 일본군 100만 이상이 중국에 발이 묶인 상태에서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했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심리적으로 쉽게 무너졌다.
안춘생은 세계적 강군인 일본군을 그런 상태로 몰아넣는 데 참여한 항일 장교였다. 거기다가 정규 군사교육까지 받았다. 해방 이후의 한국에서 육사 교장이 되고도 남을 만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해방 뒤 귀국한 안춘생은 1948년 12월에 육사 8기 특별반 제1반에 입학했다. 역대 육사에서 교육 기간이 가장 짧은 기수였던 것이다. 3주 만에 졸업한 그는 3년 뒤 교장이 되어 4년제의 기틀을 세웠다. 과도기의 특수한 산물이기는 하지만, 그는 졸업 3년 만에 그 학교 교장이 되는 진귀한 이력을 세웠다.
그가 육사에서 일을 잘했다는 점은, 과도하다 싶을 만큼 대단했던 육사 11기들의 자부심에서도 확인된다. 일을 제대로 못 했다면, 광복군 출신들을 기피하는 친일파 장성들은 그의 업적을 어떻게든 폄하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육사 11기 이하가 강한 긍지를 드러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주한미군과 친일 군인들이 군을 주도했음에도, 해방 직후에는 독립군 출신들이 국군에 많이 들어갔다. 독립군의 입대를 막을 명분이 미군에게도, 친일파에게도 없었다. 이런 공백을 활용해 국군에 들어간 안춘생은 육군사관학교의 기틀을 세우고 한국군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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