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ICE 요원들이 한 남성을 체포하려다 여러 차례 총격을 가한 후,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연방 요원들이 시위자를 체포하고 있는 모습.
EPA/연합뉴스
2020년에 조지 플로이드 사건이 발생했던 미국 중북부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미국 시각 이달 8일 르네 니콜 굿이 이민세관단속국(ICE)의 단속 현장에서 총격으로 희생된 데 이어, 24일에는 알렉스 프레티가 국경순찰대 총격을 받고 이민단속 반대시위 현장에서 희생됐다.
프레티의 경우에는, 연방 요원들에 의해 제압돼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 여러 발의 총격을 받았다. 27일에는 LA 동쪽 애리조나주에서 이민단속요원의 총격으로 1명이 중태에 빠지는 참사가 또다시 발생했다.
미국에서 종종 들려오는 이런 참상들은 시민을 적군으로 간주하고 이들에게 '전투 모드'를 취하는 미국의 시위 진압 방식이 초래한 현상이다. 현장의 진압요원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궁극적 원인은 이 나라의 전통적인 시위 진압 시스템에 내재한다.
파업 노동자를 적군으로 간주한 미국 정부
<역사문제연구> 2021년 제45호에 수록된 권혁은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의 논문 '5·18항쟁기 시위 진압의 기원'은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미군은 시위자들을 공공의 적으로 인식했다"라며 "시위진압 교리도 본질적으로 전투교리의 일종"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살상력의 사용 또한 일반적이었다"라고 지적한다.
시위에 대한 과잉진압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었지만, 군대가 자국민을 적으로 간주하고 전투 대형을 갖추는 방식은 미국에서 발달했다. 위 논문은 그 시작이 "20세기 초"였다고 말한다.
1869년 5월 10일, 대륙횡단철도가 미국에서 완공됐다. 이는 미국의 산업 발달을 추동하는 한편, 철도 재벌과 국가권력의 연대를 조장했다. 이 때문에 철도 개발로 인한 혜택의 공유에서 소외된 철도 노동자들은 전국적 단결을 모색하게 됐다.
1877년에 워싱턴 DC 서쪽에 인접한 웨스트버지니아주의 철도 노동자들은 연이은 임금 삭감에 맞서 저항운동을 벌였다. <동국사학> 2024년 제80집에 실린 오영인 평택대학교 교수의 논문 '1920년대 미국 노동운동과 혁신주의의 어긋난 조우'는 1877년 당시의 노동운동이 대규모로 확산되자 "주지사는 400명의 민병대를 투입하며 총검으로 위협했다"라고 설명한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총상으로 목숨을 잃는 것이나 배고파서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나 매한가지"라며 한층 강하게 투쟁했고, 이로 인해 웨스트버지니아와 북쪽으로 인접한 펜실베이니아주, 워싱턴 DC와 북쪽으로 인접한 메릴랜드주, 그리고 메릴랜드 동북쪽인 뉴욕으로 철도 파업이 번져갔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즉각적으로 연방군을 투입하여 파업을 종결시켰다"라며 "100명의 사상자와 1만 명의 노동자들이 체포"됐다고 논문은 말한다.
1894년의 풀먼객차회사(Pullman Palace Car Company) 파업 때는 27개 주에서 25만 명 이상이 동참했다. 이로 인해 미국 대륙의 4분의 3 정도를 망라하는 디트로이트 서쪽의 철도 물류가 모두 마비됐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연방군 2천5백 명을 파견하여 파업을 진압했다"라고 논문은 말한다.
미국 국가권력은 파업 노동자들을 적군과 다름없이 취급했다. 이런 태도가 당시의 언론 기사에도 투영됐다. 풀먼객차회사 파업을 주도한 유진 뎁스는 <뉴욕타임스> 사설에서 "인류의 적이자 위험한 범죄자"로 지목됐다.
이처럼 미국 산업의 핵심 기간시설인 대륙횡단철도를 배경으로 민중 저항이 거세질 때에 미국 정부는 군대를 투입해 인명 살상을 불사하는 진압작전을 감행했다. 이런 풍토 속에서 20세기 초부터 군대의 민간 시위 진압이 전투 방식으로 수행되는 시스템이 미국에서 발달했다.
미국 정부는 그렇게 체득한 '노하우'를 '동업자'들에게도 전수했다. 위의 <역사문제연구> 논문은 미국 전쟁부의 <야전교범 19-15 국내 소요(Field Manual 19-15 Domestic Disturbance)>를 거론하면서 이런 설명을 한다.
"주로 국내를 대상으로 했던 미군의 시위 진압 범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점령지와 미군 주둔지로까지 확대되었다. FM 19-15(1952)는 공식적으로 교범이 점령지와 미군 주둔지까지 적용된다고 밝히고 있다."
전·노가 미국에서 배운 전술의 정체

▲5.18민주화운동당시 계엄군이 시민들을 연행하고 있다. 1980.5.27
연합뉴스
1959년부터는 한국 장교들이 국비 지원을 받고 태평양을 건너가 그것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때 제1기로 배우고 돌아온 군인들이 전두환·노태우다.
<전두환 회고록> 제3권은 그가 결혼 5개월 뒤인 1959년 6월부터 11월까지 미국에서 유학한 일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나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포트브랙 기지에 있는 심리전 과정을 이수했다"라며 "미 육군 심리전 학교는 심리전 전문 훈련기관으로는 최고의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라고 평한다.
<노태우 회고록> 상권은 노태우가 결혼식 보름 뒤부터 위의 심리전 학교 코스를 밟게 됐다면서 "미국 유학은 전기 과정인 미국 육군 특수전학교와 후기 과정인 미국 육군 심리전학교 두 개의 과정으로 짜여 있었다"라고 기술한다.
육사 11기인 전·노가 미국에서 배운 특수전은 적국을 겨냥한 특수전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것은 '국내의 적'도 겨냥하는 것이었다. 한국 장교들이 미국에서 어떤 식으로 학습을 받았는지는 육사 14기로 1964년에 위의 특수전학교에 입학하고 박정희·전두환 정권하에서 특전사령부 정보참모, 제7공수여단장, 제1군단장 등을 역임한 문영일의 구술 회고에서도 확인된다.
위의 <역사문제연구>에 따르면, 문영일은 미국에서 대(對)폭동작전 수업을 들은 일을 설명하면서 "시민이 일으키는 폭동·소요도 다 포함"됐다고 말한다. 그는 미군 교관들이 시범을 보여주며 가르쳐준 민중 시위 대처법 중 하나를 아래와 같이 기억했다. 아래 내용은 논문에 적힌 대로다.
"해봤자 몇백 명, 몇천 명이 데모하고 나오는 거니까. 폭동이라고 하는 게. 처음 시작은 대세를 가지고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 딱 버티는 거예요."
"위압감으로 버티는 거예요. 조직적으로 대형을 딱 갖추어서 버티는 거예요. 그러면은 (데모대들이) 떠들고 할 거 아니에요? 아무 소리 안 하고 버티는 거예요. 그다음에는 정 안 되면은 칼을 꽂는 거예요. 총에다가. 대형을 갖추어서 한 발씩 한 발씩 나가는 거예요. 10보, 20보 나가면 그때부터는 보폭을 빨리 하는 거지. 하다가 이놈들이(데모대들이) 도망간다면 확 뛰어가는 거예요."
한국 시위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위 장면은 미군에서 수입된 것이다. 이런 학습이 1959년 이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후로는 한국 장교들을 미국에 불러서 가르쳤을 뿐이다. 그전에는 미군이 한국에서 직접 시위 진압 방식을 가르쳤다.
미군은 미군정기의 국방부인 통위부를 통해 그런 노하우를 전파했다. 위 논문은 "1948년 통위부 작전교육국에서 발행한 시위 진압 교범들이 미 전쟁부 야전교범(Field Manual 19-15 Domestic Disturbance)을 직역한 것이었으며, 1946년에 실시된 경비대 각 연대의 시위 진압 훈련 역시 해당 교범에 기초했다"고 설명한다.
박정희 집권기의 한일협정 반대투쟁 당시에도 한국군은 미군 교육자료를 토대로 '특별과외'를 받았다. "한일회담 반대운동 당시 한국군은 미군 교범에 바탕한 미군의 훈련교육 영상을 한국어로 더빙만 하여 교육에 활용했다"라고 논문은 말한다.
5·18 학살 때의 '충정훈련'도 미군에서 기원했다. "1980년 당시 시행되었던 충정훈련의 구성, 대형훈련-행동요령-진압장비사용법은 미군으로부터 유래"됐다며, 미국이 움직이는 유엔사령부가 1961년부터 한국군을 상대로 충정훈련을 실시했다고 논문은 말한다.
한국의 4·19혁명, 남베트남의 내전과 더불어 미일상호협력안보조약 체결을 반대하는 일본 민중의 안보 투쟁이 1960년에 발생한 데서도 확인되듯이, 1960년 무렵에는 전 세계 친미 진영에서 민중 반란이 많이 일어났다.
이런 현상 역시 미국의 냉전 전략에 지장을 초래했으므로, 미국은 친미 진영 민중에 대한 진압작전도 냉전 전략의 일환으로 취급하기 시작했다. 소련·중국과의 대결을 위주로 하는 냉전 전략 속에 '친미 국가 반정부 세력'에 대한 진압도 포함시켰던 것이다. 4·19혁명이 성사된 한국을 상대로 미군이 충정훈련을 실시한 것은 그런 배경 때문이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모범 국가로 불려 왔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잘 증명되고 있듯이 그것은 상당 부분은 껍데기다. 미국 민주주의가 진정으로 발달하지 못한 것은 자국민 시위대를 적군으로 간주하고 전투 대형을 갖추는 역사와 무관치 않다. 그런 문화가 한국 민주주의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