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구 서울경찰청 입구 모습 (자료사진)
연합뉴스
빠르면 이달부터 경찰서 정보과가 전국 곳곳에 부활한다. 2024년 2월에 윤석열 정부가 일선 경찰서 정보과를 폐지하고 시·도 경찰청 광역정보팀을 신설한 지 2년 만이다.
정보과는 일반적 의미의 치안 기능을 수행하는 데가 아니다. 사회동향 관찰에 보다 더 주력하는 곳이다. 그래서 일반 경찰 조직보다는 정보기관에 더 가깝다. 정보과 운용에 대해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일제 고등경찰의 이미지는 지금도 한국인들의 인식 속에 남아 있다. 그 고등경찰이 해방 뒤에 정보과로 개명된 탓에, 우리 사회는 이 둘을 얼른 연결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이 둘은 떼어놓고 보기 힘든 불가분적 존재다.
윤동주를 체포한 고등경찰
<한국경찰연구> 2004년 제3권 제2호에 수록된 노호래 세명대 경찰행정학과 교수의 논문 '정보경찰의 역사적 변천 과정에 관한 비판적 검토'는 "한국 정보경찰의 역사를 검토해보려면, 일본 경찰의 역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라며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일제가 식민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일본 본국의 제도를 조선에 도입"했다고 기술한다.
그런 뒤 "한국의 정보경찰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본 경찰의 역사적 변천을 살펴보는 것은 거의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설명에서도 나타나듯이 일제 고등경찰과 한국 정보경찰은 상호 연관성을 띤다.
고문 경찰로 유명했던 친일파 하판락(1912~2003)도 고등경찰이었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18권 하판락 편에 따르면, 1934년에 순사채용시험을 통과한 그는 1941년부터 경상남도경찰부 고등경찰과에 근무했다.
그가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친일파로 규정된 것은 단순히 일제의 녹봉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고등경찰이 되어 치안유지법(국가보안법)을 앞세우며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고문했기 때문이다. 공장·시장·부두 등지에서 항일전단을 배포한 일로 인해 18세 때인 1943년에 검거된 독립운동가 이광우도 그에게 붙들려 고초를 겪었다.
이광우의 자필 진술을 담은 국가보훈부의 <이광우 공적서>는 하판락이 몸담았던 고등경찰 조직이 어떤 곳인지를 보여준다. 위 진상규명보고서에 인용된 <이광우 공적서>에 이런 대목이 있다.
"경남경찰부 고등과 유치장은 일반 잡범들과 경미한 사상범은 취조하지 않았으며, 사회주의자 및 항일활동의 죄상이 크다고 판단되는 큰 사건만을 취급하는 관계로 경남경찰부 유치장에서의 10개월간 구금기간은 인간으로서는 최소한의 인권도 철저히 말살당하였으며, 지독하고 악랄한 고문을 조선인들로 구성된 친일악질 경찰들로부터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갖가지 형태로 수도 없이 기절하면서 견디어야 했습니다."
애초에 일본이 고등경찰제를 운용한 것은 자국 국민들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위의 노호래 논문은 "과격한 사회운동을 단속하기 위하여 1911년 8월 특별고등과를 설치하고 과(課) 내에 특별고등계와 검열계를 두었다"라면서 1925년의 치안유지법 제정을 계기로 1928년에는 약 1천 명으로 구성된 고등경찰들의 일본 전역 네트워크가 구성됐다고 알려준다.
특고경찰로도 불리는 이 고등경찰들이 공산주의자만 단속한 것은 아니다. 위 논문은 "공산당에 대한 단속으로부터 모든 사회운동과 종교활동 그리고 불경한 언동을 하는 일반 시민의 단속까지도 담당하였다"고 말한다.
이런 고등경찰이 일본에서는 반정부활동 감시에 투입되고, 식민지 한국에서는 반일활동 감시에 동원됐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기도하며 문학활동과 항일활동을 펼쳤던 시인 윤동주를 붙들어간 교토 시모가모경찰서 요원들도 고등경찰이었다. 역사학자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은 "윤동주를 체포하고 취조한 것은 경도 하압(下鴨)경찰서의 특고 형사들이었다"고 말한다.
독재의 도구가 되었던 경찰의 역사 되새겨야

▲경찰 기관문양(마크)
김형호
1945년에 일본의 항복을 받은 미국은 고등경찰의 기능에 주목했다. 미국은 이 기구가 일본군국주의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판단했다.
노호래 논문은 "연합군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일본점령정책은 일본 군부와 내무성을 해체하여 민주사회를 건설하려는 것이었고, 특히 '군국일본'이라는 괴물의 근간은 내무대신의 한마디 명령이 즉각 전국에 하달되어 일사분란하게 수행되는 경찰체제에 있다고 보고 내무성을 해체하는 동시에 경찰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라고 설명한다. 그런 뒤 1945년 10월 4일 맥아더가 치안유지법의 폐지 혹은 적용 중지와 더불어 "특고경찰직원의 파면"을 명령했다고 기술한다.
일본 미군정은 군대뿐 아니라 경찰도 군국주의의 기둥이라고 판단하고, 일본 경찰 내의 고등경찰 요원들을 파면했다. 반면, 한국 미군정은 달랐다. 1953년 12월 9일 국립경찰전문학교장에 임명된 현규병이 1955년에 집필한 <한국경찰제도사>는 미군정이 시작된 다음 달인 1945년 10월의 일을 설명한다.
"단기 4278년 10월 21일 군정청에 경무국을 창설하여 관방·총무과·공안과·수사과·통신과를 예하에 설치하고, 지방에서는 도지사 예하에 경찰부를 두고 그 소속 기구로서 경무과·보안과·형사과·경제과·정보과·소방과(경기 限)·위생과의 6과 내지 7과를 설치함으로써 국립경찰의 발족을 보게 되었다."
미군정은 경기도경찰부에 한해 소방과를 하나 더 두는 7과 제도를 시행하고, 나머지 도의 경찰부에는 정보과를 포함한 6과를 설치했다. 이는 일제 고등과를 정보과로 개명시켜 계속 활동하게 만드는 조치였다.
그때 생긴 정보과 명칭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도 계속 사용됐다. 노호래 논문이 "한국 정보경찰의 역사를 검토해보려면, 일본 경찰의 역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한 것은 일제 고등경찰이 미군정의 조치에 의해 대한민국 정부에 계승됐기 때문이다.
패망 이후의 일본도 정보경찰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하지만 미군정에 의해 철퇴를 맞았기 때문에 군국주의 시절보다는 약한 형태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 사정은 다르다. 미군정을 뒤이은 이승만 집권기에는 경찰이 검찰은 물론이고 군대의 파워까지 능가했다. 제1공화국 경찰이 막강했던 배경에는, 미군정기를 거쳐 대한민국 정부에 계승된 일제 고등경찰의 유산도 크게 작용했다. 이런 유산이 한국 현대사의 인권과 민주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경찰서 정보과에 대한 냉정한 비판과 견제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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