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관정쓰임을 다한 것인지, 관리되지 않은 마을 공동관정이 아직도 제 자리를 지킨 채 그 다음 쓰임을 기다리는 듯 덩그러이 서 있다. 그러나 그 주변을 무색하게 덮어버린 잡풀들로 인해 정겹지만, 이미 존재가 지워진 농촌의 풍경을 대신 말해준다.
이재필
조작 버튼 아래 자리한 셀프타이머는,
작동 시 붉은 눈처럼 깜박이는 작은 표시등을 켠다.
그 모습이 묘하게 귀여워,
터프한 외관 속에서 의외의 따뜻함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과장된 제스처도, 요란한 기계음도 없이,
묵묵히 자기 역할을 다하는 모습이 마음을 붙잡았다.
디자인은 포르셰에서 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일까.
불필요한 장식은 없지만, 선 하나하나가 명확하고 단단했다.
지금의 미니멀리즘보다도 고전적인 미학이 스며 있는 외관.
그것은 단순히 '예쁘다'가 아니라,
오랜 시간 곁에 두고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 안정감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외피를 놓아주지 않았다.
원래의 가죽 스킨은 가수분해되어 손끝에서 부스러져 내렸다.
나는 과감히 그것을 모두 걷어냈다.
드러난 금속 바디는 오히려 담백했고,
지금은 마스킹 테이프를 둘러 대강 감싸둔 상태다.
투박하지만 편안한 외모.
마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고 앉아 있는, 오래된 친구 같은 모습이다.
렌즈는 야시카 ML 28mm F2.8.
칼짜이즈는 아니지만,
묵직하고 차분한 색감이 은근히 중독적이다.
후지 필름을 끼웠을 때의 맑은 초록과,
코닥의 프로이미지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살빛이,
이 렌즈를 통해 그대로 필름 위에 내려앉는다.
파인더 안에서는 조리개와 셔터 속도가 정확히 표기되고,
노출값은 눈동자만 굴려도 읽힌다.
무게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
'산책에 좋은 친구'라는 표현이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실내 촬영에서도 흔들림 없는 결과물을 보여주는, 믿음직한 동행이다.
비소식에 떨어지는 감들, 안동의 노암 마을을 지켜주는 나무. 포토워크를 나가면 사람들은 묻는다.
"이건 무슨 카메라예요?"
요즘 보기 힘든 외형,
무게감 있는 셔터음,
그리고 그 속에서 태어나는 필름의 색감.
그 모든 것이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마을앞 나무거대한 나무를 피해 길을 낸 것처럼 직선이어야 할 도로는 위험하게 꺾여 있다. 그 시절의 길을 기억하듯, 우리는 그 나무를 통해 과거를 바라본다.
이재필
나는 그럴 때마다 웃으며 대답한다.
"오래된 친구예요."
그리고 속으로 덧붙인다.
"아마도, 나와 가장 잘 맞는 친구."
내가 처음 콘탁스를 알았을 때,
그건 꿈이었고, 허상이었고,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동경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친구는 내 손에 맞는 파트너가 되어 내 곁을 걷고 있다.
어릴 적 우러러만 보던 누군가와
어느 날 우연히 재회한 노년의 하루처럼.
"우리는, 원래부터 잘 맞았던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셔터를 눌렀다.
오늘도, 찌이익. 그리고 달~~칵.
▲여름 논가을을 기다리는 벼들이 아직은 푸른 청춘의 얼굴로 마을을 묵묵히 지켜 서 있다.
이재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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