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1.18 10:42최종 업데이트 26.01.18 10:42
  • 본문듣기
한반도를 점령한 미·소 양국 군대는 자국에 유리한 정치세력을 확보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임시정부 수립 및 최장 5개년 신탁통치'가 결정된 뒤에는 더욱더 그랬다.

3상 회의 결정을 구체화하기 위해 1946년 3월 20일 개회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기 5월 6일부터 무기한 휴회에 들어간 것도 그 때문이다. 한국 내의 어떤 정당 혹은 단체와 더불어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할 것인가에 관한 공감대가 쉽사리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해 11월 7일에 나온 미군정 공보부 발표문에도 "미·소 양 대표 간에 있는 민주주의 정당과 단체와의 협의에 관한 의견 상위(相違)가 완전히 해결되지 안었다"라는 문구가 있다. 자국을 적대하는 세력이 임시정부를 주도하지 못하게 하려는 양국의 이해관계가 미소공위 결렬의 핵심 요인이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고민은 소련보다 깊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을 지지해야 한국임시정부에 자연스럽게 참여할 수 있는데, 남한 친미세력은 모스크바 3상 회의를 반대하며 반탁운동을 벌였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 한국 임시정부가 반미세력의 독무대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돌발한 사건이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이다. 남한 반미세력인 조선공산당이 조선정판사라는 인쇄시설에서 오늘날의 수십 억 원에 해당하는 당시 화폐 1200만 원(백원권 12만 장)을 위조했다는 사건이 그해 5월 15일 미군청정에 의해 발표됐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주모자로 몰렸던 이관술의 일제강점기 감시대상 인물 신상 카드, 1933년위키미디어 공용

이 사건은 79년 뒤인 2025년 12월 22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재심 판결에 의해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이날 서울중앙지법은 이 사건 주모자로 몰려 무기징역형을 받았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학살당한 독립운동가 이관술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유력한 증거인 피고인들의 자백이 불법구금하에서 이뤄져 증거의 가치가 없고, 제3자 진술이나 검증조서 혹은 압수물 역시 유죄의 증거로 채택하기 힘들다는 등의 이유에서였다.

이관술의 유·무죄에 관한 재심 재판이었지만, 다른 피고인들의 자백 역시 유죄의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나왔다. 그래서 이 재심은 조선정판사 사건 자체에 대한 재심의 의미도 일정 부분 띠었다고 볼 수 있다.

재심 공판에 나선 검찰 역시 작년 11월 15일에 무죄를 구형했다. 유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사건의 핵심인물인 이관술이 유죄라면 이를 입증할 당시의 수사자료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검사가 그런 이유로 무죄를 구형했다. 이 때문에 이 재심은 서울중앙지법 단계에서 최종 확정됐다.

찾아낸 위폐는 단 한 장도 없었다

대규모 마약조직이나 조폭단체를 일망타진했다는 보도와 함께 뉴스 화면에 자주 보이는 장면이 있다. 수사기관이 압수한 마약 실물이나 식칼·방망이 등이 시청자들의 눈앞에 증거로 제시된다.

백 원권 12만 장이 위조됐다는 조선정판사 사건 같은 경우에는 적어도 위폐 몇백 장 정도는 눈앞에 제시돼야 믿음이 생기게 된다. 그런데 미군정 수사기관은 그런 믿음을 주지 못했다. 그들이 스스로 찾아낸 위폐는 단 한 장도 없었다.

그래서 미군정 수사기관은 이관술과 함께 체포된 조선정판사 기술과장 김창선(당시 36세)에게 부탁했다. 이 장면은 이 사건 변호인인 백석황의 최후변론을 담은 1946년 11월 1일 자 <동아일보>에서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미군정 경찰은 김창선을 데리고 은행을 방문했다. 그런 뒤 "네가 만든 지페를 차저내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김창선이가 백원짜리 두 장을 차저"냈다고 위 신문은 전한다. 김창선이 골라낸 게 위폐였다면, 누가 골라냈든 간에 위폐가 발견된 그 현장을 의심해 보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미군정 경찰은 위폐의 출처로 조선정판사를 자신 있게 지목했다.

1946년 5월 30일 자 <동아일보> 기사 "진폐 못쟌은 위폐"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그해 5월 30일 자 <동아일보> 2면 헤드라인 제목은 '진폐 못쟌은 위폐'다. 이 제목처럼 경찰이 은행에서 갖고 나온 돈은 진짜 돈 못지않아 보였다. 다른 데도 아닌 은행에서 쓰던 돈을 갖고 나왔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은행에서 김창선이 골라주는 지폐를 갖고 나와야 했으니, 미군정 경찰이 12만 원 전체를 다 압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은행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위 신문의 5월 17일 자에 따르면, 5월 15일의 발표 현장에서 공개된 백 원권은 고작 아홉 장이었다.

<역사비평> 2016년 제114호에 실린 임성욱 한국외대 특임강의교수의 논문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의 재검토'에 따르면, 최종적으로 입수된 지폐는 33장이다. 이 논문은 "경찰은 조선공산당, 해방일보사, 조선정판사, 김창선의 집 등을 수색했지만, 어디에서도 위조지폐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 뒤 "100원권 12만 장이라는 엄청난 양의 위폐를 제조했는데도 단 1장의 위폐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사건의 진위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고 지적한다.

사건 수사가 그처럼 엉성하다 보니, 언론사들이 이래라저래라 훈수하기도 쉬웠다. 신문사 필진이 관찰자가 아닌 재판관 혹은 수사관 입장에서 사건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그해 7월 12일 미군정 사법부장으로 취임한 가인 김병로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김학준 인천대 이사장의 <가인 김병로 평전>은 "좌익계 언론은 물론 일부 중도계 언론도 동조하여 점점 '신문 재판'의 경향이 짙어졌다"고 당시 상황을 표현한다.

조선정판사 사건 수사는 엉터리

미군정 경찰은 위폐를 단 한 장도 스스로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도 사건을 대대적으로 발표하고 조선공산당에 포진한 항일운동가들을 탄압했다. 수사를 빨리 진행해야 할 급한 사정이 있었다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한 기관은 미군 방첩대(CIC)다. 이 점은 1946년 10월 22일에 있은 조재천 검사의 논고문에도 나타난다. 논고문 골자를 실은 그 날짜 <동아일보>에 따르면, 조재천은 "본 사건은 그 중대성에 비추어 CIC, 군정청 미국인 경무부장도 각각 조사"했다고 밝혔다.

1946년 10월 22일 자 <조선일보> 기사 "이관술에 무기 구형"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백범 김구 암살범인 안두희도 CIC 요원이었다. 공정성을 기하기 힘든 이런 정보기관이 주도했으므로 사건 수사가 진실 규명으로 귀결되기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적어도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훌륭한' 것이었다. 이는 미국을 반대하는 정치세력을 남한에서 대거 약화시키는 명확한 성과를 도출했다. 정치학자인 김학준 이사장은 위 평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을 계기로 미군정과 좌익의 실력 대결은 본격화되어 좌익세력은 9월 파업, 대구폭동 또는 10월 인민항쟁 등 비합법 폭력투쟁으로 치달려가고 결국 11월 23일~24일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창당한다. 박헌영과 이강국을 비롯한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월북한 것이 바로 이 무렵이다."

모스크바 3상 회의에 따른 한국임시정부에 참여하려면 3상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런데 남한 친미세력은 신탁통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3상 회의에 반기를 들었다. 그랬기 때문에 3상 회의 결정사항을 집행하기 위한 미소공위에 힘이 실리게 되면 소련보다는 미국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구도 속에서 제1차 미소공위 휴회 기간에 조선정판사 사건이 일어났다. 미군 방첩대가 조급증을 느끼며 서두를 만한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서중석 성균관대 명예교수의 <한국현대민족운동 연구>는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 상태에 빠졌을 때 미군 CIC와 경찰, 하지 중장의 정치 브레인인 버치 중위 등은 좌익을 분열시키고 탄압하는 작업을 벌였다"면서 그런 작업의 일례로 정판사 사건을 거론한다. 그런 뒤 "이 사건은 정치적 사건으로 봐야" 한다며 "당시 검찰과 사법부의 간부들은 편파적으로 현상유지세력을 비호하고 현상변화세력에 제동을" 걸었다고 설명한다.

조선정판사 사건 수사는 엉터리였지만, 이 수사 결과는 미국의 군사력에 힘입어 진실로 둔갑했다. 이로 인해 진보진영이 탄압을 받으면서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키는 환경이 조성됐다. 이관술 같은 독립운동가들이 누명을 쓰고 변을 당한 것도 민족적 손실이었다.

조선정판사 사건이 한민족의 운명에 그처럼 큰 영향을 줬고 그 영향이 지금도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으므로, 이관술 재심만으로 이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을 끝내기는 어렵다. 한국 현대사에 큰 그림자를 남긴 사건이므로 보다 전방위적인 진상규명이 필요한 일이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