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번째 민족 대표’라 불린 프랭크 스코필드(오른쪽)와 그의 한국어 선생이자 통역이었던 목원홍.
공훈전자사료관
이승만 집권기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정부 차원에서 부각되는 일이 드물었다. "훈장 기타 영예를 수여"(1948년 헌법 제65조)하는 권한을 가진 이승만은 내국인 중에서는 자기 자신과 이시영 부통령만 독립유공자로 지정했다.
이승만은 내국인보다 외국인을 더 많이 지정했다. 외국인 중에서는 중국인인 장제스 중화민국 총통, 미국인인 호머 헐버트 선교사, 캐나다인인 올리버 애비슨 선교사를 포함한 16인이 지정됐다. 이승만 때는 내국인 독립운동가들이 철저히 외면되는 가운데, 외국인 독립운동가 일부가 선택적으로 유공자 지정을 받았다. 이런 시절에 스코필드가 이승만의 환영을 받으며 입국하게 됐던 것이다.
이승만 우상화가 진행되던 시절에 스코필드는 이승만의 간곡한 초청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국빈이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몇 달도 안 돼 '우상'과 얼굴을 붉히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때문에 정권 2인자인 이기붕 민의원의장이 그를 찾아가 출국을 종용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1959년 1월 11일 자 <경향신문> 사설은 병원 입원을 이유로 정치적 은거를 하고 있는 이기붕의 무책임을 질타하면서 "이 의장은 병구(病軀)를 끌고 스코필드 박사를 친히 방문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는 근력이 있었다 하거니와"라고 비판했다. 치료를 받아야 한다며 국회의장 책임을 방기하는 사람이 스코필드를 찾아가 귀국을 종용할 힘이 있었느냐고 꼬집은 것이다.
위 신문 13일 자에 따르면, 스코필드는 위 사설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자신이 이기붕의 방문을 받은 일은 없다며 정정보도를 요청했다. 이기붕이 출국을 종용했다는 부분은 오보로 결론 났지만, 이런 보도가 나오게 된 것은 양측의 관계가 1958년 12월 24일을 계기로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날 자유당 정권이 국가보안법 적용 대상을 확대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개정안을 통과시킨 것이 그 원인이었다(2·4파동).
그날 이승만은 민주당은 물론이고 혁신계(진보진영)를 탄압할 목적으로 무술 실력을 갖춘 경찰들을 동원해 야당 의원들을 의사당에서 끌어낸 뒤 국가보안법 개악을 강행했다. 당시의 혁신계는 일제강점기에 항일투쟁을 했거나 해방 직후에 친일청산·분단반대운동 혹은 진보운동을 벌인 세력 혹은 그 후배들이었다.
일제는 이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치안유지법을 운용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에 계승된 이 법을 운용해 본 이승만은 1958년에 이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킬 목적으로 위와 같은 파동을 일으켰다.
민주당과 더불어 혁신계를 탄압할 목적으로 이승만이 대한민국판 치안유지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69세의 스코필드는 39년 전의 악몽을 떠올렸다. 경찰이 동원돼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것을 보고 그의 머릿속에서는 3·1운동 때의 일제 헌병들이 연상됐다. 그래서 그는 3·1운동 때 했던 것처럼 국가보안법 반대운동에 나섰다. 그는 자신을 극진히 초청한 이승만 정권을 겨냥해 언론 기고 등을 통해 공개 투쟁에 나섰다.
"한국 땅에 묻히는 것이 소원"

▲스코필드 박사와 학생들
공훈전자사료관
스코필드가 국가보안법 파동을 보면서 3·1운동을 떠올렸다고 비판한 부분은 민주당의 대여 공세 무기로 활용됐다. 1959년 1월 16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전날 민주당 대책회의에서 유진산 원내총무는 사태의 심각성을 강조하고자 이렇게 발언했다.
"외국인인 스코필드 박사까지도 2·4 파동을 1919년의 3·1운동 당시와 못지않은 공포와 암흑을 느끼게 하였다고 말하고 있고 국민은 국민대로 울부짖고 있는데, 대통령은 사태 수습에 여하한 의사도 표시하지 않고 있다."
위 신문의 그달 5일 자는 또 다른 3·1운동 민족대표라는 의미에서 스코필드를 "3·1운동의 제34인"으로 지칭한다. 그러면서 "이런 일은 1919년도에 한국에 있었던 일과 꼭 같다는, 시인하지 않을 수 없는 이 마음, 적이 슬프다"라는 스코필드의 탄식을 전했다.
그의 탄식은 국가보안법이 치안유지법의 대체물임을 시사하는 동시에 이승만 정권의 악행이 제국주의 못지않다는 뉘앙스를 전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승만의 권력이 절정에 달한 시기에 그런 직격탄을 이승만에게 공개적으로 날렸다. 그는 이승만이 자신을 "간곡하게" 초대했다는 점을 배려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자신의 친구인 한국인들을 핍박하고 있다는 점에만 주목했다.
스코필드가 이승만을 일제에 빗댄 이듬해에 자유당 정권은 무너졌다. 그가 캐나다로 돌아간 것은 1964년이다. 그해 4월 16일 자 <경향신문>은 "6년 전인 58년에 그리던 한국에 돌아왔었다"고 한 뒤 "스 박사는 지난 6년간 카나다의 친지들로부터 돈을 얻어다 가난한 한국 학생들을 돌봐왔지만, 여장(旅裝)은 입고 있는 허름한 양복뿐이라고 한다"고 전했다.
스코필드가 그 일을 모른 척하고 넘어갔다면, 그는 이승만 정권하에서 독립유공자로 지정됐을 가능성이 컸다. 그 정도로 성대하게 초청해 놓고 훈장 수여를 외면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그가 이승만을 일제에 비유하는 바람에 그것은 물 건너가게 됐다.
스코필드가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것은 1968년이다. 2년 뒤 그는 한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1970년 4월 13일 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그의 유언장에는 "한국 땅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국립묘지인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묻혔다. 그는 이승만이 운용하고 업그레이드시킨 국가보안법이 몹쓸 악법이라는 것을 인상적인 방법으로 부각시킨 독립운동가 겸 민주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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