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2.01 19:27최종 업데이트 26.02.01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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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에 꽂혀 살지만, 노벨상의 꽃은 아무래도 노벨물리학상이다. 42세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지 않았다면 이휘소(1935~1977) 박사도 이 상을 탔을 가능성이 있다. 미래창조과학부와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이 광복 70주년에 발행한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선>은 "불의의 사고가 아니었다면 노벨물리학상 수상 반열에 오를 수 있는 학자"였다며 '소립자 물리학의 표준 모형을 확립한 학자'라는 세계 학계의 평가를 전한다.

"수상 반열에 오를 수 있는"이라는 표현은 다소 부족한 느낌을 준다. 이휘소 평전인 이은유 작가의 <현대 물리학의 별 이휘소>는 그가 물리학계 내에서 "노벨상 수상자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다고 말한다.

파키스탄 물리학자인 압두스 살람은 한동안 세계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이휘소를 찾아가 자기 이론을 설명했고, 이휘소는 당신 이론이 맞다고 인정했다. 이휘소가 인정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세계 학계가 살람을 주목했고, 살람은 1979년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됐다.

스티븐 와인버그는 이휘소의 연구로 인해 그의 주장이 증명된 덕분에 살람과 함께 공동 수상을 했다. 위 책은 "이뿐만 아니라 훗날 토프트와 벨트만도 이휘소의 도움이 있었기에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었고, 리히터와 팅 등도 마찬가지였다"라고 기술한다.

이휘소는 세계 물리학계뿐 아니라 한국 학계에도 기여했다. 위의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선>은 "우리나라 기초과학 연구의 진흥에도 크게 기여"했다며 "1974년 미국 AID 차관자금에 의한 서울대학교의 이공계 교육증진계획을 적극 지원했고, 이를 통해 국내 대학교육용 기자재를 구입하고 실험시설을 확충하여 1980년대 우리나라 대학원의 교육 및 연구 수준을 향상시켰다"라고 평한다. 또 "우리나라가 고에너지 국제공동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했다"라고도 말한다.

이휘소의 성공 신화

이휘소 박사위키미디어 공용

이휘소의 출생 연도는 해방 10년 전인 1935년이다. 고향은 서울 원효로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의사였고, 딸과 아들이 넷인 가정에서 장남이었다. 공붓벌레였던 그는 경기중학교와 고졸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수석 합격했다. 그는 부모님의 병원 2층에 차려진 실험실에서 현미경을 들여다보며 실험에 몰두했다.

그가 대학에 들어간 1952년만 해도 화학공학과의 인기가 높았다. 이 학과를 졸업한 학생들이 주로 가는 곳은 화장품 회사였다. 그런데 화학공학은 그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 와중에 할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병원이 불에 탔다. 취업이 잘되는 학과를 선택한 데는 이런 사정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 그는 물리학과에 들어가기 위해 학교를 그만뒀다. 또다시 대입시험을 치를 여력은 없어 주한미군이 주관하는 유학생 선발시험으로 눈을 돌렸다. 이런 경로를 밟아 스무 살 때인 1955년 1월에 마이애미대학 물리학과 편입생이 됐다.

이휘소는 태평양 동쪽으로 건너간 뒤에 더 열심히 공부했다. 수업을 들어야 하기 때문에 전공 공부 외에 영어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열심히 해야 할 것이 더 있었다. 주한미군 장학금과 어머니 송금만으로는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중국 음식점 배달도 하고 학교 조교도 했다. 이 때문에 코피도 쏟고 병원 응급실에도 갔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도미 이듬해인 1956년 6월에 미국 학생들을 제치고 수석 졸업을 했다. 석사과정은 그해 8월부터 피츠버그대학에서 이수했고, 박사과정은 1958년부터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밟았다. 박사과정 입학시험에서는 1등을 했다. 한 문제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이휘소의 이름을 미국 학계에 퍼트리는 계기가 됐다. '원자폭탄의 아버지'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의 귀에도 그 이름이 들어갔다.

위 평전은 "프린스턴고등연구소장 오펜하이머는 휘소의 박사과정 시험지와 논문을 모두 읽어보고 영국의 사회인류학자인 프레이저를 휘소에게 보냈다"라고 말한다. 이론물리학자가 사회인류학자를 보내 청년 물리학자를 탐색했다. 자신과 다른 시각으로 이휘소를 분석해 줄 사람이 필요했을 정도로 관심도가 컸던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이휘소에게 해준 조언 중 하나는 '오로지 물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로 남으라'는 것이었다.

이휘소가 박사학위를 획득한 것은 26세 때인 1961년이다. 이 해에 펜실베이니아대학 물리학과 교수가 됐다. 고학생이 태평양을 건넌 지 불과 6년 만에 미국 학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던 것이다.

<과학기술 대표성과 70선>은 "이휘소 박사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를 '물리학에만 매달린 사람' 혹은 '팬티가 썩은 사람'으로 기억한다"라며 "한번 자리에 앉으면 엉덩이를 떼지 않고 학문에 매진하는 생활습관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고 말한다. 동료와 점심식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일어서더니 그 길로 연구실에 들어가 한 번도 일어나지 않고 이틀 만에 논문 한 편을 완성한 적도 있다. 이런 노력과 열정이 그의 성공 신화를 만들었다.

안타까운 죽음

2007년 6월 14일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열린 고 이휘소 박사 유품 기증식에서 기증자인 이철웅씨와 강주상 교수 등이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광식 고려대 박물관장, 강주상 교수, 한승주 총장, 이철웅씨, 이홍구 전 국무총리.연합뉴스

그는 그렇게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원자를 구성하는 단위인 소립자에 대한 인류의 지식을 심화시켰다. 더불어 고국 후배들의 연구환경 개선에도 기여했다. 그랬던 그의 삶은 뜻밖의 사고로 허무하게 마감됐다.

1977년 6월 16일이었다. 이휘소는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다소 한적한 이 도로를 그는 시속 90킬로미터가 좀 안 되는 속도로 달렸다.

도로에 진입한 지 1시간 반 정도 지났을 때였다. 그 지점의 중앙분리대는 특이했다. 폭이 20미터 되는 잔디밭이 분리대 기능을 하고 있었다. 위 평전에 따르면, 그때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36톤 트럭이 중앙분리대를 넘더니 이휘소 차의 운전석을 덮쳤다. 가족들은 경상을 입었지만, 이휘소는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이 참사는 '트럭이 타이어 펑크 때문에 중심을 잃고 중앙분리대를 넘어 이휘소 차와 충돌해서 발생한 사고'로 발표됐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의혹이 제기됐다. 1993년 6월호 월간 <말> '미 CIA의 핵저지 공작과 이휘소 박사의 죽음'에 따르면, 사고 보름 뒤에 고흥문 신민당 의원은 최형섭 과학기술처장관에 대한 국회 질의 시간 때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지 않느냐?"라고 발언했다.

고흥문은 "우리나라가 핵을 개발하게 될 경우 어쩌면 제일 먼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이 박사가 아니냐?"라며 "여기에 어떤 흑막이 게재되어 있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최형섭 장관은 "바퀴 빠진 트레일러에 받혀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답했다.

외무부 장관이 되어 박정희 정부의 외교정책에 깊이 관여한 이동원(1926~2006)의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에 따르면, 박정희는 핵 개발을 저지하는 미국을 두고 "쳇, 지들은 맘대로 하면서 왜 우리 보곤 만들지 말라는 거야?"라며 이휘소를 자주 거론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1974년 9월에 고국을 방문한 이휘소를 청와대로 초대해 극진히 대접했다. 위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는 "이 박사, 부탁이니 귀국해 한국을 위해 일해주시오"라며 "내 이 박사만 돌아온다면 60만 대군 모두를 이 박사 경호를 위해 쓰겠소"라고 부탁했다.

이휘소에 대한 이 같은 박정희의 애착과 더불어 한미 간의 핵문제 등으로 인해 이휘소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다. 하지만 이휘소가 박정희의 청을 받아들였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대통령을 그리며>는 이휘소가 1972년 10월 17일에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선포하자 곧바로 비난 성명을 발표해 박정희를 불편하게 만든 일을 소개한다. 이동원은 이휘소가 "유신 혐오증"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박정희의 '애정공세'를 받은 뒤에는 이휘소의 태도가 다소 달라졌다. 이휘소는 서울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박정희가 자기 아이들에게 한국 우표와 무용 서적을 선물한 일을 소개했다. 이런 관계가 형성됐을 정도로 이휘소의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는 했다.

정말로 한국 핵 개발에 참여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20세 나이로 미국에 가서 얼마 뒤 세계 물리학계를 들썩이게 만든 이 노력형 천재 학자가 4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은 한국뿐 아니라 인류 전체로 봐도 큰 손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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