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친구(PENTAX_MZ-10 촬영)길에서 만난 아이들을 텐데 서로 규칙을 정하고 밥을 먹고 함께 공간을 나눈다.
이재필
하지만 필름 작업을, 그리고 중형과 대형 포맷을 다루면서 내 몸은 느림에 둔감해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느림을 즐길 줄 아는 여유가 생겼다. 초점이 조금 늦게 잡히면 어떤가, 그 사이에 피사체를 한 번 더 바라보면 되는 것을. 셔터 소리가 경쾌하지 않으면 어떤가, 사진만 찍히면 되는 것을.
이런 무장해제 된 상태, 편견 없는 마음가짐은 MZ-10 같은 보급형 기기를 대할 때 빛을 발한다. 나는 이제 플라스틱 장난감 같은 카메라 하나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더 이상 완벽한 장비를 갈망하지 않게 된 것, 그것은 사진가로서 겪은 가장 큰 성장이자 해방이었다.
필름 카메라를 쓴다는 것은 결과보다 과정에 무게를 두는 행위다. 디지털 카메라처럼 찍고 바로 확인하고, 마음에 안 들면 지우는 인스턴트식 소비가 아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상은 필름 위에 잠재(Latent Image)되어 맺히지만, 현상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그 불확실성이 오히려 촬영 그 자체에 집중하게 만든다. 어떻게 빛을 담을 것인가. 프레임 안에서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이 피사체는 나의 어떤 감정을 건드리는가.
사냥꾼이 아닌 산책자로
MZ-10의 뷰파인더를 보며 나는 기술적인 고민을 내려놓았다. 어차피 내가 조작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그러니 나는 오직 '보는 것'에만 집중하면 된다. 화소 수나 노이즈, 다이내믹 레인지 같은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증발해 버린 자리에, 순수한 '발견의 기쁨'이 차올랐다.
거리 사진, 소위 '스트리트 포토그래피'는 찰나의 예술이라고들 한다.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을 포착하기 위해 사진가는 사냥꾼처럼 예민하게 날을 세워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나는 그날, 사냥꾼이 아니라 산책자가 되기로 했다. 반드시 그 순간을 쥐어야 하는 강박이 사라지자, 풍경이 다르게 보였다. 놓치면 놓치는 대로,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괜찮았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느리게 걸으며, 찬찬히 훑어보며, 마치 스케치북에 연필로 툭툭 선을 긋듯이 셔터를 눌렀다. 가장 성능이 떨어지는 카메라를 들었을 때, 가장 완벽한 심리적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고가의 장비가 주는 부담감, 잘 찍어야 한다는 압박감, 본전 생각을 해야 하는 계산적인 마음.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난 상태. 이름 없는 보급형 AF 필름 카메라, 더미 박스에서 굴러다니던 플라스틱 덩어리 펜탁스 MZ-10은 그날 나에게 그 어떤 명기(名機)도 주지 못한 가벼운 날개를 달아주었다.
사진은 결국 빛을 담는 그릇이다. 그 그릇이 금으로 만들어졌든, 흙으로 빚어졌든 혹은 값싼 플라스틱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기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 뿐이다. 춥지만 따뜻했던 그 겨울 오후의 햇살처럼, 나의 MZ-10은 비록 초라한 겉모습일지언정 그날의 공기와 나의 마음을 온전히 담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가방 속 카메라는 여전히 가벼웠지만, 내 마음속에 남은 여운은 그 어느 때보다 묵직했다. 언젠가 이 필름을 현상했을 때, 그 안에 담긴 것이 비록 초점이 나가고 거친 입자 투성이라 할지라도 나는 웃으며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흔들린 사진 속에 내가 누렸던 가장 자유로운 시간이 박제되어 있음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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