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1.25 17:55최종 업데이트 26.01.2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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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력과 관련된 세계사적 경향은 정치권력의 겸업이 계속 축소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대에는 정치가가 주술사도 겸했지만, 제정 분리로 인해 정치와 종교는 멀어졌다. 귀족 제도가 존재하던 시대에는 정치권력 보유자인 귀족들이 경제권력까지 차지했지만, 프랑스혁명 이후로 부르주아계급이 성장하고 귀족들이 쇠퇴하면서 정치와 경제의 분리도 진행됐다.

이런 흐름을 감안하면, 종교세력이 정치권력을 갖거나 분점하는 것은 세계사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일이다. 아주 오래전에 제정 분리가 단행된 것은 제정일치나 정교유착이 유해하다는 경험적 판단에 기인한다.

그렇지만 종교의 정치 참여가 칭송받는 분야가 지금도 존재한다. 종교인들이 대중과 함께 정치권력 견제에 동참하는 일은 권장될 뿐 아니라 신성시되기도 한다. 세상의 칭송을 받는 이런 정치참여에서 모범을 보인 인물 중 하나가 윤형중 신부다. 그는 종교가 정치권력을 갖거나 이에 참여하는 형태가 아닌, 종교가 정치권력을 견제하는 형태의 정치운동에서 귀감이 됐다.

윤형중은 대한제국 때인 1903년에 충북 진천군 백곡면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가톨릭 명문가였다. <교회사 연구> 2019년 제54집에 실린 역사학자 박경연의 논문 '윤형중 신부의 순교정신과 순교자현양회'는 "5대째 가톨릭 교인의 집안"이었다며 "병인박해 때 순교한 윤자호의 후손"이라고 알려준다.

아버지 윤관병으로부터 기도문과 교리문답을 배운 윤형중은 일곱 살 때 경기도 안성에 소재한 안법학교에 진학했다. 학교가 위치한 지역인 '안성'과 학교 설립자인 앙투안 공베르 신부의 출신국인 '법국(法國, 프랑스)'에서 한 글자씩 따서 교명을 지은 보통학교였다.

가톨릭의 영향은 계속돼, 윤형중은 신학교를 상급 학교로 선택하게 됐다. 백과사전에는 1918년으로 표기돼 있지만, 위 논문에 따르면 "1917년 9월 15일" 그는 14세 나이로 서울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진학했다. 사제가 된 것은 27세 때인 1930년이다. 이때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보좌신부가 됐다.

그는 집필 활동에서 두각을 보였다. 1933년에 <가톨릭 청년> 창간에 참여해 글을 썼고, 가톨릭 기관지 역할을 하는 <경향잡지>의 편집도 도맡았다. 또 서적 출판으로도 교리 전파에 기여했다. 천주교 교리 요점을 상세히 해설해 1950년대에 펴낸 <상해 천주교 요리(詳解天主敎要理)>는 지금도 서점에서 판매된다.

이승만 정권을 '강도'에 빗대

윤형중 신부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1930년대에 시작된 집필 활동은 그가 해방 직후 <경향신문> 창간에 참여하는 단계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그는 독립운동가 이관술 등이 미군정이 조작한 조선정판사 위폐 사건에 연루되면서 주목을 받게 된 조선정판사를 인수해 대건인쇄소로 개칭하는 데 참여했다. 이를 토대로 1946년 10월 6일 <경향신문>이 창간됐다. 이때 그는 부사장이었다.

이 당시 <경향신문>의 논조와 관련해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한국현대 필화사> 제1권은 "<경향신문>은 좌우합작 추진과 친일파 청산을 유독 강조했지만, 정지용·염상섭의 동시 사퇴(1947.7.9.)를 고비로 논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기술한다.

정지용·염상섭이 사퇴한 뒤에 발행된 1947년 8월 17일 자 <경향신문>에 "본사 부사장 윤형중 신부"라는 표현이 나온다. 정·염 사퇴로 논조가 바뀐 뒤에도 부사장이었던 데서 느낄 수 있듯이, 윤형중은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진보·보수를 떠나 그는 불의한 것을 좌시하지 못했다. 그의 눈에 포착된 불의한 자는 경무대 주인이었다. 위의 <교회사 연구>는 "윤형중 신부는 당시 이승만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 '신문은 사회의 여론을 반영할 의무가 있다' 하여 사회 여론을 그대로 싣고자 하였다"고 기술한다.

1956년에 부정한 방법으로 3선을 관철시킨 이승만은 1960년에 4선을 이루기 위한 전초전으로 국가보안법 개정에 나섰다. 보안법 적용 대상을 확대하고 처벌을 강화하는 이 법을 통과시킬 목적으로 이승만 정권은 1958년 12월 24일 태권도·유도·검도 특기 경찰관들을 국회에 투입시켜 농성 중인 야당 의원들을 끌어내고 날치기 통과를 강행했다(2·4 파동).

16일 뒤인 1959년 1월 9일, <동아일보>에 윤형중의 소감이 실렸다. "민주당이 국회에서 농성하고 있던 것은 중대한 국사를 앞두고 자기 의사를 표시한 것"이라며 "그것을 트집잡아 강제로 몰아낸 것은 의원의 인권을 무시한 강도행위"라는 의견이었다. 반대세력을 국가보안법으로 좀 더 쉽게 엮고자 하는 이승만 정권을 '강도'에 빗댔던 것이다.

윤형중의 인생사에서는 '강도'라는 말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는 충북 진천에서 출생한 그가 경기도 안성에서 보통학교를 다니게 된 사연과도 관련된다. <교회사 연구>에 이런 대목이 있다.

"윤형중 신부에 의하면 넉넉했던 형편 탓에 강도가 자주 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일상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윤형중 신부가 여섯 살이 되던 해인 1908년에 안성 읍내로 이사하였다."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강도'는 자기 집에 자주 들르는 지긋지긋한 존재인 동시에 가족의 생명을 위협하는 두려운 존재였다. 그는 바로 그 '강도' 표현을 써가며 이승만 정권을 비판했다.

올바른 의미에서 종교의 정치참여

2020년 10월 28일 함세웅 신부가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 열린 '암흑 속의 횃불-참스승 윤형중 신부 추모 함세웅 신부 서예전' 기자간담회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연합뉴스

가톨릭은 제국주의의 세계 침략에서 첨병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히로히토 일왕의 신사참배도 공인하고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파시즘 폭정에도 협조했다. 가톨릭은 이에 대한 반성으로 교황 요한 23세의 주도하에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열어 과거에 대한 반성과 권위주의 청산, 세상과의 대화 등을 추구했다.

윤형중의 정치 비판은 가톨릭의 자성 움직임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로 이어지는 길목에서 전개됐다. 그 자신의 용기와 신념에 따른 것이자, 세계 가톨릭의 변화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윤형중이 지긋지긋해했던 그 '강도'는 위의 소감 표명 1년 뒤에 경무대에서 퇴거했다. 그러나 1년 뒤에 또 다른 '강도'가 군대를 이끌고 출현했다. 이승만은 4선 고지를 넘다가 1960년에 변을 당했지만, 이 강도는 그 허들을 여유 있게 뛰어넘었다. 이것이 1972년 유신체제의 시작이다.

그러자 저항 대열이 전방위적으로 형성됐다. 특히 종교인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가톨릭·개신교·불교 할 것 없었다. 1974년 9월 26일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된 것도 이런 흐름의 산물이다.

70줄에 들어선 윤형중도 이에 뛰어들었다. 그는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했다. <한국근현대사연구> 2002년 제22집에 실린 윤선자 전남대 강사의 논문 '유신체제하 범국민 민주화운동 선언문'은 "1974년 11월 27일 정계·학계·언론계·종교계·여성계·법조계·문인 등등 각계 인사 71명이 현 시국에 대한 견해를 모아 민주회복국민선언대회를 갖고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발족"시켰다고 한 뒤 "민주회복국민회의는 거의 모든 세력을 망라"했다고 설명한다.

국민회의의 지도자가 된 윤형중은 '강도 이승만'을 대하던 심정으로 박정희에게 "폭탄선언"을 날렸다. 1984년 4월 3일 자 <동아일보> '법에 사는 사람들 (21): 민주회복국민회의 시절 이병린 씨 (7)'는 윤형중의 박정희 비판을 그런 선언으로 표현하면서 이렇게 기술한다.

"첫 번째 상임대표위원이었던 윤형중 신부는 75년 1월 6일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유신헌법 개정과 박 정권의 퇴진을 요구, 파문을 일으켰다. 국민회의는 그달 14일 박 대통령이 연두기자회견에서 반정부활동을 비판하자, 다음날 즉각 반격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유신체제는 독재체제이며 부정체체이며 부패체제이며 특권층의 안보와 안일을 위한 특권체제이며 국민의 기본권을 빼앗는 탈권체제'라면서 '우리는 개헌에 앞서 비인간적인 권력집단의 퇴진을 먼저 요구한다'고 밝혔다."

윤형중은 올바른 의미에서 종교의 정치참여를 추진했다. 이런 모범적인 선례를 남긴 그는 유신체제가 망하는 해인 1979년 6월 15일 하늘로 올라갔다. 이때 그의 두 눈은 지상에 남겨졌다. 이틀 뒤 <조선일보>에 이런 기사가 실렸다.

"76세를 일기로 타계한 윤 신부는 12년 전인 67년 4월 서울성모병원에 안구은행이 개설되자 제1호로 헌안(獻眼) 등록을 했고, 그가 남긴 사랑으로 농업경제학자인 장현규 전북대학 대학원장과 윤석원 씨(상업)가 눈을 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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