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1.24 19:05최종 업데이트 26.01.24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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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서울동부지방법원 형사11부(재판장 강민호 부장판사)가 일본거점 국내침투 간첩단(통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당한 강을성씨에게 재심 무죄를 선고한 뒤, 자녀들이 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이날 재심 무죄 선고는 1976년 사형집행 50년 만의 일이다. 선대식

통일혁명당(통혁당) 재건위원회 사건으로 1974년에 체포되고 1976년에 사형집행당한 고 강을성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19일 서울동부지방법원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강민호)는 1976년 2월 10일 확정된 강을성 사형선고의 효력을 소멸시켰다.

1974년 11월의 언론 보도들에 따르면, 강을성은 40세의 육군본부 3급 군무원이었다. 서울 용산기지에서 근무하던 그 군무원이 관련된 이 사건의 밑바탕에는 재일교포사회와 박정희 정권의 반목이 깔려 있었다. 조총련과 박 정권의 문제가 아닌, 재일거류민단과 박 정권의 갈등이 저변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강을성 사건에 나오는 통혁당은 1968년의 중앙정보부 발표를 통해 우리 사회에 깊이 각인됐다. 경북·대구 지역 사회운동가인 김종태 등 158명으로 조직된 간첩단이 북한 대남사업총국 지령에 따라 통혁당을 조직하고 청년·학생·지식인 등을 포섭해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내용이 발표됐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종태 등 4인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훗날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집필하게 될 27세의 경제학자 신영복(1941~2016)은 이 사건에 연루돼 무기징역형을 받았다가 1988년 광복절 때 석방됐다. 서울대 재학 중에 통혁당에 포섭됐다는 혐의로 징역 3년형을 받은 고 박경호에 대한 서울고등법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는 보도가 2021년 7월 20일에 있었다. 징역 15년형을 받고 13년간 복역한 뒤 석방된 박성준(한명숙 전 총리 남편) 전 성공회대 교수에 대한 서울중앙지방법원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는 보도는 2022년 1월 28일에 있었다.

군무원이었던 강을성을 간첩으로 조작한 육군 보안사

통혁당 사건이 발표된 지 3년 뒤인 1971년에는 통혁당 재건위(일본거점 국내침투 간첩단) 사건이 발표됐다. 호남 지방에 암약하는 친북세력이 지하당을 조직해 적화통일을 기도했다고 발표된 이 사건으로 인해 11명이 검거됐다. 그러고 나서 3년 뒤에 육군보안사령부(국군방첩사령부의 전신)가 발표한 것이 강을성 재심에서 거론된 통혁당 재건위 사건이다.

중앙정보부나 육군보안사 같은 공안기관들의 입장에서는 1968년 통혁당 사건이 일종의 '히트작'이었다. 이전에 '대통령 각하'의 주목을 끌었던 것과 동일한 명칭의 사건을 만들어내는 일이 1971년에도 있었고 1974년에도 있었다. 애초에 중앙정보부가 발표했던 사건을 경쟁 기관인 육군보안사가 1974년에 '리바이벌'한 셈이다.

물론 1974년 사건이 1968년 사건과 완전히 똑같은 양상을 띤 것은 아니다. 1974년 사건에는 1970년대 공안사건의 패턴이 반영됐다. 이 사건에는 일본 땅과 재일교포 사회가 북한 대남활동의 루트로 등장했다. 1974년 11월 5일 자 <경향신문> 톱기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육군보안사령부는 5일 일본을 거점으로 거류민단을 이용, 국내의 정치·경제·사회·학원·군수·산업 분야에 침투를 기도한 재일거류민단 동경도(都) 본부 부단장 진두현(46)을 주범으로 한 대규모 간첩단 일당 18명을 지난달 10일 서울·광주 등지에서 일망타진, 이 중 간첩 8명을 포함한 13명을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했다고 발표했다."

조작이든 아니든 1970년대 간첩사건의 특징은 일본 땅이 우회 경로로 활용되는 일이 많았다는 점이다. 무장공비 김신조의 청와대 습격미수와 울진·삼척 무장공비침투 등으로 인해 1960년대 후반에 군사분계선 주변의 남북 긴장이 크게 고조된 데다가, 푸에블로호 나포(1968) 및 정찰기 EC-121 격추(1969)로 인해 군사분계선 주변의 북·미 긴장도 한층 팽팽해진 결과였다. 이로 인해 군사분계선을 통한 간첩 남파가 감소하면서 나타난 것이 '일본 우회'라는 신종 현상이다.

그것과 더불어 재일교포들의 박정희에 대한 저항도 1970년대 초반에 두드러졌다. 2007년에 발행된 국가정보원 진실위원회 보고서인 <과거와 대화, 미래의 성찰-학원·간첩 편 (VI)>은 "재일동포 청년들은 일찍부터 일본 사회의 민족적 차별을 몸으로 체험하다 보니 남다른 민족의식을 갖게 마련"이었다며 "이들은 군사독재 하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침탈당하는 조국의 현실에 분노하였으며, 특히 김대중 납치사건 이후 재일동포 청년층 내에는 반유신·반박정희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이런 분위기는 박 정권이 조총련이든 민단이든 재일교포사회에 대해 반감을 갖는 원인이 됐다. 일본을 우회하는 간첩이 증가하는 추세 속에서 박 정권이 재일교포들을 간첩으로 몰아세우는 현상이 이 시기에 부각됐다. 위 보고서는 재일교포 유학생간첩단 사건 피해자인 서준식이 1994년 11월에 쓴 '조작간첩사건과 일본 사회'에 나오는 다음 대목을 인용한다.

"조총련이나 간첩과는 애초에 관계없는 자유·진보 성향의 민단계 지식인들이 70~80년대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의 희생자가 되었다."

재일교포 진두현이 통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된 것도 '북한 대남활동의 일본 우회'와 더불어 '재일교포사회와 박 정권의 갈등'이라는 새로운 흐름 속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이처럼 재일교포가 주도했다는 쪽으로 시나리오가 작성된 공안사건에 육군 군무원 강을성이 핵심 인물로 등장했다. 그를 연루시키지 않더라도 간첩 사건은 얼마든지 조작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육군 보안사 입장에서는 그가 꼭 필요했다.

만약 중앙정보부가 이 사건을 기획했다면, 굳이 육본 군무원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육군보안사 사건이었다. 그래서 군대와 관련된 인물이 적어도 한둘은 있어야 했다. 이런 인물들을 연루시키지 않았다면, 당시의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청와대로 달려가 보안사의 월권을 하소연했을 수도 있다.

위 <경향신문> 기사에 등장하는 사건 관련자 18명 중에서 민단 부단장 진두현을 제외한 13명은 농민(조일록), 공업사 노동자(박석주), 기계회사 노동자(이동현), 식품회사 노동자(정순례), 서적판매행상(임춘호), 대학교수(안용섭·이영재), 부동산기업 이사(박기래), 부동산 중개인(최성일), 어업협동조합 소장(장사랑), 상업 종사자(서순자), 식품회사 대표(김태열), 식품회사 회장(박상순)이다.

나머지 넷은 무직(황경주), 직업 미표시(김순숙)와 더불어 군무원(강을성)과 육군 소령(이대봉)이다. 강을성과 이대봉이 없으면 육군 정보기관이 이 사건을 발표할 명분이 거의 없었다.

대한민국이 그에게 거듭 사죄해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도 지난 19일 자신의 X에 <오마이뉴스>의 강을성씨 재심 기사를 공유했다.연합뉴스

수사 과정에서 강을성의 '위상'은 매우 높아졌다. 억울하기는 하지만 몇 년 살다 나갈 수 있겠지 하는 희망조차 가질 수 없게 만드는 상황이 조성됐다. 위 신문 7면 하단에 따르면, 보안사는 그가 조선노동당에 입당했을 뿐 아니라 북에서 능력까지 인정받았다는 황당한 시나리오를 만들어냈다.

"74년 이후 북괴로부터 군사첩보공작원으로 진가를 인정받아 심도 있는 첩보 수집" 중이었다는 것이 보안사의 발표로 언론에 보도된 내용이다. 육본에 출퇴근하는 샐러리맨에게 '북괴로부터 진가를 인정받았다'는 엄청난 혐의를 뒤집어씌웠던 것이다.

육군보안사는 강을성이 무장반란도 기획했다는 각본을 짜냈다. 행정안전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전국 국가폭력 고문피해 실태조사 (2차)> 보고서는 "강을성은 군사반란을 꾀하였다는 어마어마한 죄목으로 군법회의에 회부"됐다고 알려준다. 이 보고서는 강을성이 총살형을 당했다고 말한다.

이달 19일 자 언론보도들에 따르면, 강을성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서울동부지법 재판부는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다"라며 "그 외에는 달리 인정할 증거도 없다"라고 판시했다. 수사 과정이 적법절차를 위반한 것은 고사하고, 당시 검찰이 제시한 증거가 너무 변변치 않았던 것이다. 보안사가 조작한 증거를 토대로 검사가 공소를 유지했으니 "부족하다"는 평이 나올 만도 했다.

재심에서 검찰은 무죄를 구형했다. 상소할 의사가 없음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런 데서도 느껴지듯이, 군사반란 혐의까지 씌우는 것은 너무 터무니없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일이 유신체제하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됐다. 박정희가 군림하던 그 시절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암흑시대였다.

이번 재심 판결의 의의가 크기는 하지만, 그 암흑 속에서 사형집행을 당한 희생자와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의 한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다. 금전 배상이 이뤄진다 해도 마찬가지다. 검찰의 무죄구형과 재판부의 무죄선고로 인해 당시의 사형선고가 효력을 잃게 됐지만, 이번 재심으로 인해 사형선고가 취소될 뿐이지 사형집행까지 취소되는 것은 아니다. 고 강을성과 유족의 한을 달래려면 대한민국이 거듭거듭 참회하고 사죄해도 모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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