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 한국판 겉표지
심심
이런 일들이 우연히 겹친 결과인지, 아니면 반복 가능한 위험의 징후인지 판단하려면 하나의 기준이 필요하다. 여러 분석이 있지만, 그중 가장 이른 시점에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텍스트가 있다. 2017년 미국에서 출간된 도서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The Dangerous Case of Donald Trump)>다.
이 책은 트럼프 1기 초반, 미국의 정신의학자, 심리학자, 정신건강 전문가 27명이 참여해 편집된 논문집으로, 특정 인물에게 병명을 붙이거나 임상적 진단을 내리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저자들이 다룬 것은 '정신질환'이 아니라, 권력이 특정한 판단 양식과 결합할 때 공적 영역에서 어떤 위험이 발생할 수 있는지였다.
책의 여러 장은 공통적으로 하나의 문제를 다룬다. 통치자의 판단이 충동적으로 작동하고, 제도적 피드백과 절차를 견디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다. 예컨대 책은 '폭력과 강제력'이 정책 집행 과정에서 '정상적 선택'으로 취급되기 시작할 경우, 그 자체가 공공 위험의 지표가 된다고 경고한다.
폭력이 발생했는지 여부보다, 폭력과 절차가 충돌하는 순간 어떤 판단이 우선하는지가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미네소타에서 단속의 성과가 아니라 집행 방식과 적법절차가 문제로 떠오른 맥락은, 이 경고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또 다른 장들은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힘의 문제로 환원하는 판단 양식의 위험을 다룬다. 국제 규범과 동맹, 주권처럼 상호 의존적인 질서를 의지와 압박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할 때, 외교는 협상이 아니라 시험의 장으로 바뀐다는 지적이다. 그린란드 문제에서 나타난 공개 발언 중심의 압박과, 사후에 동맹국들이 대응에 나서는 국면은, 책이 말한 '현실 인식의 단순화'가 외교 현장에서 어떤 파장을 낳는지를 보여준다.
책은 또한 중대한 정책 수단이 사전 조율 없이 즉각적 반응으로 제시되는 통치 리듬을 위험 요소로 꼽는다. 설명과 조정이 뒤따르고, 결정은 먼저 나오는 방식이다. 이런 리듬이 반복될 경우 정책의 예측 가능성이 무너지고, 그 비용은 사회 전체가 떠안게 된다는 것이다.
한국 관세를 둘러싼 최근의 혼란은 이 대목과 겹친다. 관세율이 15퍼센트 수준으로 관리된다는 전제 위에서 움직이던 시장과 외교 채널이, SNS 게시물 하나로 흔들린 과정은 책이 경고한 위험 양상의 전형적인 사례로 읽힌다.
물론 이 책이 미네소타나 그린란드, 한국 관세 같은 사건을 특정해 예언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책에서 경고한 여러 위험 양상들 가운데에는, 재선 이후 벌어진 사건들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날지를 사실상 가늠할 수 있게 하는 설명들이 포함돼 있었다.
출간 당시 이 경고는 정치적 논쟁 속에서 소모됐고, 위험의 내용보다 저자의 의도와 진영 논리가 쟁점이 됐다. 그러나 그 사이,책이 다룬 판단 양식은 실제 사건의 형태로 반복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봉쇄된 경고, 실패한 관리
이런 판단 양식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이미 위험으로 분류돼 있었고, 전문가 집단을 통해 충분히 논의될 수 있었던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통제되지 않았다. 이유는 한 지도자의 성향이나 기행에 있지 않았다. 경고가 정치의 언어로 번역되지 못한 채, 진영 논리 속에서 소모됐기 때문이다.
트럼프 1기 초반 출간된 이 책은 공공 위험을 관리하기 위한 집단적 경고였다. 그러나 정치권과 여론은 이를 관리의 출발점으로 삼지 않았다. 경고의 내용은 사라지고, 저자의 의도와 정치적 입장만이 쟁점이 됐다. 그 결과, 예견 가능했던 위험은 관리의 대상이 아니라 논쟁의 소재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는 4년 후 다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정치는 내용이 아니라 편을 가르는 기술로 작동했다. 어느 쪽에 유리한지, 누구의 발언인지가 판단의 기준이 되면서, 위험 그 자체는 검토되지 않았다. 문제를 제기하면 공격으로 받아들여졌고, 경고는 배신으로 취급됐다. 그 결과 집단 지성은 방향성을 잃었고, 민주주의는 스스로 위험을 관리하는 능력을 약화시켰다.
여기에는 더 넓은 맥락이 있다. 트럼프는 사실 원인이라기보다 결과에 가깝다. 그가 세상을 이렇게 만들었다기보다, 이미 흔들리고 있던 민주주의가 '도널드 트럼프라는 위험한 사례'를 대통령의 자리로 밀어 올린 것이다.
그 민주주의의 균열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었다. 불평등과 불안정을 누적시키고, 정치적 선택의 범위를 점점 좁혀온 신자유주의 질서가 그 토양을 형성해 왔다. 성장과 효율을 앞세운 선택들이 반복되는 동안, 민주주의는 점차 사회적 불만을 흡수하고 조정하는 능력을 잃어갔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를 향한 숱한 경고 역시 정치적 선택의 기준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불평등과 불안정, 제도 피로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곧바로 '좌파의 주장'이라는 틀에 가두어졌고, 그 순간부터 내용에 대한 실질적 토론은 멈췄다. 비판은 검토의 대상이 아니라 진영을 가르는 표식으로 소비됐다.
이렇게 논쟁이 봉쇄되는 동안 문제는 인정되지 않았고, 위험은 관리되지 않았다. 그 사이 축적된 불만과 불안은 제도 내부가 아니라, 다른 형태의 정치적 출구를 찾게 됐다. 트럼피즘과 '마가(MAGA)'는 그 결과로 등장한 정치적 반동에 가깝다.
트럼프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보호무역과 국경 통제를 앞세웠을 때, 오랫동안 주변으로 밀려나 있던 미국의 백인 노동자계층은 그에게 열광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대개 이런 방식으로 인과관계를 뒤틀어 드러난다.
이 문제와 관련해 최근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카니 총리는 지난 20일 다보스 포럼 연설에서 규칙 기반 국제질서가 실제로는 "부분적으로 거짓"에 기대어 유지돼 왔다는 점을 인정했다. 강대국은 필요할 때 규칙에서 스스로를 면제해 왔고, 무역 규칙과 국제법 역시 적용 대상의 '정체성'에 따라 달라져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질서가 '유용한 허구'로 기능해 왔다고 덧붙였다. 규범의 간판은 유지됐지만, 말과 현실의 간극은 대체로 문제 삼지 않았다는 고백이다. 이는 국제질서의 위선을 넘어, 신자유주의가 국내외에서 작동해 온 방식에 대한 인정에 가깝다. 불공정과 불평등을 알면서도 체제 유지를 위해 침묵해 온 선택, 그 모순이 더 이상 가려지지 않는 국면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그런 맥락에서 카니 총리가 말한 '규칙 기반 질서'의 몰락은, 정확히 말하면 신자유주의 질서의 몰락에 가깝다. 인류가 구축해 온 규칙 기반 질서가, 규칙 그 자체 때문에 필연적으로 붕괴한 사례는 많지 않았다. 문제는 규칙이 아니라, 규칙을 선택적으로 적용하고 뒤틀어 온 방식이었다.
카니의 표현대로라면, 규칙의 틈을 비집고 드나들며 책임을 회피해 온 국제 무대의 관행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뜻이다. 규범은 간판으로 남고, 실제 행위는 예외와 면제로 운영되던 체제, 말과 현실의 간극을 관리로 덮어 왔던 질서가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워졌다는 고백에 가깝다. 지금 무너지고 있는 것은 규칙 그 자체가 아니라, 규칙을 교묘히 이용해 온 신자유주의적 운영 방식이다.
'정치'라는 말의 자리
▲지난 22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평화위원회'를 공개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이 위원회는 원래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전쟁 이후 가자지구 재건을 감독하기 위해 구상됐으나, 헌장상 활동 범위가 가자지구로 제한돼 있지 않아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유엔(UN)에 맞먹는 기구로 만들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연합뉴스/AFP
이 모든 혼란을 넘어서는 길은 결국 정치의 복원에 있다. 우선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표현의 곡해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정치란 본래 권력을 차지하는 기술이 아니라, 시민 공동체(polis)의 일을 함께 논의하고 판단하는 활동을 가리켰다. 인간이 정치적이라는 말의 뜻도, 편을 가를 줄 안다는 의미가 아니라 공동체를 위해 이성을 말로 드러내고, 옳고 그름을 가려 공동의 선택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데 있었다.
지금은 정치에 매몰된 시대가 아니라, 정치가 실종된 시대다. 정치는 점점 진영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고, 말은 설득이 아니라 침묵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쓰였다. 그 결과 예견 가능했고 관리할 수 있었던 위험들이 방치됐고, 그 공백을 위험한 선택들이 차지하게 됐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않을 때, 권력은 가장 단순하고 거친 언어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정치의 복원이란 새로운 이념을 내세우는 일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던 문제를 다시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일이고, 봉쇄됐던 논쟁을 다시 공동의 판단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규칙을 말하면서 예외를 묵인하지 않고, 효율을 말하면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것, 그 기본을 회복하는 일이다. 민주주의는 스스로의 경고를 들을 때만 살아남는다. 그렇지 않다면, 오늘의 혼란은 다른 이름으로 반복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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