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6월 14일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열린 고 이휘소 박사 유품 기증식에서 기증자인 이철웅씨와 강주상 교수 등이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광식 고려대 박물관장, 강주상 교수, 한승주 총장, 이철웅씨, 이홍구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그는 그렇게 얻은 성과를 바탕으로, 원자를 구성하는 단위인 소립자에 대한 인류의 지식을 심화시켰다. 더불어 고국 후배들의 연구환경 개선에도 기여했다. 그랬던 그의 삶은 뜻밖의 사고로 허무하게 마감됐다.
1977년 6월 16일이었다. 이휘소는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승용차를 타고 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다소 한적한 이 도로를 그는 시속 90킬로미터가 좀 안 되는 속도로 달렸다.
도로에 진입한 지 1시간 반 정도 지났을 때였다. 그 지점의 중앙분리대는 특이했다. 폭이 20미터 되는 잔디밭이 분리대 기능을 하고 있었다. 위 평전에 따르면, 그때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36톤 트럭이 중앙분리대를 넘더니 이휘소 차의 운전석을 덮쳤다. 가족들은 경상을 입었지만, 이휘소는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
이 참사는 '트럭이 타이어 펑크 때문에 중심을 잃고 중앙분리대를 넘어 이휘소 차와 충돌해서 발생한 사고'로 발표됐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의혹이 제기됐다. 1993년 6월호 월간 <말> '미 CIA의 핵저지 공작과 이휘소 박사의 죽음'에 따르면, 사고 보름 뒤에 고흥문 신민당 의원은 최형섭 과학기술처장관에 대한 국회 질의 시간 때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지 않느냐?"라고 발언했다.
고흥문은 "우리나라가 핵을 개발하게 될 경우 어쩌면 제일 먼저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바로 이 박사가 아니냐?"라며 "여기에 어떤 흑막이 게재되어 있지 않느냐?"라고 물었다. 최형섭 장관은 "바퀴 빠진 트레일러에 받혀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답했다.
외무부 장관이 되어 박정희 정부의 외교정책에 깊이 관여한 이동원(1926~2006)의 회고록 <대통령을 그리며>에 따르면, 박정희는 핵 개발을 저지하는 미국을 두고 "쳇, 지들은 맘대로 하면서 왜 우리 보곤 만들지 말라는 거야?"라며 이휘소를 자주 거론했다고 한다.
박정희는 1974년 9월에 고국을 방문한 이휘소를 청와대로 초대해 극진히 대접했다. 위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는 "이 박사, 부탁이니 귀국해 한국을 위해 일해주시오"라며 "내 이 박사만 돌아온다면 60만 대군 모두를 이 박사 경호를 위해 쓰겠소"라고 부탁했다.
이휘소에 대한 이 같은 박정희의 애착과 더불어 한미 간의 핵문제 등으로 인해 이휘소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제기됐다. 하지만 이휘소가 박정희의 청을 받아들였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대통령을 그리며>는 이휘소가 1972년 10월 17일에 박정희가 유신체제를 선포하자 곧바로 비난 성명을 발표해 박정희를 불편하게 만든 일을 소개한다. 이동원은 이휘소가 "유신 혐오증"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박정희의 '애정공세'를 받은 뒤에는 이휘소의 태도가 다소 달라졌다. 이휘소는 서울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박정희가 자기 아이들에게 한국 우표와 무용 서적을 선물한 일을 소개했다. 이런 관계가 형성됐을 정도로 이휘소의 태도에 변화가 생기기는 했다.
정말로 한국 핵 개발에 참여하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20세 나이로 미국에 가서 얼마 뒤 세계 물리학계를 들썩이게 만든 이 노력형 천재 학자가 42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은 한국뿐 아니라 인류 전체로 봐도 큰 손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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