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2.03 20:25최종 업데이트 26.02.03 20:25
  • 본문듣기
오세훈 서울시장이 한강을 막개발 중이다. 이대로 둬도 되는 것일까? 서울시의 랜드마크이자, 서울 면적의 6.7%에 해당하는 중요한 공유지가 서울시장의 전유물로 전락하고 있다. 현재의 한강의 모습을 알리고, '우리가 꿈꾸는 한강'을 함께 모색하고자 한다.[기자말]
앞서 1950년 서울 항공사진 속 한강의 모습과 역사를 소개했었다. 이를 통해 지금 우리가 보는 한강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을 버리고 색다른 시선으로 한강을 바라보고자 했다. 이번 기고도 그 연장선이다.

한강의 발원지는 태백산 검룡소다(정확히는 태백시 창죽동 금대봉 계곡). 그러면 한강의 끝은 어딜까? 한 번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누구는 행주산성을 또 누구는 신곡수중보가 있는 김포대교를 생각한다. 또 누군가는 한강이 임진강과 만나는 오두산 전망대나 북한 땅이 지척인 애기봉을 떠올린다.

모두 틀렸다. 한강의 종점은 김포의 끝자락인 유도(留島)다. 정확히는 "경기도 김포 월곶면 보구곶리 유도(31m) 산꼭대기(山頂, 산정)부터 남북으로 그은 직선"이다(<한국하천일람>, 1982년, 건설부). 궁금하면 당장 네이버 지도를 한번 검색해 보자. 서울에서 멀지는 않지만, 한국전쟁과 남북 분단으로 지금은 갈 수 없는 섬이다. 오직 새들만이 자유롭게 머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다룰 항공사진 속 한강 이야기도 1950년이다. 그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유도가 왜 새들의 터전이 됐는지 조금은 이해가 갈 것이다.

지난 글에서 우리는 한강 광나루부터 행주나루(행호)까지 한강의 본래 모습을 보았다. 이번에는 행주나루를 거슬러 한강의 할아버지강, 조강까지 가보자. 먼저 한 가지 분명히 해둘 점이 있다. 우리가 꿈꾸는 한강은 서울의 서울에 의한 서울만을 위한 한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서울 일극 중심으로 한강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강 전체를 보는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1950년 한강 항공사진이 보여주려는 궁극적 메시지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강을 서울 중심으로 이해하면 안 되는 이유

1950년 굴포천과 백마도1950년 한강 항공사진. 현 신곡수중보가 있는 김포대교 일대. 지명은 필자가 적어넣음.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위는 1950년 7월 24일 미 공군이 촬영한 항공사진이다. 6·25전쟁이 발발한 지 정확히 한 달이 되던 때다. 북한군이 대전을 점령하고 호남까지 진격할 그 시기 미군이 적정을 파악하고자 목숨 걸고 찍은 사진으로 최초 공개하는 것이다. 우선 무엇이 눈에 띄는가? 사진 왼쪽 긴 마름모꼴의 김포공항과 그 옆으로 드넓게 펼쳐진 김포평야가 펼쳐진다.

평야 한가운데로는 구불구불한 굴포천이 한강으로 내딛고, 굴포천 하구에는 작은 섬인 백마도를 볼 수 있다. 굴포(堀浦)는 우리말로 '판 개'로 곧 흙을 파낸 개울이나 하천이라는 뜻이다. 고려 때부터 한강에서 인천까지 세곡과 물자를 수월히 운반하려고 물길을 내고자 여러 차례 시도했다. 그러나 결국 조선 중종 때 부평 만월산 원통현(圓通峴)에서 막히고 만다. 뚫기 힘든 큰 암반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답답하고 원통했을까?

오죽했으면 불교적 이름인 원통(圓通: 부처의 자비가 두루 원만히 통함)이 원망할 '원(怨)' 자로 바뀌어 '원통이 고개(怨通峴)'라는 지명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 굴포천을 에워싸며 양옆으로 흐르는 직선형의 인공하천은 각각 서부 간선수로와 동부 간선수로다. 지금도 있는데 구불구불한 굴포천과 잘 대비된다.

굴포천이 한강과 맞닿은 곳은 백마도(白馬島)다. 이 섬도 매우 생소하다. 아니 한강에 이런 이름을 가진 섬도 있었던가? 오늘날 신곡수중보와 김포대교가 이곳을 지난다. 예전 일산 자유로 공사 때 섬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지만 운 좋게 살아 남았다. 지금은 평지 섬이지만 한때 섬 봉우리가 해발 20m에 달했다.

백마도는 옛 지도와 문헌에 '박말도(朴末島)'라고 나오는데, 조선 시대 말을 관리하던 사복시에서 말을 길렀던 곳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말 목장은 한양 뚝섬 살곶이에 있지 않았던가? 그렇지 않다. 뚝섬 살곶이벌뿐만 아니라 한강변 김포에도 있었다. 서두에서 말했지만 자꾸 한강을 서울 중심으로만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습지가 아니라 섬이 있었다

1847년 김포 사복시 박말도 측량도면.동쪽의 사복시원평(司僕寺元坪)은 원래의 박말도이며, 서쪽 이생처(泥生處)가 확장된 모래섬이다. 이생처 옆에 홍도평(紅島坪)도 보인다.서울대 규장각

서울대 규장각에는 박말도에 관한 흥미로운 문건이 하나 남아있다. 그것은 1847년 <김포사복시박말도초평이생재어고난태면신동초평처척량도형입안책(金浦司僕寺朴末島草坪泥生在於高蘭台面薪洞越坪處尺量圖形立案冊)>이다. 여기에는 박말도에 토사가 쌓여 섬이 계속 커졌다는 사실과 함께 넓어진 섬의 크기를 측정한 도면이 함께 딸려 있다. 측량 도면을 보면 박말도(사복시원평) 옆으로 확장된 길이 1260척(약 378m), 폭 690척(약 207m) 크기의 모래섬이 있었다.

이생처(泥生處)로 표시된 곳인데 홍수로 말미암아 모래 진흙이 생성된 땅이란 뜻이다. 1872년 김포군현지도에는 이평(二坪)으로 표기되어 있다. 놀랍게도 1950년 항공사진은 이 섬들이 과거의 기록 속에만 머문 게 아니라 역사적 실체였음을 생생히 증언한다. 한강의 역사와 우리의 기억 속에서 백마도는 잊힌 지 오래지만, 분명 말이 뛰어놀던 섬이었다. 박말도가 백마도로 그 이름이 바뀐 이유도 흰 모래섬과 흰말(白馬)이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1950년 한강 항공사진.현 김포시와 고양 장항습지 일대. 지명은 필자가 적어넣음.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백마도를 지나면 고구마 모양의 신평리 섬이 보인다. 이곳은 오늘날 고양시 덕양구 신평동 일대다. 지난 2021년 생태계의 보고로 인정받아 람사르 습지로 등록된 장항습지가 바로 이곳이다. 그러나 1950년 당시에는 항공사진에서 보듯 습지가 아니라 큰 섬이었다. 언뜻 보면 난지도 크기에 맞먹는 매우 큰 규모였다.

그런데 이 신평리 섬의 역사를 알고 보면 새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최근 <한강, 1968>을 쓴 김원 선생이 신평리 섬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밝혀냈다. 그의 연구를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신평리 섬(길이 4.3km 폭 800미터 약 74만평)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섬 주변에 인공 제방이 축조되면서 큰 지형 변화가 발생한다. 이에 자연이 오랜 시간 빚어낸 신평리 섬은 점점 사라지고 만다. 대신 1960년대 섬 아래에 비슷한 크기의 모랫등(하중도)이 만들어졌다. 인간이 섬을 없애자 자연이 스스로 대응한 것이다. 마치 근래의 밤섬처럼 말이다.

그런데 1980~90년대 대홍수와 신도시 개발에 따른 무분별한 준설로 새로 생긴 모랫등마저 깡그리 사라졌다. 그러자 자연은 이번에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인간이 없앤 모랫등을 대신해 이전에 없던 더 큰 습지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장항습지다(길이 7.6km 폭 600m 약 180만평). 역설적이게도 장항습지의 기원은 인간의 준설 행위로 인한 부작용의 결과였다.

김원 선생은 오늘날 장항습지가 비록 순기능을 하고는 있지만, 인위적인 변형에 따른 자연의 결과물로 장항습지에 대해서는 보다 심층적인 분석과 판단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대로 된 판단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 즉 원래 모습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과거의 신평리 섬과 오늘의 장항습지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유기적 공존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강에도 독도가 있었다

1872년 김포군현지도한강 섬 모습. 지명은 필자가 적어넣음.서울대 규장각

신평리 섬 위로는 대원군 시기 제작된 김포군현지도(1872) 속 초평(草坪)을 만날 수 있다. 초평은 이름 그대로 풀이 무성한 풀밭섬이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는 조도(助島)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은 조선 시대 토목과 영선을 담당하던 선공감에서 갈대를 채취하던 곳이다. 1950년 항공사진 속 섬의 크기로 보건대, 초평은 분명 선공감에 큰 도움(助)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초평 앞에는 김포시청으로 들어가는 길목인 홍도(鴻島, 홍도평)가 있다. 홍도는 큰기러기(鴻)의 섬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홍도평야에는 해마다 큰기러기와 재두루미들이 찾아와 장관을 이룬다. 기러기가 섬에 내려앉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옛 선인들은 김포팔경 중 하나로 손꼽았을 정도다(鴻島落雁, 홍도낙안).

1950년 항공사진을 잘 보면, 홍도는 계양산에서 발원한 물길이 한강으로 흐르는 계양천과 장릉산(옛 북성산성) 앞에 펼쳐진 충적평야에 형성된 섬이었다. 여의도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홍도는 일제강점기 간척사업으로 대규모 농경지로 바뀌었고, 현재는 급격한 도시 개발로 점점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안타깝지만 홍도의 진객들을 볼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한강에는 독도(獨島, 孤島)도 있었다. 오늘날 일산대교 바로 옆이다. 독도 하면 우리는 맨 먼저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리(87km)"로 시작하는 독도 노래를 떠올린다. 그렇지만 동해 바다에만 독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앞서 김포군현 그림지도(1872)에도, 조선 중기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과 김정호의 동여도에도 분명히 독도가 나온다. 독도에 핀 갈대꽃은 너무나 아름다워 김포팔경으로도 꼽혔다(獨島蘆花, 독도노화).

예전에는 감암포(현 김포시 운양동의 포구)에서 이산포(현 일산대교 북단)로 가는 나룻배의 기착지였고 수십 호의 농가도 있었다. 족보가 분명한 섬이었다. 1950년 한강 항공사진에서도 독도를 볼 수 있다. 김포시는 근래 잃어버린 독도의 이름을 되찾는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결국 2024년 5월 독도라는 공식 지명을 되찾았고 '김포시 걸포동 423-19'라는 행정 지번까지 얻었다.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잃어버린 독도의 땅이름은 그렇게 열심히 찾았건만, 정작 눈앞 철새들의 낙원 홍도의 아름다움과 자연은 왜 보지 못할까?

한강의 끝, 유도

1950년 전류리, 공릉천, 조강 유도1950년 한강 항공사진. 한강의 할아버지강 조강 일대 모습이다. 지명은 필자가 적어넣음.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

계속해서 한강의 물길은 독도를 지나 전류리 포구로 이어진다. 이 포구 앞에서 한강 물줄기는 반원형으로 휘감아 솟구치며 한강의 할아버지강 조강으로 흘러간다. 전류리는 이름 그대로 '물이 뒤집혀 흐르는' 곳이다. 하루 두 번 밀물과 썰물이 들고나면서 바닷물과 민물이 섞이고 충돌한다. 이런 지역을 갯물 수역(기수역)이라고 부르는데 그야말로 생태계의 보고이자 황금어장이었다. 전류리 포구의 참게는 임금님 수라상에도 올라갈 만큼 유명했다.

한강 하구에는 전류리 포구 외에도 걸포, 감암포, 운양포, 양릉포, 소이포, 가석포, 후평포, 마조포, 마근포, 금포, 조강포, 강녕포 등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힌 수많은 포구들이 있었다. 한강 포구는 삶의 이야기를 간직한 한강 문화의 산실이었다. 지면의 제한으로 한강 포구의 무수한 이야기들을 다루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1950년 한강 항공사진 속에는 포구의 원형과 옛이야기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어 관심을 갖고 볼 일이다. 1950년 한국전쟁을 겪으며 전류리 포구는 안타깝게도 한강 하구의 유일한 포구로 전락하고 그만 한강의 최북단 어장이 되고 말았다.

한강 물줄기가 전류리 포구를 지나 조강 앞에 다다르면 구불구불한 하천이 하나 눈에 띈다. 이 하천은 공릉천(恭陵川)이다. 공릉천은 양주시 사패산에서 발원해 고양과 파주를 경유해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긴 물줄기다. 조선 제8대 예종의 왕비 장순황후 한씨(1445~1461, 한명회의 셋째 딸) 무덤인 공릉에서 유래했다.

항공사진 속 공릉천은 마치 이무기가 한강의 용이 되려고 파주의 산줄기 사이를 헤집고 한강 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이다. 공릉천이 감싸는 파주(옛 지명은 교하)는 17세기 초 광해군 때 교하천도론의 주무대였다. 또한 20세기 말 풍수학자 최창조 교수가 통일 수도 후보지로 점찍은 곳이기도 했다. 결국 파주는 '용이 못된 이무기'로 그치고 말았다. 필자가 공릉천을 이무기로 본 이유이다.

공릉천 오른쪽으로는 자라 머리를 닮은 오두산이 자라 머리처럼 툭 튀어나왔다. 오두산 또한 가볍게 볼 수 없는 역사적 요충지임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 오두산 옆 큰 물줄기는 강원도 두류산에서 254㎞를 흘러 흘러 내려온 임진강의 하구다. 이곳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난다. 두 강이 만난다고 해 '교하(交河)'라고 했고 '두물머리'라고도 불렀다. 조강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한강의 또 다른 이름 교하는 이제 할아버지 강 조강의 넓은 품으로 흘러 들어간다.

조강에 떠 있는 유도는 한강의 마침표다. 상상해 보라! 태백산 검룡소에 떨어진 물방울이 494km의 길고 긴 여정을 거쳐 바로 여기에 다다른다. 유도는 한강(조강)의 여의주와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유도에서 북한은 바로 손 내밀면 닿을 거리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유도는 삶의 터전이자 아름다운 평화의 섬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이 모든 것을 뒤엎었다. 남과 북을 갈랐고, 한강 물줄기마저 갈랐다. 그뿐이랴! 한강의 할아버지강 조강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말끔히 지워버렸다. 조강은 망각되고 서울의 한강이 한강의 전부인 양 우리의 인식 체계 속에 자리잡게 만들었다.

이제 결론이다. 우리가 꿈꾸는 한강은 서울의 서울에 의한 서울만을 위한 한강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강의 본질이 흐름과 연결이듯이 한강과 조강을 잇고 다시 임진강과 예성강을 이어야 한다. 어려운 일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꿈꾸어야 할 진정한 한강이 아닐까? 독자 여러분들의 생각도 궁금하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김천수 서울용산학연구센터장(yongsanstudies@naver.com)입니다.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