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겨울나기일본 겨울을 나기 위해서 40년 만에 내복을 샀다. 털이 달린 실내화, 수면양말, 전기방석은 난방 도구가 아니라 생존 수단이다.
김용국
그런데도 뭣 모르고 한국에서 늘상 하던 대로 속옷 차림으로 잠자리에 들었으니. 바로 감기 증상이 왔다. 다음날 근 40년 만에 내복을 샀다. 40년 전엔 어머니의 강권(?) 때문이었지만 이번엔 오롯이 나의 건강 아니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 다음날엔 수면양말과 털이 달린 실내화를 샀다. 체면은 밥도 먹여주지 않고, 추위를 이겨주는 것도 아니었다.
지난해 말, 출국 직전 어느 후배가 사무실 대청소를 하다가 방치된 전기방석을 하나 발견했다. 일반 방석 2장을 합한 정도의 크기다. "혹시 필요할지 모르니 일본에 가져가라"는 후배에게 "이런 걸 어디 쓰냐고"고 핀잔을 주면서도 못 이기는 척 챙겨왔는데 지금 그 방석이 유일하게 온기를 느끼게 해주는 존재다.
난방은 에어컨을 온풍으로 트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아무리 오래 틀어도 방안이 훈훈해지는 일은 없다. 그저 냉기만 가시게 해줄 정도다. 공기도 건조해진다. 게다가 혼자 사는 방에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집에 들어오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우유를 데워서 마시는 걸로 하루를 마무리하고 침대에 눕는다. 이불을 덮는다. 이불 밖에 노출된 몸이 차게 느껴진다. 온몸을 이불 속으로 넣는다.
서울보다 추운 북쪽 파주에서 사느라 추위에 적응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냉골인 바닥에 맨발이 닿으면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난다.
40년 만에 생존을 위해 내복을 껴입다
믿기 어렵다고? 혹시 주위에 아는 일본인이나 장기간 일본에 산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붙잡고 물어보라. 어떻게 겨울을 나는지. 일본의 건물은 단열, 난방과는 거리가 멀다. 열효율을 따지기보다 건물이 지진에 어떻게 잘 버틸지, 습기가 차지 않고 공기가 잘 통할지를 중시한다.
하기야 겨울에 몇 차례 일본 여행을 왔지만 나 역시 추위를 거의 느끼지 못했다. 한국보다 따뜻한 날씨에 호텔이나 백화점, 상가 등은 난방을 '빵빵'하게 하니 추울 일이 없다. 설사 조금 춥더라도 며칠 머무는 여행객들에겐 그저 아름다운 추억일 뿐이다.
바닥은 찬데 공기만 데우는 방식의 난방은 효율성이 낮다. 일본 사람들이 방안에서 코타츠나 텐트, 전기 담요를 쓰는 것은 생존 수단이었음을 깨닫는다. 최근 지어진 일본의 고급주택은 이중창을 쓰고 단열재를 사용하는 식으로 난방을 강화한다지만 보통 집은 내가 사는 곳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싶다. 일본 사람들에게 추위를 호소해 보았지만 다들 웃으면서 공감을 표한다. 별 도리가 없지 않으냐는 반응이랄까.
교토에 사는 지인도 몇 년이 지나도 일본의 겨울이 적응되지 않기는 마찬가지란다. 내가 "겨울이 끝나는 2월까지는 잘 버텨보겠다"라고 하자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을 한다.
"3월까지도 일본 집은 추워요."
겨울은 따뜻한데, 방은 시베리아?

▲다카라즈카의 밤풍경일본 효고현 남동부에 있는 도시인 다카라즈카. 가극단이 유명하며, 아톰의 원작자인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도 여기에 있다. 숙소에서 전철로 그리 멀지 않은 곳이고 주변을 산책하기도 좋다. 일본의 겨울 추위는 내게 체력을 선물했다.
김용국
그러니까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낮아지는 10월부터 3월까지 반년 가까이 집에서 추위와 전쟁을 벌이는 곳이 일본이었다. 이렇게 해마다 겨울을 나는 일본인들이 새삼 존경스러워졌다. 보일러가 잠깐만 고장 나도 세상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과거의 나를 돌아본다.
알다시피, 일본의 겨울 날씨는 (삿포로 등을 제외하면) 한국보다 훨씬 따뜻하다. 그런데, 매일 아침마다 환기하려고 베란다 쪽 큰 창문을 활짝 열어도 아무 느낌이 없다. 바깥이나 방이나 온도차가 거의 없다는 뜻이다. 한국의 겨울과는 사뭇 다르다.
밖으로 나가보면 더 확연히 드러난다. 내가 생활한 12월 말부터 1월 중순 현재까지 한낮에 추위를 느낀 적이 거의 없다. 한국이라면 엄동설한이라는 표현이 걸맞겠지만 여긴 바람만 안 분다면 따뜻한 햇살 받으며 일광욕하기 좋은 날씨다.
방은 춥고 밖은 덥다. 이 말을 하는 나도 이해가 잘 가지 않지만 현실이 그렇다. 봄날을 만끽하다가 집에 돌아가면 시베리아 기후로 변하는 신기한 곳이 일본이다.
일본 추위가 내게 준 선물은

▲자전거로 고베공항까지자전거를 타고 고베 시내에서 고베공항까지 갔다. 다리를 2개나 지나는 길에서 보이는 드넓은 바다가 일품이었다.
김용국
추위를 견디려고 드라이기 바람을 쐬거나 물을 끓여서 수증기로 공기를 데워도 봤다. 다 헛짓이다. 결론은 자체 발열. 열심히 움직이고, 바깥 활동을 많이 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요즘엔 시간이 나기만 하면 움직인다. 운동을 싫어하는 내가 하루 평균 1만 5천 보는 기본이 되었다. 비행기에 싣고 끙끙대면서 가져올 때만 해도 애물단지 같았던 자전거는 훌륭한 교통수단이자 운동 도구가 되어주고 있다. 반경 10km 정도는 모두 걷기나 자전거로 해결하고 있다. 활동 반경도 넓어지고 근처의 명소도 다 파악되는 이점이 있다. 짧은 시간 동안 전망대, 공원, 폭포, 정원, 신사 등을 골고루 둘러보게 된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되고 있다. 일본 추위가 내게 준 선물은 체력과 인내였다. 방안 이불 밖은 시베리아지만 그래도 며칠 지나니 잠은 잘 온다. 새벽에 등이 시려 깨기 전까지는.
여권 지갑이 없다, 나를 증명할 수단이 없다

▲숙소에서 본 오사카대학숙소에서 바라본 오사카대학의 전경이다.
김용국
활동량이 많다 보니 이런저런 '사고'가 잦다. 주로 분실 사고다. 제일 먼저 잃어버린 건 집 열쇠다(일본은 아직도 열쇠를 사용하는 곳이 상당히 많다. 우리처럼 번호키를 쓰면 편할 텐데). 연구실 열쇠와 방 열쇠를 같이 두었는데 방 열쇠만 없다. 며칠간 문을 열어둔 채로 외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열쇠는 가방 한쪽 구석에 고이 숨어있었다.
한 번은 점퍼가 없어졌다. 어디에 벗어둔 걸까. 근처 식당에서 잊어버렸을까. 아니면 자전거로 갔던 전망대 아래에 벗어 놓고 그냥 온 걸까. 아니면 마트에서? 전날 동선을 따라가자면 한나절이 걸릴 것이다. 한숨부터 나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젯밤 마지막에 들렀던 대학 건물 휴게실에 들어가 봤다. 거기 의자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휴게실이 더워서 잠시 벗어두었는데 그대로 두고 나왔던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것도 잠시, 다음날엔 여권 지갑이 안 보인다. 이건 대형 사고다. 어디서 없어진 걸까. 집안을 탈탈 털었는데도 없다. 지갑엔 여권과 비자와 1만엔 권(10만 원) 현금이 들어있다. 전날 저녁, 걸어서 숙소 근처에 있는 선술집(이자카야)에 들렀다 돌아온 게 마지막인데.
내 신분을 확인해 줄 여권과 비자가 사라지다니. 이제 이곳에서 나를 증명할 수단이 없다. 혹시라도 불심검문을 당해서 "저 불법체류자 아닌데요"라고 하면 "아, 그러세요" 하면서 순순히 믿어줄 리가 없다. 나는 추방당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할까. 막막했다.
다음날 학교 행정실에 혹시 분실물을 찾을 수 있을지 문의를 하니 "사정은 딱하지만 우리는 수사기관이 아니다. 경찰에 신고하라"고 권했다. 숙소 관리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우선 파출소에 분실신고라도 하라고 조언했다.
문득, 대사관이 떠올랐다. 검색을 한 뒤에 주오사카 총영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영사관 직원은 "일단 좀 기다려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임시로 다시 여권을 만들 수는 있으나 그러면 기존의 여권은 설사 찾더라도 무효화되고, 어차피 일본 당국에 비자를 다시 받아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자고 했다. 다시 찾는 사람도 있다고 위로했다. 수긍이 갔다.
여권은 그렇다 치고, 비자는 어떻게 다시 발급받아야 할지,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막막했다(나중에 있었던 일이지만, 일본에서는 간단한 전입 신고를 하는데도 3시간 이상이 걸렸다). 지갑에 있는 돈만 챙기고 누군가 보이는 곳에 버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실의에 빠져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던 순간, 전화가 걸려 왔다. 일본 국번이 찍혔다. 일본에서 내 전화번호를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일단 받았다.
"여보세요, 아니 모시모시."
"김용국씨 되시죠?"
"예, 그런데요."
"경찰서로 좀 가셔야겠어요."
경찰서라니, 한국에서도 안 가본 경찰서를 왜 오사카에서.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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