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5월 30일 자 <동아일보> 기사 "진폐 못쟌은 위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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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5월 30일 자 <동아일보> 2면 헤드라인 제목은 '진폐 못쟌은 위폐'다. 이 제목처럼 경찰이 은행에서 갖고 나온 돈은 진짜 돈 못지않아 보였다. 다른 데도 아닌 은행에서 쓰던 돈을 갖고 나왔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은행에서 김창선이 골라주는 지폐를 갖고 나와야 했으니, 미군정 경찰이 12만 원 전체를 다 압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은행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위 신문의 5월 17일 자에 따르면, 5월 15일의 발표 현장에서 공개된 백 원권은 고작 아홉 장이었다.
<역사비평> 2016년 제114호에 실린 임성욱 한국외대 특임강의교수의 논문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의 재검토'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입수된 지폐는 33장이다. 이 논문은 "경찰은 조선공산당, 해방일보사, 조선정판사, 김창선의 집 등을 수색했지만, 어디에서도 위조지폐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 뒤 "100원권 12만 장이라는 엄청난 양의 위폐를 제조했는데도 단 1장의 위폐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사건의 진위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고 지적한다.
사건 수사가 그처럼 엉성하다 보니, 언론사들이 이래라저래라 훈수하기도 쉬웠다. 신문사 필진이 관찰자가 아닌 재판관 혹은 수사관 입장에서 사건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그해 7월 12일 미군정 사법부장으로 취임한 가인 김병로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김학준 인천대 이사장의 <가인 김병로 평전>은 "좌익계 언론은 물론 일부 중도계 언론도 동조하여 점점 '신문 재판'의 경향이 짙어졌다"고 당시 상황을 표현한다.
조선정판사 사건 수사는 엉터리
미군정 경찰은 위폐를 단 한 장도 스스로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하고 조선공산당에 포진한 항일운동가들을 탄압했다. 수사를 빨리 진행해야 할 급한 사정이 있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한 기관은 미군 방첩대(CIC)다. 이 점은 1946년 10월 22일에 있은 조재천 검사의 논고문에도 나타난다. 논고문 골자를 실은 그 날짜 <동아일보>에 따르면, 조재천은 "본 사건은 그 중대성에 비추어 CIC, 군정청 미국인 경무부장도 각각 조사"했다고 밝혔다.

▲1946년 10월 22일 자 <조선일보> 기사 "이관술에 무기 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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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도 CIC 요원이었다. 공정성을 기하기 힘든 이런 정보기관이 주도했으므로 사건 수사가 진실 규명으로 귀결되기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적어도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훌륭한' 것이었다. 이는 미국을 반대하는 정치세력을 남한에서 대거 약화시키는 명확한 성과를 도출했다. 정치학자인 김학준 이사장은 위 평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계기로 미군정과 좌익의 실력 대결은 본격화되어 좌익세력은 9월 파업, 대구폭동 또는 10월 인민항쟁 등 비합법 폭력투쟁으로 치달려가고 결국 11월 23일~24일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창당한다. 박헌영과 이강국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월북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따른 한국임시정부에 참여하려면 3상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데 남한 친미세력은 신탁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3상 회의에 반기를 들었다. 그랬기 때문에 3상 회의 결정사항을 집행하기 위한 미소공위에 힘이 실리게 되면 소련보다는 미국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구도 속에서 제1차 미소공위 휴회 기간에 조선정판사 사건이 일어났다. 미군 방첩대가 조급증을 느끼며 서두를 만한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한국현대민족운동 연구>는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 상태에 빠졌을 때 미군 CIC와 경찰, 하지 중장의 정치 브레인인 버치 중위 등은 좌익을 분열시키고 탄압하는 작업을 벌였다"면서 그런 작업의 일례로 정판사 사건을 거론한다. 그런 뒤 "이 사건은 정치적 사건으로 봐야" 한다며 "당시 검찰과 사법부의 간부들은 편파적으로 현상유지세력을 비호하고 현상변화세력에 제동을" 걸었다고 설명한다.
조선정판사 사건 수사는 엉터리였지만, 이 수사 결과는 미국의 군사력에 힘입어 진실로 둔갑했다. 이로 인해 진보진영이 탄압을 받으면서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는 환경이 조성됐다. 이관술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누명을 쓰고 변을 당한 것도 민족적 손실이었다.
조선정판사 사건이 한민족의 운명에 그처럼 큰 영향을 줬고 그 영향이 지금도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으므로, 이관술 재심만으로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끝내기는 어렵다. 한국 현대사에 큰 그림자를 남긴 사건이므로 보다 전방위적인 진상규명이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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