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에 버려진 가구보란 듯이 공원 한 복판에 버려진 가구. 대체 무엇에 대한 저항이고 시위일까?
고정희
그러나 그렇게 희망이 없지는 않다.
'코너링'이라는 것이 유행한 지 한 십 년쯤 된다. 젊은이들이 카페나 식당에서 만나지 않고 거리의 코너에서 만나 편의점 앞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는 것을 말한다. 우리 동네 파울루스 교회 앞 녹지가 좋은 예다. 저녁마다 수많은 젊은이가 교회 계단에 앉거나 날이 좋으면 잔디밭에 앉아 시간을 보낸다. 책을 읽기도 한다. 맞은편 상점들은 활기를 띠지만, 신기하게도 이들이 떠난 자리엔 쓰레기가 하나도 없다.
결국 쓰레기 투척은 인식과 심리의 문제라는 증거다. 이들을 내쫓지 않고, 들어와 예배보라고 강요하지 않고, 그 대신 꽃밭을 만들어 주고 음악회 등 행사를 열어 포용하는 여성 목사님의 부드러운 리더십이 이들의 자발적인 시민 의식을 끌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규정을 많이 만들고 벌금을 높일수록 저항하고 싶어진다. 거리에 CCTV가 없는 도시이기 때문에 자율에 맡기는데 그 자율이 어려운가 보다. 통제를 원하나? 한 번은 장벽 공원에서 또다시 넘치는 쓰레기통을 목격하고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다가오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며 빈 햄버거 포장과 플라스틱 컵을 쓰레기 더미 위에 던졌다.
저항할 '건더기'가 없는 세대의 문제
몇 년 전에 목격한, 소위 말하는 68세대 어머니와 딸의 대화가 떠 오른다. 많은 것을 시사하는 대화였다. 사회 혁신 세대의 일원 임을 자부하는 어머니의 핀잔에 딸은 대답했다.
"너희들은 투쟁도 안 하니?"
"엄마 세대가 부족함 없는 세상을 만들어 줬는데, 대체 뭐에 저항해서 투쟁하라는 거야?"
어쩌면 오늘날 거리에 쓰레기를 던지는 행위는, 완벽하게 정돈된 기성세대의 질서와 부족한 것 없는 복지 사회에서 저항할 '진짜 건더기'를 찾지 못한 이들의 비겁하고도 비극적인 반항일지도 모른다. 장벽 공원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며 컵을 던지던 청년의 눈빛은, 그저 존재감을 확인 받고 싶은 미성숙한 몸짓이었을 것이다.
▲베를린 시 청소차베를린 시 분리수거차. 옆에 쓰인 문구는 "이별이 언제나 아픈 것은 아녜요." 베를린 시 청소과는 유머러스한 홍보 문구로 유명하다. 그럼에도 무단 쓰레기 투척 현상을 막지는 못한다.
고정희
쓰레기를 버리는 것 이상의 저항을 꿈꾸며
베를린의 쓰레기 문제는 단순히 행정의 실패라고 볼 수 없다. 자기 쓰레기를 자기가 처리하는 것은 당연한 개인의 도리이지 행정의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어쩌면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는지를 묻는 철학적인 질문일 수 있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 없는 복지 사회에서의 삶이 정말 완벽한 걸까? 환경 보호를 외치며 다른 한편으론 쓰레기를 투척하는 '분절된 의식'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만은 많지만 뭐가 불만인지, 무엇을 개혁해야 하는지 신기루처럼 잡히지 않는다. 답답하다. 그래서 만만한 쓰레기가 내던짐을 당한다.
성숙한 사회란, 쓰레기를 버려서라도 저항해야 하는 사회가 아니라, 쓰레기를 집으로 가져가는 기초 상식 위에서 더 높은 수준의 가치를 논할 수 있는 사회다. 파울루스 교회 광장에서 보여준 희망이 베를린 전역으로 퍼져나가길 바란다. 이제 베를린은 그 '힙한 가면' 뒤에 숨겨진 악취를 인정하고, 쓰레기를 자유의 상징으로 여기는 착각에서 벗어나 깨끗한 거리에서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는 성숙한 저항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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