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1.28 06:52최종 업데이트 26.01.28 0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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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톤보리, 글리코상, 타코야키, 유니버설스튜디오, 우메다, 난바.... 오사카, 하면 연상되는 단어들입니다. 오사카라는 지명 뒤에 무슨 말이 가장 어울릴지 AI에게 물었더니 '여행'이라고 답을 합니다. 여기, 오사카 여행이 아닌 오사카살이를 시작한 특이한 중년 남성이 있습니다. 마천루가 즐비하고 네온사인과 휘황찬란한 불빛을 자랑하는 오사카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두리에서 오사카 주민으로 살아가는 중년 남성의 독거 일기를 시작합니다. 반년간 펼쳐질 좌충우돌, 실수 만발 오사카 생존기를 시작합니다.[기자말]
오사카부의 도요나카 경찰서 모습. 도요나카시는 오사카의 북쪽 지역에 있다. 경찰서는 외관부터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다.김용국

경찰서에 가본 적이 있는가.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경찰서는 일반인에게 중압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

게다가 나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일본 경찰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일본에 온 지 채 1주일이 되지 않았을 때. 법을 공부한 나로서는 진술거부권도, 변호사 조력을 받을 권리도 알고 있건만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지금 나에겐 법전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미사여구에 불과할 뿐.

그래, 내가 살인을 한 것도 아니고 설사 문제가 있더라도 추방밖에 더 되겠어. 불안한 마음을 심호흡으로 가다듬고 오사카부에 있는 도요나카 경찰서 민원실 문을 들어섰다. 안내하는 경찰이 나를 곱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본다.

도요나카 경찰서 민원실 내부 모습. 각종 민원창구가 있고, 사진상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왼쪽 편에는 별도로 분실물 접수 및 수령 창구가 있다.김용국

"저, 한국에서 며칠 전에 온 '김'이라고 합니다만."

서투른 일본말을 듣던 그는 다른 직원과 말을 나누더니 한쪽 편 창구로 손짓한다. 저기로 가라는 뜻이다. 창구에 갔더니 담당 직원은 인적 사항을 확인한 후 잠깐 기다리라고 한다. 10분쯤 지났을까. 그 직원은 손에 뭔가를 들고 창구 밖으로 나온다. 그 물건이 왠지 낯이 익다. 그래, 내 여권 지갑이다!

"누군가 이 지갑을 경찰서로 가져왔어요. 신분을 밝히지 않아서 우리도 누군지 알 수 없고, 사례금도 필요 없다고 했어요. 여권과 현금, 내용물이 다 맞나요?"

애타게 찾던 여권 지갑이 경찰서로 흘러가게 된 것이다. 지갑에는 비자가 발급된 여권과 현금 1만 엔(9만 3000원)까지 모두 그대로다. 마치 예전 추억의 프로그램인 <우정의 무대>에서 "무대 뒤의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가 틀림없습니다"라고 외치던 병사의 심정으로 씩씩하게 '하이'를 외쳤다. 그제야 경찰도 미소를 짓는다.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경찰서를 나왔다. 몸도 마음도 날 듯 가벼웠다. 분실물을 찾을 수 있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라던데, 그 말이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분실했다가 다시 찾은 여권과 지갑. 현금도 그대로 들어있었다. 지갑을 습득한 사람은 길거리에서 발견했다고 한다.김용국

지갑이 발견된 곳은 호타루가이케역 근처 길거리라고 했다. 경찰서와 숙소 중간쯤 되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전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호타루가이케의 선술집에서 혼자 맥주를 마시는데 한 중년 신사가 "한국 사람을 좋아한다"며 술을 계속 권했다. 옆자리로 오더니 급기야 2차로 단골 술집까지 데려갔다. 그는 한국에 심취했는지 술에 만취했는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자리를 파할 시점임을 깨달은 나는 양해를 구하고 겨우 자리를 빠져나와 밤늦게 걸어서 숙소로 돌아왔다. 그때 주머니에서 흘린 것이 분명하다. 나도 어지간히 취기가 올랐던 탓일지도 모른다.

분실물이 벌써 몇 번째인가. 이제 어지간한 물건은 잊어버려도 별 느낌이 없다. 결국 모두 돌아오긴 했지만. '정신 차려라, 인간아. 한국에서처럼 너를 도와줄 사람이 없어.'

이렇게 화려한 밤이라니

반고흐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고베 시립박물관김용국

분위기 전환이 필요했다. 예술적 소양이 도움이 될까 싶던 차, 스마트폰을 보다가 구미가 당기는 전시회 소식을 접했다. 고베 대지진(1995년) 30주년을 맞아 고베에서 반고흐 전시회를 열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고흐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다고?

1년 전쯤 한국에서도 예술의 전당에서 반고흐 전시회를 했던 적이 있다. 그때 대표 전시 작품은 <자화상>이었는데 이번 고베 전시에는 그 유명한 <밤의 카페테라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평생에 한 번 뿐일지도 모를 기회,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고베행 전철에 미니벨로를 싣고 간다. 일본은 전철에서 자전거를 휴대할 수 없기에 고육지책으로 접어서 가방에 넣었다. 한국에서 힘들게 가져온 자전거를 잘 활용하고 있다.김용국

며칠 후 인터넷 예약을 한 뒤 숙소에서 자전거를 타고 전철역으로, 다시 역에서 자전거를 접어 가방에 싣고(일본 전철은 자전거 탑승이 안 된다) 고베로 향했다. 생각보다 자전거가 무겁고 부피가 커서 살짝 후회됐다. '애물단지'를 굳이 들고 왔을까 싶었으나 도리가 없었다.

사전 예약이 무색하게도 전시회가 열리는 고베 시립박물관은 인산인해였다. 마침, 휴일인 성년의 날이라 더 그랬던 듯하다. 인내심을 갖고 인파에 몸을 실었다. 최대한 그림을 가까이서 보고자 제일 앞줄로 갔다. 모두 작품 감상에 빠진 탓인지 진도가 잘 나가지 않는다. 그래도 힘든 줄 모르고 하나씩 살펴본다. 실물을 보니 입체감이 느껴진다. 마치 배경 속 인물이 그림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고흐의 작품 속 인물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농민, 직공, 일하는 여성, 창녀, 군인처럼 평범한 사람들이다. 마음을 사로잡았던 작품이 있었다. 포플러나무 숲길을 여성이 걸어간다. 자세히 보니 한 손에 바구니가 들려있다. 아마도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리라. 해는 뉘엿뉘엿 지고, 어둑해진 길을 걸어가는 뒷모습이 한없이 무겁고 처량해 보인다. 바로 <해 질 녘 포플러나무 길>, 역시 대가는 다르구나.

<밤의 카페테라스> 앞에 몰려든 관람객들. 고베 시립박물관 반고흐 전시회에서 촬영이 허락된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작품에만 별도의 대기줄이 만들어져 있어서 따로 관람해야 했다.김용국
실제로 본 <밤의 카페테라스>3시간을 기다린 끝에 보게된 반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 실제로 눈앞에서 관람한 <밤의 카페테라스>는 한마디로 비현실적이었다.김용국

어느덧 2시간이 넘어섰다. 또다시 대기가 길어진다. 대작 <밤의 카페테라스>를 보기 위해선 별도로 줄을 서야 했다. 작품을 보는 일본인들은 마치 신사에서 절을 하듯 음미하고 사진을 찍는 '의식'을 행하고 있었다.

내 차례가 돌아왔다. 그런데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너무나 유명하고 눈에 익은 작품을 실제로 영접할 수 있다니 꿈처럼 느껴졌다. 이 그림은 밤하늘 풍경을 처음으로 화폭에 담은 작품으로 알려졌다. 이렇게 화려한 밤이라니.

이번 전시회에서 촬영이 허락된 작품은 이 작품과 자화상을 포함, 몇 점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스마트폰에 담고자 앞다투어 몰려들었다. 나 역시 그 대열에 끼어있었다. 마치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잡아두고 싶다는 생각에서였을까. 살아생전 고독하기만 했다던 고흐가 이 모습을 보고 있다면 어떤 감정일까.

'이제야 알 것 같아요'

자전거로 고베 시내에서 고베공항까지는 2개의 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자전거로 왕복하니 허기가 졌다.김용국

3시간이 지나서야 전시회장을 빠져나왔다. 이제 자전거 여행을 할 시간이다. 행선지는 고베공항. 꼭 한 번 자전거로 가보고 싶었던 코스이다. 고베 시내를 지나 고베대교, 고베 스카이브릿지까지 2개의 긴 다리를 건너야 한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반복해 드디어 공항에 도착했다. 오는 내내 바다 풍경을 감상하느라 힘든 줄도 몰랐다. 애물단지 같았던 자전거가 고맙게 느껴진다.

돌아가는 길은 만만치 않다. 어둑어둑해지고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더 늦기 전에 시내로 가야 한다. 스마트폰 지도를 나침반 삼아 페달을 밟으며 노래 <빈센트>를 떠올렸다. '이제야 나는 알 것 같아요. 당신이 내게 하려던 말을. 그리고 당신이 온전한 정신으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그들을 자유롭게 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항상 눈에 보이는 이익에 매달리고, 다른 사람의 평판에 좌우되는 삶을 좇아왔던 것은 아닌지. 쉰이 넘어서도 인생은 부끄럽기만 하다.

고베항 야경. 왼쪽이 고베시의 랜드마크인 고베포트타워이다.김용국
고베 포트타워에서 바라본 고베 시내 야경.김용국

어느덧 시내에 도착했다. 고베 랜드마크인 고베 포트타워에서 야경을 감상한 뒤 마지막으로 온천을 향한다. 조금만 가면 단돈 490엔(4500원)으로 이용할 수 있는 아사히 온천이 있다. 탕이 5개가 있어 번갈아 가며 담그니 몸이 노곤해진다. 인근의 유명한 온천인 아리마 온천과 같은 성분의 온천수를 사용한다고 한다(고베 여행자들에게 적극 추천).

집에 돌아오니 한밤중이다. 긴 하루였다. 전시회 관람에 자전거 여행에 녹초가 되었다. 저녁을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다. 가난한 집 제사 돌아오듯 왜 이렇게 자주 허기가 지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마음은 어느 때보다 한결 편안하다. 오사카에 살아도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다. 다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전철과 자전거로 고베나 교토 같은 곳을 손쉽게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랄까. 시간이 허락한다면 다음 주말은 교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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