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본 시장 광장 바닥에 설치된 프리드리히 빌헬름 푀르스터의 분서 기념비. 1933년 5월 10일 나치 정권이 '독일 정신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책들이 실제로 불태워졌던 장소 주변에 책등 모양의 금속판 조형물을 심어 그날을 되새기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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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어른이 되어 철학자, 교육학자로서 프로이센의 군국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며 기독교적 윤리에 기초한 평화주의를 설파했다. 아버지를 닮아 군국주의를 혐오하여 고등학교 때에는 '독일이 모든 세상의 위에 서야 한다'라는 가사 때문에 애국가 봉창을 거부하여 교사들을 애먹이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황제를 비판하다가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뮌헨대학 교수였던 그는 반전을 외치다가 학생들에게 린치를 당했다. 당시 독일 젊은이들은 전쟁의 당위성을 믿었다. 그 소동으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대학에서 두 학기 정직을 당했다. 쉬는 동안 그는 역사 연구에 깊이 파고들어 1차 세계대전 발발 책임이 전적으로 독일에 있다는 논지의 글을 발표해 더 미움을 샀다.
히틀러가 나타나자 소리높여 경고하였으나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저서가 불태워졌고 그는 나치 살생부에 올라 결국 망명해야 했다. 최종 망명지 미국에서도 그는 경고를 멈추지 않았고 거의 백 세가 될 때까지 자신의 신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고집불통이었다.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애증의 고국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경유지 스위스에 도착한 뒤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거기서 눈을 감았다. 1월 8일이었다.
그의 부친 빌헬름 푀르스터가 우주의 하모니를 설명해 주었던 그해 독일은 황제국이 된 지 십여 년이 되었고 비스마르크의 손아귀에서 국수주의, 군국주의로 변해가고 있었다. 아버지 빌헬름은 국수주의, 군국주의를 누구보다 혐오했다. 후일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당시 독일의 군국주의를 옹호하던 지식인 선언에 반대해 평화를 주장하여 베를린의 많은 지식인들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는 조용히 은퇴하여 둘째 아들과 함께 포츠담에서 정원을 짓고 살며 말년을 보냈다. 그사이 독일은 1차 대전에서 패망하여 도주한 황제를 폐위시키고 바이마르 공화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군부와 손을 잡고 출발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곧 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빌헬름 푀르스터는 그 모든 변화에 관해 함구한 채 매일 베토벤을 연주하다가 - 그는 한때 피아니스트를 꿈꾸었다 - 공화국 3년에 87세로 눈을 감았다. 1월 18일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정교한 이론가이자 독창적인 경제학자

▲2019년 1월 13일(현지시간) 베를린의 한 묘지에 있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묘비 위에 카네이션이 놓여 있다.
AP 연합뉴스
해마다 1월 15일이 되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가 묻혀 있는 베를린 북구의 공동묘지로 행진한다. 그리고 묘비명 앞에 수십 송이의 붉은 카네이션이 놓인다. 행진을 주도하는 것은 좌파당이지만 수많은 베를린 시민이 행렬에 합류한다.
붉은 카네이션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상징이다. 원래는 19세기부터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꽃이었다고 한다. 당시 붉은 깃발이 금지되었으므로 사회주의자들은 표식으로 붉은 카네이션을 옷에 꽂고 다녔다. 아마도 붉은 꽃 중에 카네이션이 가장 저렴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상징이라는 것이 늘 그러하듯 조금씩 변모하기 마련이다. 5월 1일 노동자 운동의 날의 상징이었다고도 하는데 막상 5월 1일에는 붉은 카네이션을 보지 못한다. 지금은 오로지 로자 룩셈부르크의 꽃으로 남은 듯하다. 그가 1918년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동지들이 붉은 카네이션 꽃다발로 환영했다는 기록이 있다. 프랑스 혁명 때 사형수에게 던져 주던 꽃도 붉은 카네이션이었다고 하니 혁명과 죽음의 꽃으로 그 의미가 정착되었나 보다.
폴란드 출신 유대계 경제학자며 혁명가였던 로자 룩셈부르크는 베를린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다 극우 세력에 피살되었다. 원래 사회민주당 소속이었으나 당의 주 세력이 참전을 옹호하고 후일 군부와 결탁하는 것을 보고 깊은 환멸을 느껴 당을 떠났다.
그는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평화주의가 결합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소수 독재를 극히 혐오한 그는 혁명적 사회주의자이기 이전에 정교한 이론가이자 독창적인 경제학자였다. 마르크스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자본론의 맹점을 간파했으며 자본주의의 본질을 끊임없이 탐구하여 주옥같은 저서를 여러 권 남겼다. 자신은 무력 혁명에 반대했으나 동지들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 끝까지 함께 행진하다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제바스티안 하프너] 궤도 이탈을 기록한 '차가운 관찰자'
▲베를린 에렌베르크 거리 33번지에 설치된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기념판. 독일의 저명한 언론인이자 작가로 나치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그의 기념판에는 "그의 양심이 곧 척도였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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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제바스티안 하프너(1907~1999)는 일곱 살이었다. 추상적인 전쟁 소식보다는 여름 방학을 보내던 신나는 바닷가를 떠나 베를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더 비극으로 여겼던 초등학생이었다.
그는 전쟁이 지속되는 4년 동안 단 한 발의 총성도 듣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전쟁은 서부전선, 프랑스 국경지대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후방에선 물자 부족과 굶주림으로 전쟁을 막연히 느낄 뿐이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비로소 베를린에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혁명의 총성이었다.
사춘기에 경제공황을 겪고, 이어서 나치의 광기에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독일의 역사를 비판하는 언론인이 되어 있었다. 약혼녀가 유대인이었던 까닭에 그 역시 망명의 길을 가야 했다. 전후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와 예리한 역사 비평서들을 썼다. 그는 독일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기득권의 배신" 위에 세워진 공화국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여 빈축을 샀다. 그러나 최근 사학자들에 의해 그의 분석이 정확했다고 재평가되고 있다. 그는 1999년 91세 되던 해에 사망했다. 1월 2일이었다.
2026년 1월도 다 지나가고 2월이 시작되었는데 오래전 1월에 죽은 이들을 새삼 기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마도 지금 몹시 흔들리고 있는 세상의 궤적이 안타까워 그들의 혼이라도 부르고 싶은지 모르겠다. 은하수의 그 수많은 별이 서로 부딪치지 않는 이치를 사람들 사이에도 불러낼 수 있다면 이라는 안타까운 염원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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