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 일대의 모습. 현 삼의사 묘역은 원래 정조 이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묘였다. 일제의 강제 이장 후 백범이 이를 삼의사 묘역으로 조성했다.
김종훈
독립운동가들이 묻혀 있는 효창공원을 국립공원으로 전환하는 사업이 추진된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달 20일 국무회의 말미에 "효창공원을 국립공원화하는 방안을 연구해달라"라며 "많은 국민이 쉽게 접근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방문할 수 있도록 정비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문했다.
유네스코는 작년 10월 31일(현지 시각)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개최된 제43차 총회 때 백범 김구 탄생 150주년인 2026년을 '유네스코 기념해'로 지정했다. 김구가 해방 전에 수행한 독립운동과 해방 후에 수행한 문화국가 추진이 이 지정의 근거였다. 한국의 독립운동은 국제적 착취 시스템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었으므로 한민족뿐 아니라 세계 인류를 위한 운동이었다. 유네스코가 이를 기념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국가보훈부는 이 대통령의 지시와 유네스코총회의 지정을 접목시키는 방향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보훈부가 효창공원 국립공원화 사업을 2026년에 담긴 위와 같은 세계적 의미와 연계시켜 진행하기로 한 사실이 1일 자 언론들에 보도됐다.
'극일'의 심정으로 만든 삼의사 묘소
효창공원은 능-원-묘로 이어지는 왕실 무덤 중에서 처음에는 3등급인 묘(墓)로 출발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이곳이 묘로 지정된 것은 1786년 7월 15일(음력 6.20)이다. 34세인 정조 임금은 이날 네 살 된 아들인 문효세자의 무덤을 효창묘로 명명했다. 음력으로 고종 7년 12월 10일 자(양력 1871.1.30.) <고종실록>에 따르면, 효창묘는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운영하던 시기에 2등급 묘소인 효창원으로 승격됐다.
효창원은 네 살짜리 아이를 땅에 묻은 아버지의 한이 스며든 공간이다. 이런 곳이 구한말에는 일본군의 침탈을 당했다. 1894년에 동학군을 진압하겠다며 조선을 침입한 일본군은 이곳에도 주둔했다.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가 편찬한 <개혁·침략·저항·건국의 자취를 찾아가는 서울 근현대 역사기행>은 효창공원 편에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이 서울에 침입하여 이곳에 주둔"했다면서, 이로 인해 "규모가 컸던 효창공원이 훼손되기 시작"했다고 기술한다. "1924년 일제 경성부는 효창원 일부 8만 1천여 평을 공원으로 조성했으며, 1944년 서오릉으로 이장하였다"라고 이 책은 말한다.
일제 침탈을 당한 이곳은 해방 뒤에는 일제를 극복하는 공간이 됐다. 이 공간에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안치됐다. 1932년 1월 8일 도쿄에서 히로히토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이봉창(1901~1932), 같은 해 4월 29일 히로히토 생일인 천장절 행사 때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폭탄을 터트린 윤봉길(1908~1932), 1919년부터 1933년까지 한중일 세 곳을 넘나들며 폭파 공격을 시도해 일제를 긴장시킨 아나키스트 백정기(1896~1934)의 유해가 모셔졌다.
'삼의사'로도 불리고 '삼열사'로도 불리는 이봉창·윤봉길·백정기의 장례식은 해방 이듬해에 국민장으로 거행됐다. 1946년 6월 21일 자 <조선일보>는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삼열사의 유해는 방금 서울 태고사에 봉안 중"이라며 "삼열사봉장위원회에서는 장지를 효창공원으로" 정했다고 보도했다. 그해 5월 15일 부산항으로 귀국한 삼의사를 효창공원까지 인도하는 과정은 전국적인 추모 열기 속에 이어졌다. <백범일지>는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일본 동경에 있는 박열 동지에게 부탁하여 윤봉길·이봉창·백정기 세 분 열사의 유골을 본국으로 모셔오게 하고, 유골이 부산에 도착하는 날 나는 특별열차로 부산까지 갔다. 부산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분의 유골을 모신 열차가 정거하는 역마다 사회·교육 각 단체며 일반 인사들이 모여 봉도식을 거행하였다."
삼의사 매장지의 결정에는 위의 삼열사봉장위원회뿐 아니라 김구의 의중도 작용했다. <백범일지>는 "내가 친히 잡아 놓은 효창공원 안에 있는 자리에 매장하기로 하였다"고 회고한다.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과 더불어, 일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삼의사가 해방 이후 최초의 국민장을 거쳐 효창공원에 모셔졌다. 조선 왕실 무덤인 줄 뻔히 알면서도 일본군이 군홧발로 짓밟은 곳에다가 일본을 가장 크게 위협한 독립투사들을 모셔놓았다. 효창공원의 상징성은 크다.
일본군이 효창공원을 훼손하지 않아 정조 임금이 해놓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왕조시대의 충성심이 남아 있었던 해방 직후의 한국인들이 이곳에 새로운 묘소를 조성하기는 힘들었다. 일본이 짓밟은 곳이기에 극일의 심정으로 삼의사 묘소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효창공원의 진정한 의미

▲ 이동녕 묘소가 있는 서울 효창공원 임시정부 요인 묘소.
김종성
효창공원에는 임시정부 관계자들도 묻혔다. 이 장소를 삼의사 장지로 추천했던 김구도 이승만 정권하에서 피살된 뒤 이곳에 묻혔다. 김구처럼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이동녕,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이었던 차이석, 임시의정원 의원 및 국무위원을 역임한 조성환도 모셔졌다. 위의 서울학연구소 책은 "효창공원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묘역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라고 평한다.
효창공원에는 안중근의 임시 무덤도 조성돼 있다. 유해가 발견되면 그도 가묘가 조성돼 있는 이곳으로 모셔진다. <백범일지>는 삼의사 장지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제일 위에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봉안할 자리를 남기고, 그다음에 세 분의 유골을 차례로 모시기로 하였다"라고 말한다.
일제는 사법살인 형식으로 살해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아무렇게나 방치했다. 전기작가 임중빈의 <윤봉길 의사 일대기>는 일본 현지에서 윤봉길 유해를 수색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일본에 거주하는 애국청년 900여 명이 여러 날을 고생하면서 이 일에 매달린 결과, 가까스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라고 한 뒤, "천신만고 끝에 당시 형무소 간수로 있던 사람을 찾아내 그의 안내로 쓰레기 하치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라고 알려준다.
"윤 의사의 유해에는 십자가 틀도 함께 묻혀 있었다"라고 이 책은 말한다. 일제에 의해 그렇게 폄하됐던 독립운동가들을 국민적 성원 속에 모신 곳이 효창공원이다. 이곳의 의미는 한층 남다를 수밖에 없다.
1946년 이후로 효창공원은 상징적 의미의 '국립묘지'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한국의 정통성을 형성한 1919년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주역들이 묻힌 공간이라는 점에서 이곳은 국립묘지나 진배 없었다. 이런 곳을 실제적 의미의 국립 시설로 만드는 사업이 이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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