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번대 서가꽃들의 향연
이인자
다음은 900번대 서가의 방으로 갔다. 서가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도심 한가운데 마련된 캠핑 공간 같았다. '잠시 멈춤'을 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자리였다. 서가 곳곳에는 미국 여행, 국내 여행, 유럽 여행 같은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그 표식들 덕분에 이곳에서는 길을 헤맬 필요가 없겠구나 싶었다.
손기정문화도서관은 1층과 2층이 전부였고, 규모가 큰 도서관은 아니었다. 요즘의 복합 문화 공간 형 도서관들과 달리, 이곳은 도서관의 본질인 '책'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서가에 비해 책이 유난히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꽉 찬 서가의 밀도는 예사롭지 않았다. 신간 몇백 권만 들어와도 금세 자리가 모자라질 것처럼 보였다.
도서관에서 일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곧 밀려나야 할 책들의 운명은 왠지 모르게 서글프다. 맨 아래 칸에 꽂힌 책들은 또 어떤가. 누군가 일부러 무릎을 꿇거나, 검색대 위에서 한 번 더 떠올려지지 않는다면 대출 되어 나갈 확률은 급격히 낮아진다. 매일 쏟아지는 신간의 전쟁 속에서, 한 권의 책이 기억되고 대출 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존경스러운 일이다.
끝없이 달려야 했던 손기정을 기억하는 곳
손기정문화도서관이 있는 이곳은 한때 손기정 선수가 다녔던 양정고등보통학교가 있던 자리였다. 도서관 옆에는 손기정 기념관과 손기정 체육공원이 함께 있었다. 기념관 입구에는 손기정 선수의 국적 정정을 위한 서명 운동 안내문이 놓여 있었다. 지금도 올림픽 기록에는 손기정이 아닌 '기태이 손', 국적은 일본으로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와 서가를 바라보았다. 손기정 기념관을 다녀온 뒤라서인지, 곡선으로 그려진 서가의 모습이 마라톤 트랙과도 닮아 보였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며 이어지는 그 곡선은 42.195킬로미터를 달린 마라토너 '손기정'의 시간과도 닮았었다. 국적을 빼앗긴 채 달려야 했던 청년에게 그것은 버티고 견디며 끝까지 자기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곡선의 서가마라톤 서가
이인자
이 도서관에서 나는 '다독'을 택했다. 읽고 싶은 책들을 테이블 위에 잔뜩 펼쳐 놓았다. 그날 내 마음의 온도를 가장 따뜻하게 올려준 책은<은혜씨의 포옹>이었다. 정은혜 작가가 tvN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연기한 영희의 얼굴이 겹쳤다. 읽는 내내 몸과 마음이 천천히 데워졌다. 얼마 전부터 읽고 싶었던 이병률 시인의 <좋아서 그래>도 읽었다. 여행 에세이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천천히 음미하면서 배워보고도 싶었다. 시인의 젊었던 시절의 감각도 좋았지만, 중년이 되어 더 깊어진 감각도 참 좋구나 싶었다.
정수기의 물을 마시려 했는데 종이컵이 보이지 않았다. 안내문을 보니 일회용 종이컵을 비치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했으나 말로만 환경 보호를 이야기해 온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도서관 여행자의 기본인 텀블러를 챙겨오지 않은 건, 내 부주의였다(친구는 텀블러를 가져왔다).
▲친구와 읽은 책다독하는 날
이인자
누군가는 달리고, 누군가는 멈춰 선다
목이 마른 채로, 1층으로 내려갔다. 집으로 돌아갈 참이었다. 카페처럼 열린 로비에는 여전히 젊은 청년들이 가득했다. 각자의 자리에서 무언가에 몰두한 얼굴들이었다. 열람실이 따로 없는 이곳에서, 어쩌면 그 로비가 그들의 열람실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는 내일의 자립을 위해 오늘의 쾌락을 미루고 있었고, 누군가는 더 알고 싶어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어서 책과 노트를 채우고 있었다.
순간, 내 눈에는 그들이 모두 달리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100미터를 15초로 달리는 사람도, 18초로 달리는 사람도, 나처럼 22초로 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라톤에서 속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다만 각자의 속도로, 끝까지 잘 달리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달리는 그들을 뒤로하고 도서관 문을 나섰다. 달리는 그들과 달리, 중년의 나는 손기정문화도서관에서 잠시 멈춰 있었다. 숨이 한결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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