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1.26 17:03최종 업데이트 26.01.2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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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무총리를 지낸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5일 베트남에서 치료 중 별세했다고 민주평통이 밝혔다. 향년 73세. 사진은 1988년 3월 31일 제13대 총선에 출마한 관악구을 이해찬 평화민주당 후보가 유세하는 모습.연합뉴스

베트남 출장 중에 향년 74세로 별세한 이해찬 전 총리는 197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의 산증인이다. 그는 유신체제하에서 일어난 최초의 시위인 '10·2데모'의 주동자 중 하나다.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6월항쟁>은 "6월항쟁 기간 내내 어째서 그렇게 많은 학생들이 헌신적으로 잘 싸웠는지 그 원인과 배경을 알아보았다"라며 "유신체제에 대한 최초의 반대 시위였던 서울대 문리대의 1973년 10·2 데모"가 "한 가지 힌트"라고 말한다. 이런 언급에서도 나타나듯이 10·2 데모는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 학생들의 신념과 열정을 증명한 사건이었다.

교수가 되고 싶었던 이해찬, 그가 '운동권'이 된 이유

19세 때인 1971년에 서울대 섬유공학과에 입학했다가 그만두고 이듬해에 같은 대학 사회학과에 재입학한 이해찬은 10·2 데모 당시 2학년이었다. 이때의 역할과 관련해 <이해찬 회고록>은 이렇게 말한다.

"2학년들은 현장 동원을 맡았어요. 유인물 제작이나 다른 대학과 연계하는 일은 4학년들이 했고, 이근성 선배가 유인물 책임자였는데 나는 선배의 조수 역할도 했어요."

이해찬은 주임무인 현장 동원을 위해 자신이 듣는 강의를 활용했다. 수업 직전에 담당 교수에게 양해를 구한 그는 "유신을 빨리 종결시켜야 한다"는 일장연설을 해서 수강생 30~40명 중에 "열 명쯤"을 강의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잠시 뒤 그는 좀전의 일장연설을 무색하게 하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상황을 맞닥트렸다. 단 세 마디로 대규모 군중동원을 해내는 운동권 학생을 목격하게 됐다. 이해찬은 그 학생을 "어떤 녀석"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나갔는데 어떤 녀석이 도서관 앞에서 '불이야' 하고 막 소리를 지르고 있어. 그러니까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애들이 뛰어나와. 그때 플래카드 담당들이 그 앞에 딱 플래카드를 펼치니까 자연스럽게 시위대가 만들어졌어요. 그렇게 해서 200여 명이 갑자기 모인 거예요."

이날 시위 때 경찰에 쫓겨 대학로 인근의 서울대 담장을 넘다가 부상을 입은 그는 수배자 명단에 오르게 됐다. 그는 친구의 큰아버지가 운영하는 경기도 마석의 잣 농장에 숨어 지냈다.

이해찬이 모은 "열 명쯤"과 "불이야"를 외친 학생이 모은 200여 명을 포함해 총 500~600명이 10·2데모에 참여했다. 유신체제 선포 1년 뒤에 일어난 이 항쟁은 서울대 담장을 넘어 2개월간 전국 대학들로 퍼져나갔다. 상황이 일파만파 확산되자, 부담을 느낀 박정희는 결국 손을 들었다.

그해 12월 7일자 <경향신문> 톱기사는 "박정희 대통령은 7일 '지난 10월 2일부터 일부 학원에서 있었던 학원사태와 관련, 구속 학생들 전원을 즉시 석방하고 학칙에 의해 처벌된 학생들에 대해서도 그 처벌을 백지화하는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대통령이 이처럼 공식적으로 백기를 들었으니, 10·2데모는 학생들의 승리로 귀결됐다. 이를 기폭제로 해서 민주화투쟁이 한층 가열되고 그 결과로 1970년대 후반에 정권 내분이 일어나더니 박정희가 죽임을 당했다. 유신체제의 파국과 인과관계를 갖는 사건이므로. 한국 민주화운동사에서 10·2데모의 역사적 의의는 크다.

그런데 유신체제가 선포될 당시만 해도, 이해찬은 운동권 학생이 아니었다. 위 회고록에 따르면, 이때만 해도 그의 꿈은 "아주 착실한 교수"였다. 그런 그가 유신체제에 대한 제1격을 날리게 된 것은 그 자신의 신념과 의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버지의 영향에도 결정적으로 기인한다. 그를 민주화투쟁으로 내몬 직접적 요인은 아버지의 '선동'이었다.

유신체제가 선포된 1972년 10월 17일 저녁 7시부터 계엄포고령 제4호에 의해 전국 대학들이 강제 휴교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이해찬은 며칠 뒤 충남 청양의 집으로 가게 됐다. 그런데 집에 돌아간 첫날, 그는 아버지의 따끔한 충고를 들었다.

밥상에서 마주한 아버지는 "5, 6분 동안 일장 연설을" 했다. 아버지는 유신선포 직후의 학교 동향을 물어보더니, 학생들이 다들 집에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런 말을 했다.

"4·19가 일어난 지가 10년 밖에 안 됐다. 이렇게 학생들이 다 사라지면 그 4·19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아버지의 말씀은 충격을 줬다. 이해찬은 "너 왜 집에 왔느냐?"라는 질책으로 들렸다고 회고했다. 충격을 받은 이해찬은 다음날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짐을 싸 들고 대문을 나섰다. 그는 서울로 가서 운동권 학생들과 접촉한 뒤 한국문화연구회(한문연) 서클 활동 및 야학·농활 등을 하며 저항의 에너지를 충전했다. 그 에너지가 이듬해 10·2데모로 발산됐다.

반유신투쟁의 기폭제, 국무총리, 7선 의원...

이해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25일 베트남에서 치료 중 별세했다고 민주평통이 밝혔다. 향년 73세. 사진은 2025년 11월 열린 민주평통 수석부의장 취임식에 참석한 이해찬 수석부의장 모습.연합뉴스

이해찬은 자기 집을 "야당 집안"으로 평가했다. 할머니의 동생인 이상철은 이 집안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상철은 4·19혁명 뒤에 국회의원이 되고 장면 내각의 내무부장관이 됐다.

일본 주오대에서 유학한 아버지 이인용은 1950년대에 청양군의 '3선 면장'이었다. 이인용은 해방 이후에 면장대행 부면장을 지내다가 이해찬이 태어난 1952년에 간선 면장이 되고 1956년과 1959년에 직선 면장이 됐다. 직선 면장이 될 때 이인용은 야당 추천을 받았다. 1956년에 3선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절정의 권력을 누리던 시절에 그는 야당 지지를 기반으로 지방에서 '장기집권'을 했다.

이런 집안이기 때문에 일가친척들이 모이기만 하면 '박정희 험담'이 빠지지 않았다. 위 회고록은 "명절 같은 때 모이기만 하면 어른들이 박정희 욕을 했어요"라고 말한다. 이런 분위기가 이해찬의 민주화투쟁에도 영향을 끼쳤다. 덕분에 그는 일반적인 운동권 학생들과 달리 부모의 반대를 염려할 필요 없이 민주화투쟁에 집중할 수 있었다.

10·2데모로 정권의 주시를 받게 된 이해찬은 이 시위로 인한 처벌은 피했지만, 이듬해인 1974년에 박 정권이 조작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으로 체포돼 징역형을 받았다가 1년 만에 석방됐다.

그 뒤 재야인사들과 교류하며 번역과 출판 일을 병행한 그는 1980년에 복학했다가 조작사건인 김대중 내란음모에 연루돼 또다시 징역형을 살았다. 1982년에 석방된 뒤에는 직업적 운동가의 길로 나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황실장이 되어 1987년 6월항쟁의 최일선에 있었다.

6월항쟁 승리를 계기로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에 들어간 이해찬은 1988년 제13대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그 후 제18대를 제외하고 2016년 제20대 총선까지 7선을 기록했다. 그동안에 김대중 정부의 교육부장관도 되고 노무현 정부의 국무총리도 됐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8년에는 민주당 대표가 되어 제21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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