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카와 형제 기획전주일 한국문화원은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지난해 12월 4일부터 지난달 20일까지 ‘아사카와 형제가 남긴 길-조선의 자연과 문화, 그리고 사람을 사랑한 노리타카와 다쿠미’란 제목의 기획전을 열어 이들이 남긴 일기, 서간, 도편 등을 선보였다. 포스터의 사진은 1918년에 찍은 것으로 왼쪽이 노리타카 부부, 오른쪽이 다쿠미 부부, 가운데는 모친 지노 게이.
주일 한국문화원
그의 스승 격인 형 노리타카는 조선 공예의 아름다움을 맨 먼저 발견한 일본인이었다. 그가 서울 근무를 자원한 것도 조선 도자기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그는 <부산 가마와 다이슈(對州) 가마>, <조선의 도자기>, <도기전집 17권 조선 청화·철사·백자> 등의 저서와 논문을 펴내고 전국의 도요지 678곳을 찾아내 '조선 도자기의 신(神)'이란 별명을 얻었다.
조각과 회화 작가로 입문해 조선미술전 등에서 여러 차례 입상하고 시도 수백 편 남겼다.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청화백자추초문각호(靑華白磁秋草紋角壺)를 선물해 그가 조선 문화와 예술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게 만든 것도 노리타카였다.
다쿠미도 애호가의 경지를 넘어섰다. 저서 <조선의 소반>으로 그때까지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던 작은 나무밥상을 공예품 지위에 올려놓았다. 전국의 가마터를 뒤져 기록한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는 야나기가 "묻혀버릴 뻔한 진리를 사라지지 않는 문자로 담아냈다"라고 찬탄한 보물 같은 저술이다.
그는 야나기와 힘을 합쳐 전시품을 수집하고 후원자를 모집해 1924년 4월 9일 경복궁 집경당에 아시아 최초의 공예미술관인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했다. 조선총독부는 '민족'이란 글자를 뺄 것을 요구했으나 다쿠미와 야나기는 총독부 보조금을 포기하면서까지 완강히 거부했다.
노리타카는 1945년 일본 패망 후에도 미국 군정청 특별허가로 한국에 남아 도요지 조사를 계속하다가 공예품 3천여 점과 도편(陶片) 30상자를 조선민족미술관 후신인 국립민족박물관에 기증하고 1946년 11월 일본으로 돌아가 1964년 세상을 떠났다. 노리타카 기증품은 1950년 국립민족박물관을 흡수한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권력자와 수집가들이 조선의 도자기나 그림은 물론 불상, 석탑, 무덤 부장품까지 가리지 않고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생각하면 노리타카 기증품이 더욱 소중하고 고맙게 여겨진다. 그는 자칫 사라지거나 묻힐 뻔한 숱한 문화유산을 발굴하고 수집해 한국인에게 선물로 남겼다.
이들의 조선 예술 사랑은 말 그대로 난형난제(難兄難弟)였다. 식견은 형이 윗길이었지만 조선인과 하나가 되려는 마음은 동생이 더 깊었다. 다쿠미는 한국어로 말하고 한복 바지저고리 차림에 망건을 쓰고 다녔다. 1922년 1월 13일 일기에는 "한복을 입고 본부로 가니 현관에서 순사가 뭐라고 했다.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라고 썼다. 그래도 그는 한복 입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스스로 한국 음식을 지어 먹었고 술도 막걸리를 즐겨 마셨다. 거처는 온돌방이었으며 방안에 조선 장롱을 두고 살았다. 넉넉지 않은 형편인데도 남자 거지를 만나면 무언가 일거리를 찾아주려 했고, 여자 걸인에게는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꺼내주었다. 고학생들에게 정기적으로 장학금도 주었다.
야나기가 "다쿠미보다 조선어를 잘하고 더 오래 조선에 산 일본인이나 조선의 역사와 조선의 사정에 정통한 일본인은 있겠지만, 그처럼 조선인의 마음으로 살다 간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평한 것도 과장이 아니었다.
운집한 조문객들 앞다퉈 상여 메겠다고 나서

▲아사카와 다쿠미 기념비망우역사문화공원 아사카와 다쿠미 묘역에 1984년 임업시험장 직원들이 세운 기념비.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희용
그는 1931년 2월과 3월에 걸쳐 묘목 기르기에 관한 강연을 하러 전국을 다니며 식목일(당시에는 4월 3일) 행사까지 준비하다가 과로에 급성폐렴이 겹쳐 4월 2일 순직했다. "나는 죽어도 조선에 있을 것이니 조선식으로 장례를 지내 달라"라는 유언에 따라 한복을 입은 채 이문리(지금의 서울시 동대문구 이문동)에 묻혔다.
4월 4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장례식이 치러진 임업시험장(현 동대문구 청량리동 홍릉시험림) 정문 앞에는 조문객이 구름처럼 모였다. 앞다퉈 상여를 메겠다고 나섰고, 마을 사람들이 운구 행렬을 멈추고 노제를 지내고 싶다고 졸랐다. 당시 일본인에 대한 조선인들의 감정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이문리 묘소는 1942년 7월 새로 길이 나는 바람에 망우리 공동묘지로 옮겨졌다. 해방 후 아내와 딸이 일본으로 돌아가자 돌보는 이가 없어 덤불에 덮이고 묘비도 넘어져 뒹굴다가 1964년 방한한 화가 가토 쇼린(加藤松林)이 임업시험장(현 국립산림과학원) 직원들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찾아 새로 꾸몄다.
임업시험장 직원들은 1984년 8월 기념비를 세워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라고 새겼다. 지금도 국립산림과학원 퇴직자 모임인 홍림회가 묘역을 돌보고 있다.
일본에서는 다쿠미 일대기를 그린 책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1982년)과 전기소설 <백자 같은 사람>(1994년)이 출간됐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백자의 사람, 조선의 흙이 되다>도 한일 양국에서 개봉했다. 고향인 호쿠토에는 형제 자료관이 들어섰고, 조선일보는 2015년 광복 70주년을 맞아 다쿠미를 '한국을 빛낸 세계인 70인'에 선정했다.
주일 한국문화원은 한일 국교 정상화 60주년을 맞아 지난해 12월 4일부터 지난달 20일까지 '아사카와 형제가 남긴 길-조선의 자연과 문화, 그리고 사람을 사랑한 노리타카와 다쿠미'란 제목으로 이들이 남긴 일기, 서간, 도편 등을 전시했다. 중랑문화재단과 한국연극인복지재단도 지난해 12월 10일 중랑구민회관에서 입체낭독극 '아사카와 다쿠미 심는 날'을 무대에 올렸다.
이수현 추모 물결이 불 지핀 아사카와 현창 사업
▲이수현 씨 25주기 추도식의인 이수현 씨 25주기를 맞아 1월 26일 이혁(앞줄 왼쪽에서 첫번째) 주일 한국대사와 이씨의 모친 신윤찬 씨(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등이 사고 현장인 도쿄 JR 신오쿠보역 플랫폼을 찾았다.
주일 한국대사관
다쿠미가 눈을 감고 70년이 지난 2001년 1월 26일 일본 도쿄의 JR 신오쿠보역에서 선로에 추락한 취객을 구하려다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 씨가 숨졌다. 일본 전역에 추모 물결이 일자 신오쿠보역 플랫폼에 추모 동판이 부착되고 그의 이름을 딴 LSH장학회도 설립됐다. 해마다 추모식과 추모문화제가 열리고 있으며 지난달 26일 25주기에는 이혁 주일대사, 김현숙 도쿄총영사, 어머니 신윤찬 씨 등이 참석했다.
이수현의인문화재단 설립위원회 노치환 사무총장은 일본의 이수현씨 추모 열기를 한일 간 화해와 친선의 불씨로 삼고자 마음먹었다. 이씨처럼 한국인을 위해 몸을 바친 일본인은 누가 있을까 찾던 중 아사카와 형제가 적격이라고 보고 아사카와형제현창회 발족에 앞장섰다.
노 씨가 사무국장을 맡은 현창회는 2015년부터 해마다 다쿠미 기일에 아사카와 형제 추모식을 여는 것을 비롯해 각종 기념사업을 펼치고 있다. 올해 95주기 추모식도 오는 4월 2일 오전 11시 망우역사문화공원 다쿠미 묘역에서 열 예정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 찾은 한일 청소년들2025년 8월 3일 충청북도와 일본 야마나시현 청소년 국제교류사업 일환으로 망우역사문화공원 순례 행사가 열렸다. 한일 청소년 70여 명이 아사카와 다쿠미 묘역 등을 참배한 뒤 중랑망우공간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중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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