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일본생활의 결과물(?)한 달 일본생활을 통해 적지 않은 변화가 생겼다. 사진 상단의 왼쪽부터 일본어 명함, 담당교수 명함, 시립도서관 출입증, 재류카드, 연구원 물품구입 확인증, 도서관 이용증, 생협(생활협동조합) 조합원 카드, 교통 카드, 연구실 출입증, 슈퍼마켓 카드, 일본호텔 무료회원카드 등이다. 내 일본어 명함은 여수에서 기획사를 하는 고향 친구가 일본생활 잘 하라며 특별히 제작해주었는데 현지에서 유용하게 잘 쓰고 있다.
김용국
일본은 은행 계좌개설이나 신용카드 발급도 외국인에게 상당히 엄격하다. 나처럼 6개월 미만 거주자는 아예 엄두도 못 낸다. 다만, 우체국에서만 단순 입출금 등이 가능한 계좌를 만들어 준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얻고, 신청서 작성 방법을 연구하여 밤새도록 서류를 준비했다.
다음날 대학 구내 우체국으로 향했다. 작성한 서류를 내밀었더니 환갑이 조금 넘었을 중년의 창구 직원은 신청서에 줄을 죽죽 그으면서 투덜댄다. 내가 잘못 작성해서 피곤하다는 뜻이다. 도장으로 정정인을 찍고, 여기저기 고치라고 지적하더니 대기하란다. 상사에게 서류를 올리더니 한참 후 나를 다시 부른다.
"서류는 다 되었는데, 심사에 시간이 좀 걸려요. 짧으면 보름, 길면 한 달 정도 있어야 해요. 통지가 갈 거니까 그때까지 기다리세요."
건네준 안내문을 보니 범죄나 테러 등에 연루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당국의 심사가 필요하다고 적혀있다. 입출금 통장 하나 만드는 데 이런 취급을 받나 싶어 불쾌했지만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일본 생활, 기다림과 인내의 연속
일본 생활은 기다림과 인내의 연속이다. 대학 도서관 출입증 발급에 2주가 걸린 건 애교에 불과했다. 인터넷 쇼핑도 주문부터 수령까지 1주일이면 빠른 경우다. 그리고 사람이 없으면 도로 들고 가는 경우도 많아서 택배가 올 때까지 외출을 못 하고 기다리는 사람도 적지 않다. 밤에 주문해서 새벽에 배송받는 데 익숙한 한국인으로선 도저히 이해 못 할 풍경이다.
전화나 문자로 통보하고 끝내도 될 일, 아니면 신청한 사람이 직접 방문해서 찾아가도 될 것을 굳이 우편으로 보내고 통보한다. 숙소 관리 직원은 나에게 "하루에도 수시로 우편함을 확인하라"고 당부했다. 일본은 아직도 대면 대신 메일, 전화 대신 팩스나 우편이 기본인 사회인 듯했다. 대한민국의 신속·정확 행정과 서비스에 익숙해 있던 내가 답답함을 느낀 건 당연지사.
어쨌거나, 이제 통장 개설을 제외하면 필요한 절차는 대충 마쳤다. 다행히 대학에서는 1년전부터 나의 신상을 확인하고 있던 터라 큰 불편함 없이 지내고 있다. 연구원 등록, 도서관 출입증 발급, 대학 생협(생활협동조합) 가입 등을 모두 마쳤다. 요즘은 대학 수업을 청강하고 정기적으로 교수와 메일을 주고받고 가끔 면담을 하며, 연구 계획 관련 자료 수집, 출장 등의 일정을 잡기도 한다.
체류기간과 일본어 실력은 별개더라

▲일본어 교실 풍경오사카부 도요나카시 국제교류센터에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일본어 교실을 진행하고 있다.
김용국
주로 지내는 곳은 대학 내 연구실과 숙소이다. 내가 쓰는 공동연구실은 정원이 6명이어서 넓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프린터 겸용 복사기가 있고 난방이 가능하기에 낮에는 숙소보다 더 자주 이용한다. 학교 구내식당은 1만 원 이내의 가격으로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어서 애용하고 있다.
평일 남는 시간은 일본어 공부를 하러 다닌다. 내가 거주하는 도요나카시는 주민센터(일본에서는 공민관이라고 한다), 국제교류센터, 인권평화센터 등에서 무료로 다양한 일본어 교실을 열고 있다. 무료라고 해도 일본어 강사(여기서는 볼런티어라고 부른다)들의 열정이 대단하고 1대 1 또는 소수 그룹으로 진행되기에 만족도가 높다.
일본에 살아보니 체류 기간에 비례해서 언어 실력이 느는 것은 아니었다. 2~3년 거주한 외국인 중에도 엉성한 발음에, 어설프고 초보적인 문장만 구사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쓰기나 읽기가 안 되는 사람도 제법 있었다.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현지에 살아도 일상언어를 흉내 내는 정도에 불과한 초보자로 남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말 2차례를 포함, 주 3~4회 정도 일본어 수업에 참여하고 있다. 외국인이 진지한 대화에 끼거나 일본인에게 인정받으려면 일본어를 잘하거나 영어를 잘하거나 둘 중 하나가 필요하다. 서비스업이나 전문직 쪽에서는 특히 영어 우대 분위기가 높다(둘 다 어설픈 나는 오늘도 고전 중이다).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사회, 매뉴얼에 없는 상황은?

▲대학 공동연구실 모습내가 쓰는 대학 공동연구실은 정원이 6명이어서 넓지는 않다. 그래도 프린터 겸용 복사기가 있고 난방이 가능하기에 낮에는 숙소보다 더 자주 이용한다.
김용국
일본은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사회라고 한다. 그러면 매뉴얼에 나와 있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매뉴얼에 없으니 안 된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상황에 맞추어 유연하게 대처할 것인가. 내 짧은 경험상 일본은 전자에 가까운 것 같다.
내가 자전거 방범 등록을 했을 때를 예로 들어본다. 일본은 모든 자전거 등록이 의무화되어 있다. 이때 필요한 서류가 구매 영수증이나 양도증명서 등이다. 자기 자전거라는 걸 확인하겠다는 취지인데, 한국에서 오래전 구입한 나에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만일 이게 없는 사람은 영영 등록을 하지 못하는 걸까. 등록 직원은 답을 하지 못한 채 서류가 필요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만일 다른 일본인이라면 수긍하고 그냥 돌아갔을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가 "한국에서 자전거를 가져왔고 오래되어서 그런 서류를 갖고 있지 않다. 어제 다른 직원에게도 그런 말을 전했고, 오늘 등록하겠다고 분명히 얘기했다"라고 하자, 바로 순순히 등록을 해주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일본인들은 자기 주장을 확실하게 하거나 강하게 나오는 사람에겐 물러서는 경향이 있었다. 역설적으로 일본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침묵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이때 말고도 몇 차례 더 깨달았다.
매뉴얼에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 이유로 거절당해도 할 수 없다. 관공서 대기 시간이 길어지든, 버스나 지하철 운행이 갑자기 중단되든, 평상시 출입하던 공간이 갑자기 출입금지가 되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하지 않는다. 심지어 이유를 물어보는 사람도 없다. 그저 상황이 끝나기를 바라면서 침묵할 뿐.
정말로 궁금해서 일본인 지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을 했다. "안 되니까 안 되는 것"이라고. 이런 생각을 하는 일본인들과 일본 사회를 반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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