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8일 용산 피스앤파크컨벤션에서 열린 2026 노사정 신년인사회에서 서종수 한국노총 상임부위원장(왼쪽 여섯번째부터)과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 손경식 경총 회장 등 참석자들이 케이크 커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냉정하게 짚어보자. 실용행정이 표방하는 경청과 통합은 과연 국민주권의 원리를 우리 행정 안에 내재화하며 비토크라시의 빗장을 풀 수 있을 만큼 효과적인 전략을 품고 있는가? 경청통합수석실은 과거의 시민사회수석실처럼 시민사회의 민원 창구에 그치면 안 된다. 오히려 소통의 문법과 구조를 재설계하는 근본적인 처방으로 우리 행정의 체질을 개조하는 정부혁신의 거점이 되어야 한다. 소통의 시점, 언어, 관계를 바꾸는 세 가지 변화가 핵심이다.
첫째, 소통 시점의 변화다.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초기 정책 단계부터 시민참여를 제도화해야 한다. 1998년 오르후스 협약(Aarhus Convention)의 정신은 모든 선택지가 열려 있는 초기 단계의 대중 참여를 강조한다. 그래야 특정 기술이나 방식에 매몰되지 않고 처음부터 가장 사회적 합의가 높은 대안을 선택할 수 있다. 이미 입지와 기술적 대안이 결정된 후의 공청회 등은 '답정너'의 수단이 되어 갈등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증폭시킬 뿐이다.
따라서 전략환경영향평가는 계획 수립 전 단계로 전진 배치되어야 하며(한국환경연구원 조공장 박사), 공론화는 정책 기획 단계에서 모든 선택지를 투명하게 펼쳐놓고 '사회적 합의'를 정책의 대전제로 삼는 행정 수단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시민이 참여하는 정책 실험 '리빙랩'이나 '시민참여예산제'를 확대해 행정이 국민주권을 대리하는 도구임을 명확히 해야 한다.
둘째, 소통 언어의 변화다. 사실(Fact)로 정쟁을 잠재우는 데이터 공유 거버넌스를 확립해야 한다. 진정한 실용행정은 참여와 숙의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실과 소문이 뒤얽힌 상황에서의 대규모 참여와 숙의는 더 큰 갈등과 분열을 낳는다. 이때, 상호 이해와 화해의 초석이 되는 건 명확한 '증거', 데이터뿐이다. 오바마 정부의 '오픈 거버넌스'를 설계한 베스 노벡이 강조했듯, 데이터는 시민의 협업을 이끄는 공통의 언어다.
따라서 행정은 데이터의 생산부터 검증까지 전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공유해야 한다. 행정의 지식을 시민의 집단지성과 연결하는 이 시스템이야말로 소모적인 갈등 비용을 사회적 자산으로 전환하는 실용행정의 핵심 인프라다.
셋째, 행정과 정치, 공무원과 국민의 관계를 변화시켜야 한다. 중재자에서 조정자로 행정의 역할을 재정의하는 패러다임 전환이 절실하다. 행정학의 선구자, 메리 파커 폴렛은 강압이나 타협을 넘어선 통합이야말로 행정의 정수라고 보았다. 통합이란 창조적 대안을 통해 상충하는 요구를 최대한 충족하기 위해 노력하는 윈·윈 협상의 역동적 과정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행정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관철하는 중재자가 아니라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조정자(퍼실리테이터)가 되어야 한다. 행정의 조정 기능 복원은 비토크라시의 빗장을 풀어 정치를 '구원'하는 길마저 열어줄 수 있다. 진영 논리에 갇힌 정쟁의 수사를 '사실'의 언어로 바꿔주고, 상호이익의 창조적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정치가 타협할 수 있는 명분과 토양을 제공할 때 그렇다.
실용행정, 법제화로 완성돼야
이 모든 혁신은 법제화로 완성되어야 한다. 데이터 공개와 공유를 의무화하고, 범정부 통합 조정 기구에 실효적 권한을 부여하며, 공무원의 조정 기능을 촉진하는 입법적 뒷받침이 있어야만 실용행정이 지속 가능해진다. '갈등관리기본법' 제정이 그것이다.
행정은 정치를 구원할 수 있어도 대체할 순 없다. 행정의 전문성이 정치적 합의를 뒷받침하는 토대가 아니라 정치를 대신하려 할 때, 12.3 계엄 같은 희극적 비극이 잉태된다. 이재명 정부의 실용행정이 발전국가의 함정을 넘어 국민과 함께 민생을 일구고 협상의 정치를 복원하는 정교한 갈등 조정 플랫폼이 되길 기대한다.
▲은재호 정치·행정학자
본인
필자 소개 : 은재호는 프랑스 고등사범학교(ENS-Paris Saclay)에서 프랑스 정책변동 연구로 정치학(정책학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국무총리 소속 한국행정연구원에 재직하며 한국갈등학회장과 다수 정부 부처의 갈등관리심의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현재는 국가교육회의 및 국민통합위원회 위원과 한국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로 일하며, 연구 현장과 정책 현장을 이어주는 정책 중개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 디자이너'가 되기를 꿈꾸는 그의 저서로는 <사회갈등 해소를 위한 국민통합 전략과 실행방안 연구>(2017), <혁신적 포용국가의 국가론적 지위와 이행전략>(2019), <공론화의 이론과 실제>(2022), <경세제민의 공공리더십>(2024)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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