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강 중부 사진한강의 난지도와, 여의도, 이촌 모래사장, 반포, 저자도의 모습. 지명은 필자가 적어넣음.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김천수 가공)
여의도는 한강의 퇴적 작용으로 오랜 세월 모래가 쌓여서 형성된 섬이다. 항공사진에 하얗게 보이는 곳이 모두 모래사장이다. 여의도의 절반은 그야말로 금빛 모래였다. 이 시절 여의도는 오늘날 여의도(87만 평)보다 3배 이상은 넓었다. 여의도 아래를 흐르는 샛강은 현재는 폭이 불과 20~30m지만, 당시만 해도 200~300m의 넓은 폭을 갖고 있었다. 양화진(마포구 합정동에 있던 나루) 가까이에는 밤섬이 뚜렷하고 수면 폭도 지금같이 넓지 않았다. 여의도 왼쪽에는 하얀 모래사장과 이어진 선유봉도 보인다.
선유봉은 조선 최고의 명승지였다. 오죽하면 신선이 노니는 봉우리라는 이름을 지었을까. 선유봉은 지금처럼 강 한가운데 고립된 섬이 아니었다. 고도 10km 높이에서 촬영한 모습임에도 봉우리의 형상이 뚜렷하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 시기 지도를 보면 봉우리 높이가 무려 52m에 달했다. 물론 공식 명칭도 '선유봉'이었다. 한강 명승지로 이름을 날렸던 선유봉은 일제 말부터 채석장으로 사용되다가, 1965년 양화대교(제2한강교)가 놓이면서 봉우리가 모조리 깎여 나갔다. 주변 모래마저 깡그리 파헤쳐지며 급기야 '섬(선유도)'으로 바뀌었다.
이촌 모래사장은 한눈에 봐도 용산기지(둔지산)와 맞먹는 크기였다(약 120만 평). 이곳은 조선 시대 한양도성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군인들이 각종 훈련과 진법을 익히던 대규모 훈련장이었다. 하얀 백사장에 그리 쓰여있지는 않지만, 역사 기록 속에는 <춘향전>의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갈 때 이곳을 지나갔다.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도 흰 모래사장을 걸으며 백의종군했다. 그뿐이랴! 정유재란 때 전황이 급박해지자, 명나라 장수 양호가 동작진으로 향할 때 임금 선조가 허둥지둥 좇아가며 우리의 국방을 기댔던 아픈 역사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눈썰미가 있는 독자라면 한강 모래사장을 가로지르는 한강다리가 처참히 끊겨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왜 그런지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다 안다.
현대에 들어와서 이촌 모래사장은 서울 시민들의 유원지로 또한 대규모 선거 유세장으로 활용되었다. 1956년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못 살겠다 갈아보자'며 30만 명의 청중을 불러 모은 그 역사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었다. 이 거대한 모래사장은 1968년부터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촌동 매립지가 조성되고 그 위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이촌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 되고자 120만 평의 광활한 모래사장은 단 한 톨의 모래도 남김없이 모든 것을 내주었다.
반포는 원래 한강이 흐르던 곳이었다.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굽이쳐 흐른다고 해 서릴 반(蟠), 개 포(浦)를 써 '반포(蟠浦, 서릿개)' 라 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훗날 한자 표기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반포(盤浦)로 바뀌었다. 1950년 서울 항공사진은 서리서리 굽이쳐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줄기를 잘 보여준다. 그 시절 한강 물줄기는 지금과는 너무도 달랐다. 저자도에서 강북 방향으로 흐르며 반포에서 크게 반원형을 그렸다. 그리고 여의도로 흘러갔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반포아파트 단지로 부르는 그곳 말이다. 믿기는가? 결국 반포는 한강 물길 위에 지어진 땅이라는 것을...
저자도는 중랑천이 한강과 만나면서 생긴 삼각주다. 바람이 나르고 오랜 시간 자연이 빚어낸 거대한 모래섬이었다. 예로부터 닥나무(楮)가 많아 저자도라고 불렀고, 나라의 태평과 민생의 안정을 위해 기우제를 지내던 신성한 장소였다. 조선 초 태종 이방원과 세종 이도가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려고 이종무를 전송했던 곳도 바로 여기였다. 태종은 장수들에게 활과 화살을 주면서 패하면 반드시 목을 칠 것이라고 했다(<세종실록>,1419.5.18) 저자도는 그날의 비장함을 지켜본 역사의 현장이었다. 저자도는 한강의 유량에 따라 섬의 크기가 달라지는 섬이었다. 1950년 저자도는 모래톱이 지금의 잠원동 일대까지 길게 뻗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정도 모래사장이면 오늘날 성수동부터 압구정동까지 주민들 모두의 휴식처로 삼아도 손색이 없겠다.
이렇게 드넓었던 모래섬 저자도는 1972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저자도를 파헤쳐 얻은 땅은 오늘날의 압구정이 되었다. 저자도는 압구정 현대아파트 주민들을 위해 섬 전체를 내주었다. 압구정 주민들은 혹 저자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조선 최고 권력가 한명회만 기억하는 건 아닐는지.
잃어버린 한강의 제 모습 되찾아야

▲서울 한강의 동부 사진.한강의 저자도와 잠실, 탄천, 성내천의 모습. 지명은 필자가 적어넣음.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김천수 가공)
잠실은 조선 시대 누에를 사육하던 곳이자 남한산성으로 가는 주요 길목이었다. 지금은 올림픽 주경기장과 롯데월드가 있는 뭍이지만, 원래 잠실은 잠실 섬, 부리도, 무동도로 세 개의 거대한 섬이었다. 놀랍게도 1950년 서울 항공사진은 잠실이 지금과 달리 섬이었음을 너무도 완벽히 보여준다. 상전벽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잠실의 규모 또한 원래 여의도 크기와 맞먹을 정도로 컸다(약 300여만 평). 북쪽 광나루에서 잠실로 흐르는 물줄기는 두 줄기로 갈라졌는데, 지금과 달리 북쪽(새내, 신천강)이 아니라 남쪽의 송파강이 본류였다. 병자호란의 역사적 무대인 그 송파강 말이다. 자세히 보면 굴욕의 현장 삼전도(나루)도 볼 수 있다. 송파강은 1971년 매립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지금은 석촌호수의 형태로 무늬만 어렴풋이 남아있다. 하지만 수천 년을 흘렀던 한강의 본류 송파강은 이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강과 오랜 시간 벗하며 형성된 그 많던 백사장의 모래와 섬들 또한 기억 속에서 잊힌 지 오래다.
잠실에서 시선을 아래로 돌리면 마치 목마른 지렁이가 한강 물을 향해 꿈틀꿈틀 기어가는 듯한 탄천(숯내)이 보인다. 탄천은 용인에서 발원하여 성남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가는 35km에 이르는 긴 하천이다. 항공사진 속 탄천의 저 유려한 곡선은 수천, 수만 년의 세월이 빚은 한 편의 예술 작품이 아닐까 생각된다. 1950년 항공사진 속 구불구불한 모습의 탄천은 1970~80년대 잠실 개발로 원래의 모습은 완전히 소멸되고 직강화된 채, 오늘날 한강으로 흐른다. 앞서 송파강은 그 존재와 이름마저 모조리 사라졌다. 하지만, 탄천은 이름이라도 남아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혹 눈 밝은 분들은 두드러진 탄천의 모습과는 달리, 송파강으로 다소곳이 흐르는 양재천 물줄기도 볼 수 있다. 양재천은 관악산에서 물줄기가 시작되는데 한양과 삼남 지방을 이어주는 양재역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고산자 김정호가 새긴 <대동여지도>에는 학이 놀던 여울이라는 뜻에서 '학탄(鶴灘, 학여울)'이라고도 했다. 양재천은 지금은 탄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류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틀렸다는 얘기다. 1950년 항공사진을 보면 탄천과 양재천은 모두 송파강의 갈림내였다. 양재천 역시 잠실 개발로 수천 년간 송파강으로 이어지던 물줄기가 끊어지면서 탄천의 지류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자 이제 마지막 성내천이다. 성내천은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발원해 몽촌토성을 돌아 한강으로 흐른다. 백제의 왕성 풍납토성 안쪽 성내리라는 마을을 관통하는 물줄기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 성내천 또한 지금과는 달리 개발 전에는 송파강으로 흐르는 구불구불한 지류였다. 앞서 탄천을 엄마 지렁이에 비유한다면 성내천은 새끼 지렁이로 빗댈 수 있겠다. 하지만 이 새끼 지렁이(성내천)조차 한성 백제 2천 년의 역사를 품은 유구한 물줄기였음을 잊지 말자. 1970~80년대 개발의 시대를 거쳐 역사의 강 자연의 강 성내천의 원형은 완전히 소멸되고 오늘날 인공수로로 우리 곁에 남았다.
1950년 서울 항공사진을 통해 잃어버린 한강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한강의 역사는 곧 서울의 역사이자 우리의 오래된 미래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강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주었다. 이제 우리가 잃어버린 제 모습을 찾아주고 함께 보듬어 주어야 할 때다. 우리가 꿈꾸는 아름다운 한강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지금 우리의 현명한 선택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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