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가포동에 위치한 창원마산 한국전쟁민간인희생자 위령탑의 모습.
윤성효
미군정의 위상이 동요하는 경향은 미군정 법령에 기초한 판결들이 재심 판결에 의해 뒤집히는 최근 경향에서도 확인된다. 지난 1월 27일에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형사3단독(김남일 부장판사)이 미군정 포고령 제2호 위반 혐의로 유죄선고를 받은 양봉우·노상도·차생길의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한 것도 이런 흐름과 연결된다. 이 재심에서는 재판부뿐 아니라 검찰 역시 무죄 선고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의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3권에 따르면, 이번 재심 사건의 피고인 중 하나인 양봉우는 1950년에 37세였다. 14년 뒤 발행된 <2023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제5권 '미군정 포고령 제2호 위반 사건' 편은 1949년 5월 3일 자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 판결문에 적시된 양봉우의 '범죄사실'을 이렇게 제시한다.
"1948. 1. 10. 남로당에 가입하여 재적 중이고, 1948. 3. 11. 23:00경 25명과 함께 경상남도 고성군 하일면 수양리 도로를 파괴하여 사람과 수레의 왕래를 방해했으며, 1948. 11. 8. 12:00 '공출 반대, 단정 반대' 등의 문구가 기재된 삐라 약 70매를 하일면 학림리에 살포하였으며"
위의 2023년 보고서는 재판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사건의 구체적 내용을 확인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래서 확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양봉우가 도로를 파괴해 사람과 수레의 왕래를 방해한 사실과 '공출 반대'가 적힌 전단을 배포한 사실은 상호 연관되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군정은 식량공출제를 시행한 일제와 달리 남한 점령 직후에 식량 자유거래제를 허용했다. 그러나 쌀값 폭등과 시장 혼란을 제어할 수 없게 되자, 1946년 1월에 과거의 공출제를 복원시켰다. 이 정책은 정부수립 이후로도 이어졌다. 그러나 미군정은 공출제 복원 이후에도 사태 수습에 실패했다. 시장가격에도 못 미치는 값으로 쌀을 매입해 농민들에게 손실을 줬고, 시장 혼란의 원인 중 하나인 지주계층의 암거래도 막지 못했다.
이는 한국 대중과 미군정의 충돌을 초래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 제52권은 "미군정은 식량공출 과정에서 농민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였던바, 1946년 추수봉기도 그 한 표현이었다"라고 한 뒤 "군정 당국은 경찰력은 물론이고 군대까지 동원하여 공출을 강행"했다고 기술한다.
양봉우는 해방 이후의 반(反)농민적 식량정책에 정면으로 맞선 인물이다. 위와 같은 상황과 더불어 그의 노선을 감안하면, 그가 사람과 수레의 왕래를 방해한 것과 공출 반대 전단을 배포한 것은 동일한 맥락의 사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투쟁은 농민층만 대변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한반도 통합을 위해서도 싸웠다. 1949년 당시의 마산지원 판결문에 이런 부분도 있다.
"1948. 12. 5. 하일면 송천리에서 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이후 보안대의 늑대(본서)·흑대(지서)원의 조직에 대해 협의했으며, 1948. 12. 22. 21:30경 하일면 송천리에서 '공출 반대, 단정 반대' 등의 문구가 기재된 삐라 44매를 교부한 후 같은 날 23:00경 하일면 일대에 삐라를 살포하게 했다."
그는 남북 각각의 단독정부 체제를 반대했다. 두 개의 분단정부가 수립된 뒤인 1948년 12월에 그는 통일적인 인민공화국이 수립될 때를 대비해 치안조직의 본서와 지서를 구성하는 방안을 협의했다. 초창기 통일운동가였던 것이다.
이처럼 농민운동 및 통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양봉우는 1949년 5월 3일 마산지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이 선고는 결과적으로 사형선고가 됐다.
그가 마산형무소에 있었던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 사건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그가 진실화해위원회의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에도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 보고서의 '부산·경남 지역 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은 이렇게 기술한다.
"마산형무소에서는 1950년 7월 5일, 7월 21일~24일, 8월 24일, 9월 21일 네 차례에 걸쳐 최소 717명의 재소자와 보도연맹원들이 마산육군헌병대에게 인계되어 집단살해되었다. 이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배명기 외 358명이다. 대다수의 재소자들은 법적 절차 없이 집단살해되었으며, 일부는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총살당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양봉우는 7월 24일에 헌병대로 이송됐다. 그 이후 상황은 가족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2009년 보고서에 따르면, 가족들에게는 "마산형무소 수감 중 행방불명됨"으로 알려졌다. 이승만 정권은 미군정과 자신들에게 저항한 이들을 감옥에 두고서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것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의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낳았다.
'미군정 포고령', 그 자체가 문제였다

▲창원지방법원 마산지원.
윤성효
이번에 재심 판결을 선고한 마산지원은 1949년 5월 3일 자 마산지원 판결의 효력을 부인했다. 근거 중 하나는 죄형법정주의 위반이다. 법률에 규정된 범죄에 대해서만, 법률에 규정된 형벌로서 처벌할 수 있다는 법적 원리가 이 사건에서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양봉우에게 적용된 형법 중 하나는 미군정 포고령 제2호다. 1948년 헌법이 미군정 법령을 대한민국 법령으로 인정한 데 따른 것이다. 1945년 9월 9일에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이 선포한 포고령 제2호에는 "공중치안질서를 교란한 자", "정당한 행정을 방해하는 자"는 "사형 또는 다른 형벌"에 처하겠다는 경고가 담겨 있다.
2021년 6월 24일에 광주지법 순천지원은 포고령 제2호가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어서 국민이 어떤 행위가 범죄인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그처럼 '죄'의 범위가 불명확하므로 포고령 제2호를 근거로 형벌을 부과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에 위반된다고 순천지원은 판단했다.
이번 마산지원 판결은 이 판례와 궤를 같이한다. 2023년 1월 17일에 진실화해위원회가 양봉우 재판에 대한 재심을 권고한 사유 중 하나도 죄형법정주의 위반이다.
위와 같은 판단들은 해방 이후의 사법부가 미군정 포고령을 잘못 적용한 일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미군정 포고령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 이 포고령이 형법 기능을 하기 힘들므로, 이를 재판의 준거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포고령에 기초한 재판은 '법률'에 의한 재판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1948년 헌법 제9조 제1항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구금·수색·심문·처벌과 강제노역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했다. 현행 헌법에는 제12조 제1항에 비슷한 조문이 있다. 국민을 처벌하려면 형법에 의거해야 하는데 포고령 제2호는 형법의 자격이 없다는 게 순천지원과 마산지원의 판단이다. 형법 자격을 갖추지 못한 포고령 제2호를 형법처럼 발포한 미군정과 더글러스 맥아더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판결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재심 판결은 대한민국의 뿌리 문제와 관련해 미군정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국 사회의 흐름을 반영한다. 3·1운동의 이념인 자주독립정신 위에 우리 현대사의 기초를 공고히 세우고자 하는 한국인들의 열망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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