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1월 27일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방미 결과 보고 및 귀국 인사차 윤보선 대통령을 예방한 모습.
연합뉴스
윤보선과 박정희의 관계는 후자가 전자를 이기고 극(克)하는 관계로 출발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는 전자가 후자를 '극'하는 관계로 반전됐다. 대통령 사임 뒤 민주화 투사로 변모한 윤보선은 1963년 대선 때 박정희의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경력을 폭로했다. 이는 반공주의자 박정희의 모순과 위선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이 대선에서 박정희는 46.64%, 윤보선은 45.09%를 득표했다. 1967년 대선에서는 박정희가 51.44%, 윤보선이 40.93%였다. 쿠데타를 당한 사람답지 않게 윤보선은 박정희를 꽤나 압박했다.
두 사람의 충돌은 유신체제 선포(1972.10.17.)와 유신헌법 시행(12.27)으로 조성된 새로운 정세 속에서 한층 격화됐다. 박정희가 사실상의 군주가 되자, 윤보선은 유신헌법을 거부하는 운동에 뛰어들었다. 1973년 12월 22일 자 <동아일보>는 윤보선과 김수환 추기경을 포함한 각계 지도자 11인이 시국간담회를 연 일을 보도했다. 이는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의 기폭제였다.
그전까지 두 사람의 대결은 헌법적 토대를 인정하는 전제하에서 전개됐다. 그런데 1972년에 박정희가 깔아놓은 유신헌법이라는 토대는 인류의 상식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윤보선은 이것을 걷어찼다. 대결 양상이 달라진 것이다. 윤보선의 개헌운동이 그것을 반영한다.
윤보선이 대결의 패러다임을 바꾸자, 박정희도 방식을 바꿨다. 박정희는 재야 운동권을 상대하듯이 공안사건을 조작해 혐의를 씌우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1974년에 박정희는 조작 사건인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를 윤보선에게 뒤집어씌웠다. 비상군법회의는 그해 8월 12일 징역 3년을 선고하면서, 전직 대통령 신분을 감안해 집행유예 5년을 덧붙였다.
윤보선은 항소를 제기하고 항소기각에 대한 대법원 상고를 제기하는 등의 법정투쟁을 벌이는 한편, 박정희가 깔아놓은 판을 계속 흔들었다. 명동성당 사건으로도 불리는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이 대표적이다. 3·1절 기념미사 직후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인해 김대중·문익환·함세웅 등이 구속되고 함석헌·이태영·정일형 등과 더불어 윤보선이 불구속 입건됐다.
민주구국선언에서 윤보선 등은 "유신헌법으로 허울만 남은 의회정치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유신헌법이 의회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을 훼손했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자 박정희는 1975년 5월 13일에 발포한 긴급조치 제9호의 칼끝을 윤보선의 목에 겨누었다.
제9호는 "다음 각호의 행위를 금한다"라고 한 뒤 "집회·시위 또는 신문·방송·통신 등 공중전파수단이나 문서·도서·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를 적시했다. 그런 뒤, 상한선이 없는 1년 이상 징역과 10년 이상 자격정지를 예고했다. 미수·예비·음모도 처벌하겠다고 경고했다.
집회·시위 혹은 공중전파수단이나 표현물에 의해 개헌을 주장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런데 예비·음모도 처벌한다고 했다. 개헌에 관한 주장이 여러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이전 단계에서도 얼마든지 처벌할 수 있도록 해놓았던 것이다.
박정희는 이 조치를 윤보선에게 적용했다. 그해 3월 11일 자 신문들에 실린 서울지방검찰청 발표문은 "정부전복 선동사건 관련자 20명을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 위반 혐의로 입건했다"라고 한 뒤 "김대중·문익환·함세웅 등이 주동이 되어 윤보선·정일형·함석헌 등의 동조를 받아 봄철을 기하여 민중선동에 의한 국가변란을 획책"한 사건이라며 이 일을 허위로 소개했다.
이에 따른 재판에서 서울형사지방법원은 1976년 8월 28일 윤보선에게 징역 8년과 자격정지 8년을, 서울고법은 12월 29일 징역 5년과 자격정지 5년을 선고했다. 이듬해 3월 22일, 대법원은 윤보선의 상고를 기각하고 2심 판결을 확정시켰다. 상고 기각 뒤 검찰청은 긴급확대간부회의를 열어 연령이 80세인 점을 감안해 형집행정지 결정을 내렸다.
이후로도 윤보선의 대항은 계속됐다. 박정희 체제를 긴장시키는 김영삼 체제가 출범한 1979년 5월 30일의 신민당 전당대회 때는 김대중·유진오·이철승과 함께 상임고문으로 선출됐다.
결국, 윤보선의 승리

▲2013년 3월 21일 당시 헌법재판소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공포됐던 긴급조치 제1호, 제2호, 제9호에 대해 전원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린 가운데,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유신·긴급조치 피해자 대책위원회 소속 회원들이 헌재 위헌 판결에 환영하는 박수를 치고 있다.
유성호
1961년에 시작된 윤-박 대결은 항상 박정희의 우세 속에 전개됐다. 윤보선은 대선에서 두 차례 패하고 유신체제하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렇게 보면 박정희가 이겼다고 볼 수도 있지만, 윤보선이 합세한 민주화 진영의 공세 끝에 박정희가 몰락했으니 크게 보면 윤보선이 박정희를 '극'한 셈이다.
윤보선의 승리는 역사적 측면과 법적 측면에서도 발견된다. 윤보선이 박정희의 족쇄에 갇히게 만든 사건인 5·16은 그 뒤 한국 사회에서 '혁명'이 아닌 '쿠데타'로 격하됐다. 또 박정희가 윤보선에게 겨눈 긴급조치 제9호에 대한 법적 평가도 뒤집혔다.
윤보선이 죽은 지 23년 뒤인 2013년 3월 21일, 헌법재판소는 "정치적 표현의 자유, 집회·시위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거나 침해한다"는 이유로 긴급조치 제9호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같은 해 4월 1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위헌·무효 판결을 내렸다.
이런 판례들을 기초로 그해 7월 3일, 서울고법은 윤보선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1976년에 검찰이 제기한 공소사실을 범죄사실로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박정희가 윤보선에게 겨눈 긴급조치 제9호가 위헌·무효의 반칙 무기라고 법원이 확인해준 셈이다.
재심 재판에서 검찰은 무죄를 구형했다. 재판부도 이례적인 태도를 보였다. 재심 선고가 나온 당일의 언론보도를 보면, 재판부는 "긴급조치 제9호는 여기 있는 피고인과 가족에게 말씀드리기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라며 대한민국을 대표해 사과했다. 첫 대면 때 박정희가 했던 "대단히 죄송합니다"와는 차원이 다른 사과였다. 재판부는 피고인과 재심청구인이 다 퇴정할 때까지 법정에서 대기했다. 죽은 뒤에 열린 역사적·법적 투쟁에서 윤보선이 판정승을 거둔 셈이다.
5·16 쿠데타 직후에 윤보선은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며 쿠데타를 결과적으로 도와줬다. 이런 과오를 범한 그는 2년 뒤의 대선을 계기로 박정희 반대운동에 나서 적지 않은 타격을 입혔다. 뒤늦게나마 세상의 편에 섰기에, 그는 민주화 진영 편에 서서 박정희의 몰락을 지켜볼 수 있었고, 사후에나마 재심 재판에서 박정희를 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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