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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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해방과 더불어 여성해방을 위해서도 3·1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허다했기에, 이 사건 이후로 여성운동이 봇물 터지듯이 확산됐다. 이 물결의 선두에 올라섰던 인물 중 하나가 본명이 김원주(金元周)인 김일엽(金一葉)이다. 동학군이 일본군에 짓밟힌 이듬해인 1896년에 출생한 김일엽은 본명보다 아호가 훨씬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1896년 8월 4일에 13도제가 시행되면서 그의 출생지는 평안도 용강군에서 평안남도 용강군으로 바뀌었다. 향교 향장 출신인 김용겸의 딸로 태어난 그는 삼숭여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일본 에이와학교에서 수학했다. 아버지는 그가 열한 살 무렵에 기독교 목사가 됐다.
김일엽은 21세 되던 1917년부터 문인의 길을 걸었다. <근대문학> 2017년 제4호에 실린 서정자 초당대 명예교수의 기고문 '문학을 무기로 가부장사회와 맞선 거인들'은 1917년에 나혜석 소설 <부부>가 나오고 김명순 소설 <의심의 소녀>가 발간된 일을 환기시킨 뒤, "김일엽도 <여자계> 창간호에 단상과 수필을 실었다고 한다"라면서 "1917년에 한국 근대여성문학은 이 세 여성작가들로 하여 역사적 출발을 하였"다고 평가한다.
도쿄여자유학생학우회 기관지를 통해 그해에 등단한 것으로 보이는 김일엽은 1920년에는 여성잡지 <신여자>를 직접 창간했다. 또 동아일보사 문예부 기자로도 일하고 <불교>지 문화부장으로도 활동했다.
그가 '펜'을 들고 가장 강렬하게 써 내려간 것은 여성해방의 필요성이다. 위의 서정자 기고문에도 언급됐듯이 그의 외침 중 하나는 '처녀·비처녀의 개념을 양기(揚棄)하라'였다. 처녀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여성의 가치를 평가하는 봉건적 관념을 한편으로는 폐기하고 한편으로는 발전적 고양을 시켜 진정한 처녀의 길을 지향해야 한다고 그는 역설했다.
그런 외침 중 하나가 1927년 1월 8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나의 정조관'이라는 기고문이다. 여기서 그는 "재래의 정조관으로 말하면, 정조를 물질시하여 과거를 가진 여자의 사랑은 신선미가 업는 진부한 것으로 생각하여 왔습니다"라고 한 뒤 이제는 그런 관념을 폐기하자고 촉구했다.
그는 "사랑이 잇는 동안에만 정조가 잇습니다"라고 강조했다. 과거에 다른 사람과 사랑을 했었더라도 새로운 사람과의 사이에서 "새 생활을 창조할 만한 건전한 정신"이 있고 "단순하고 깨끗한 사랑을 새 상대자에게 밧칠 수가 잇다 하면" 이것이 바로 정조라고 그는 역설했다.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든 간에 지금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마음을 바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정조라는 것이 그의 메시지다. 요즘 세상에는 대단치 않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그가 이런 주장을 한 시점이 1920년대임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본인뿐 아니라 가족의 명운까지 걸지 않고는 이런 말을 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무분별한 연애를 부추긴 것은 아니다. 그는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말라고 권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는 말 한마듸를 입 밧게 내기까지에는 만흔 준비와 생각을 가지지 안흐면 아니될 줄로 압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온 마음을 다해 오로지 한 사람을 연모하는 상태가 이어지면 "언제든지 처녀성을 보전"하는 영구적 상태가 이어지는 것이라고 그는 해석했다. 전통적 관념의 처녀냐 아니냐가 여성의 일생을 좌우하던 시절이었으므로, 그의 글이 당시 여성들에게 얼마나 큰 충격을 줬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 여성운동에 참여했거나 그 영향을 받은 근대적인 신여성 혹은 신여자를 다소 폄하적으로 지칭하는 것이 '모던걸'이라는 영어 표현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상당수의 모던걸들이 단발머리를 했다고 해서 이들을 모단(毛斷)걸로도 불렀다. 신여성들이 심히 못마땅했던 기성세대는 이들을 못된걸로도 불렀다.
김일엽도 못된걸의 범주에 포함됐다. 그가 그처럼 따가운 시선을 맞닥트리면서까지 여성해방을 외친 것은 남성을 종속적 지위에 두기 위함이 아니었다.
'우리 신여자의 요구와 주장'이라는 유명한 글에서 그는 "모든 인습적 도덕을 타파하고 합리적 새도덕을 남녀의 성별에 제한되는 일이 없이 평등의 자유, 평등의 권리, 평등의 의무, 평등의 노작, 평등의 향략 중에서 자기발전을 수행하여 최선한 생활을 영위하고자 한다"라고 밝혔다. 여성만을 위한 여성해방이 아니라 "남녀의 성별에 제한되는 일이 없는" 진정한 의미의 성평등을 지향해야 한다고 당부한 것이다. 임시헌장 제3조에 나오는 '남녀 계급이 무한 일체 평등', 그래서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느 일방도 다른 쪽을 지배하지 않는 상태를 지향했던 것이다.
수덕사로 들어가다

▲충남 예산군 수덕사의 모습.
연합뉴스
불필요한 인습에 얽매이길 거부했던 김일엽은 아버지의 종교로부터도 자유로웠다. 그는 목사인 아버지의 종교를 버리고 부처의 제자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불교학보> 2015년 제72집에 실린 김광식 동국대 특임교수의 논문 '김일엽 불교의 재인식'은 "김일엽의 불교와의 인연은 일제하 불교계의 대표적인 잡지인 <불교>를 펴내던 불교사에서 1928년에 이루어졌다"라며 "불교사에서 불교 청년들을 만나고 그들에 대한 우호적인 인식이라는 배경에서 불교를 만났다"라고 한 뒤 "1929년에는 불교의 공부를 통해 불교를 종교 및 사상으로 수용하였다"고 기술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직업적 수행자의 길로도 들어섰다. 인터넷 백과사전에는 그가 1928년에 입산했다고 적혀 있지만, 위 논문은 1933년 후반 이후였다고 말한다. 37세가 넘은 나이에 비구니의 길로 나아갔던 것이다.
위 서정자 기고문은 "입산 후 절필(33년; 55년부터 다시 글을 발표)하기까지 시 45편, 소설 18편, 수필·평론·대담 50여 편 등 113편의 작품을 남겼다"고 정리한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로 항일진영과 진보진영이 위축되는 분위기 속에서 그가 잠정적인 절필을 택했던 것이다.
그의 출가를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지만, 본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가 수덕사의 기율을 담당하는 입승(入繩)스님일 때 발행된 1964년 4월 17일 자 <조선일보>에는 "입산은 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지 생으로부터의 탈주가 아닌 것"이라는 그의 말이 실려 있다.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래가 나온 해가 1965년이다. 이 시기에 그는 수덕사 스님으로 언론에 자주 보도됐다. 수덕사 관광을 안내하는 기사인 1962년 7월 27일 자 <동아일보> '수덕사 관광 코오스'는 "이곳에는 유명한 김일엽 여사가 30여 년 동안 기거"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반외세운동일 뿐 아니라 반봉건운동이기도 한 3·1운동을 계기로 이 땅의 여성들은 그동안 억눌렸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펜을 들고 나타난 김일엽은 여성해방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글을 세상에 널리 퍼트렸다. 그러다가 입산수도를 택한 뒤로는 오랫동안 수덕사 스님으로 '또 다른 생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충남 예산의 이 사찰에서 1971년에 입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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