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초기 정착지 기념비2012년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가 바슈토베 마을에 세운 기념비. 왼쪽에 한글로 “이곳은 원동(극동)에서 강제이주된 고려인들이 1937년 10월 9일부터 1938년 4월 10일까지 토굴을 짓고 살았던 초기 정착지이다”라고 적어놓았다. 맨 오른쪽에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을 기념하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이희용
고려인들은 악몽 같은 첫해 겨울을 견뎌내고 봄을 맞았다. 물길을 내고 땅을 갈아 논을 만든 뒤 연해주에서부터 소중하게 품고 온 볍씨를 뿌려 쌀농사를 지었다. 환경은 낯설고 변변한 농기구도 없었지만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김병화는 처음에 신작로 콜호스(집단농장)에 배치돼 고려인 퇴역 군인들로 구성된 건설대 책임자로 일했다. 여기서 탁월한 실적을 올리자 우즈베키스탄 당위원회 추천을 받아 1940년 북극성 콜호스 회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군인 출신이면서도 성품이 온화하고 남의 말을 잘 들어주었다. 불만이나 이견이 있으면 누구라도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목표는 높고 규율은 엄했지만 회장이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고 사심 없이 업무를 처리하니 모두 믿고 따랐다.
북극성은 해마다 중앙아시아 평균의 갑절을 넘는 수확량을 기록했다. 잉여농산물이 생기자 마을회관, 도서관, 학교, 병원, 발전소 등을 지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해 19~50세 남자 조합원이 모조리 노동대에 징집됐는데도 오히려 경작 면적과 수확량을 늘리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1943년에는 전 조합원이 모은 240만 1400루블을 비행기 제작비용에 헌납했다.
소련 당국의 방침에 따라 1940년대 중반부터는 논을 목화밭으로 바꿔나갔다. 1950년대 중앙아시아 목화 평균 수확량이 헥타르당 20.4㎏이었는데 북극성은 48.2㎏이었다. 그 공로로 1948년 김병화는 사회주의노동영웅으로 선정돼 레닌 훈장과 '낫과 망치' 메달을 받았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고려인은 201명이다. 고려인 전체 인구가 44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압도적으로 높은 비율이다. 타지크인과 타타르인도 250명과 210명의 노동영웅을 배출했지만 이들 민족의 인구는 각각 250만 명과 600만 명에 이른다.
고려인 콜호스 가운데서도 북극성은 단연 돋보인다. 1949년부터 1957년까지 노동영웅이 무려 26명이나 나왔다. 김병화는 1951년에도 사회주의노동영웅의 영예를 안았다. 두 차례 이상 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사례는 소련을 통틀어 65명에 불과하다.
김병화는 1952년 우즈베크인들이 운영하던 아훈바바예바 콜호스와 쿠칠릭 콜호스를 합병했다.당국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라 우즈베크인들이 요청해 이뤄진 것이다. 김병화의 지도력과 북극성의 농업 기술은 그만큼 정평이 나 있었다.
1961년에는 우즈베키스탄 최고회의 대표와 최고회의 농업위원으로 선출되고 레닌 훈장과 10월혁명 훈장을 받았다. 소련 최고지도자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베트남의 호치민 주석 등도 북극성을 찾아 김병화를 만났다.
김병화는 1974년 5월 7일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숱한 기록에 34년간의 콜호스 회장 재임 기록도 추가됐다. 우즈베키스탄 당국은 북극성 콜호스를 김병화 콜호스로 개명하고 타슈켄트에 김병화 거리도 조성했다. 김병화 고등학교도 생겨났다.
소련 해체로 또다시 시련 맞은 고려인

▲고려인 독립운동 기념비경기도 안산시 화랑유원지에 세워진 고려인 독립운동 기념비. 안산시, 사단법인 너머, 대한고려인협회가 공동으로 건립해 2025년 4월 4일 제막식을 진행했다.
이희용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된 뒤 러시아 최고회의는 1993년 4월 '러시아 고려인 명예회복에 관한 법'을 통과시켜 강제이주가 불법적 조치였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은 고려인에게 새로운 시련으로 다가왔다. 각국에 민족주의가 대두하며 이민족에 대한 차별이 늘어난 것이다.
특히 러시아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삼아오다가 나라마다 우즈베크어·카자흐어·키르기스어 등 민족어를 복수 공용어로 채택함에 따라 러시아어밖에 할 줄 모르는 고려인들은 공무원이나 교사 등 각종 공직에서 밀려났다. 연해주로 재이주하거나 한국으로 귀환하는 행렬을 부추겼다.
콜호스도 해체됐다. 그렇지 않아도 젊은이들이 도시로 빠져나가던 터에 우즈베키스탄을 떠나는 고려인이 늘어나자 공동체가 해체 위기에 놓였다. 당국은 소련 통치의 유산을 극복하겠다며 김병화 농장 이름마저 용우치콜리 농장으로 바꿨다. 김병화 거리와 김병화 고등학교도 사라졌다. 10평 남짓한 김병화 박물관에도 찾는 이의 발길이 뜸해졌다.
2025년 기준 CIS 동포는 우즈베키스탄 17만 5338명, 카자흐스탄 12만 2554명, 러시아 11만 3042명, 키르기스스탄 1만8434명, 우크라이나 1만 2800명, 투르크메니스탄 1167명 등 44만 4971명에 이른다.
지난해 말 기준 국내 체류 외국인 가운데 우즈베키스탄 국적자는 10만 2804명으로 중국·베트남·미국·태국에 이어 5위를 차지했다.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은 6만 6705명과 4만 3026명으로 각각 11위와 14위를 기록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고려인이다.
오는 29일은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수교 34주년 기념일이다. 우즈베키스탄의 고도(古都) 사마르칸트에는 아프로시아브 궁전벽화가 있다. 7세기 바르후만 왕의 즉위식에 참석한 각국의 축하 사절이 그려져 있는데, 깃털 달린 모자를 쓴 두 명은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된다.
▲아프로시아브 궁전벽화의 고구려 사신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아프로시아브 궁전벽화. 붉은색으로 표시한 두 인물이 고구려 사신으로 추정된다.
국가유산청
고구려 사신이 돌아간 뒤 1300년 만에 고려인들이 이곳에 끌려왔다. 김병화는 탁월한 지도력으로 농업 발전에 기여해 우즈베크인들에게 한민족의 존재감을 부각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뒤 후손들은 할아버지의 나라를 다시 찾고 있다.
관계는 끊어졌다가 이어지고, 인연은 새로운 인연을 낳는다. 고려인의 수난사와 김병화의 개인사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이고, 고려인 후손도 보듬어야 할 동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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