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관군 합동 특별자문위원회 방첩·보안 재설계 분과위원회'의 홍현익 분과위원장이 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브리핑룸에서 방첩사 해체 방안 관련 발표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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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각인된 국군방첩사령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다. 국방부 민관군 합동특별자문위원회 '방첩·보안 재설계분과위원회'는 지난 8일 국방부 장관에게 방첩사령부의 발전적 해체를 권고했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홈페이지에 게시된 권고문에 따르면, 방첩사의 주요 기능인 안보 수사, 방첩정보 수집, 보안 감사, 동향 조사는 다른 기관에 이관되거나 아니면 폐지된다. 안보 수사 기능은 국방부 조사본부로, 방첩정보 수집은 신설될 가칭 국방안보정보원으로, 보안 감사는 신설될 가칭 중앙보안감사단으로 넘어간다. 정치적으로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킨 동향 조사 기능은 아예 폐지된다.
방첩사는 국군기무사령부로 불릴 때인 2017년에는 박근혜 탄핵 심판이 기각될 경우를 대비해 계엄령을 선포하는 계획을 추진했다. 이런 사실이 2018년에 밝혀져 그해 9월에 조직 개편을 당하면서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개칭됐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뒤인 2022년 11월부터 지금의 명칭으로 불린 방첩사는 또다시 민주주의에 도전해 12·3 내란에까지 관여했다. 내란 당시 방첩사령관인 여인형은 정치인 체포를 지시하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군 병력을 파견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촛불혁명 때의 일이 밝혀진 지 불과 6년 만에 윤석열 내란에 가담해 '빛의 혁명'의 레이저를 맞았다. 60년도 아니고 고작 6년 만에 또다시 국민적 응징을 받은 정보기관의 유사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민관군 합동자문위원회의 이번 권고에 관한 언론보도 중에는 방첩사 해체를 출범 49년 만의 사건으로 평가하는 기사도 있다. 3군 보안부대가 국군보안사령부로 통합된 때가 1977년이므로 이를 기준으로 하면 49년이 되지만, 1977년이 방첩사 탄생의 기준이 될 이유는 전혀 없다.
한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이 생각보다 크다
방첩사의 역사는 그보다 훨씬 길다. 보안사 시절의 방첩사가 범한 국가 폭력과 더불어 이 기관의 내력을 상세히 정리한 행정안전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전국 국가폭력 고문피해 실태조사 (2차)> 보고서는 "보안사령부는 대한관찰부와 특별정보대에서 시작되어 육군본부 정보국 방첩과, 육군본부 특무부대, 방첩대를 거쳐 보안사령부가 되었다"고 기술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심복인 김창룡의 존재와 함께 강하게 각인된 육군 특무부대는 방첩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김창룡 때의 기능이 보안사로 넘어가고 그것이 방첩사로 넘어갔다. 그러므로 이번 방첩사 해체 권고는 박정희 이래의 어두운 역사를 청산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그보다 훨씬 전부터 시작된 암울한 현대사를 정리하는 의미를 갖게 된다.
방첩사의 역사가 의외로 길다는 점과 더불어, 우리의 시선을 끌 만한 것은 이 기관이 한국 현대사에 끼친 영향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점이다. '한국 정보기관' 하면 흔히 중앙정보부를 떠올리지만, 방첩사의 영향은 중앙정보부를 명확히 초과한다. 이를 입증할 근거들은 매우 명확하다.
우선, 관련된 정권의 숫자부터가 더 많다. 중앙정보부는 5·16 쿠데타 직후의 박정희 군사정권하에서 창설됐지만, 방첩사의 역사는 이승만 정권은 물론이고 미군정과도 맞닿는다. 방첩사의 원형인 대한관찰부는 1948년 8·15 정부수립 이후에 활동을 개시했지만, 이승만과 함께 대한관찰부 창설을 주도한 쪽은 미군정이고 준비 작업이 진행된 시기도 미 군정기다.
정규진 북한지역개발연구소 연구원의 <한국 정보조직>은 미군정이 1948년 7월 중순에 대한관찰부 요원 60명을 선발해 6주 교육을 실시한 일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기술한다.
"이승만은 미군정, 한국 경찰고문과 수차에 걸쳐 회의를 갖고 조직의 명칭을 대한관찰부로 지칭하며 1948~1949년 회계연도 예산은 2억 3000만원을 책정하고 971CIC의 공문을 통해 971CIC 산하 모든 지구대장에게 앞으로 대한관찰부 요원들이 미 CIC의 임무를 인계받는다는 것을 통보하기로 합의했다."
주한미군 제24사단 방첩부대(CIC)의 임무를 승계한 것이 대한관찰부이고 이 기구의 정통성이 지금의 국군방첩사로 계승됐다. 한국 현대사에 등장하는 모든 정권과 관련을 맺었다는 점에서도 방첩사는 중앙정보부를 능가한다.
방첩사는 중앙정보부에 비해 역사만 긴 게 아니다. 인명 살상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정을 압도적으로 능가했다.
이승만 정권은 항일세력과 진보세력을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한 뒤, 이들을 국민보도연맹으로 묶어 감시했다. 그런 뒤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이때의 학살 희생자는 수만 내지 20만 정도로 추정된다.
그간 명칭을 많이 바꾼 방첩사

▲경기도 과천 소재 국군방첩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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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에 가담한 기관이 바로 방첩사의 전신이다. <사림> 2000년 제36호에 수록된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의 논문 '한국전쟁 전후 육군방첩대(CIC)의 조직과 활동'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방첩대는 이적·전복 행위의 우려가 있는 사상범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고 한 뒤 그 참상을 이렇게 알려준다.
"전국 곳곳의 보도연맹원 학살에는 거의 대부분 방첩대가 개입했다. 방첩대가 인민군에 밀려 후퇴하면서 또는 후방에서 서울·대전·부산·마산·대구·진주의 형무소 재소자를 학살하였다. 보도연맹원들을 체포·연행하고 학살을 집행할 때 방첩대원은 헌병이나 지역 경찰과 함께 행동했다. 방첩대는 타 기관에 대한 장악력을 바탕으로 보도연맹원 체포를 지시하거나 학살 명령을 내리는 핵심적 주체였다."
비슷한 설명은 위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보고서에도 나온다. 보고서는 "개전 초기 육군 정보국 방첩과(CIC)의 주요 업무는 보도연맹원 및 적색분자 처리를 포함한 후방지역 방첩이었다"고 설명한다.
적색분자로 규정된 반이승만세력에 대한 구체적 범죄행위와 관련해 이 보고서는 "육군본부 방첩과의 파견대, 사단 파견대, 분견대 등은 개전 초기 후퇴 과정에서 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등 예비검속자 처형을 지휘·명령하였다"고 기술한다.
5·16 이후의 중앙정보부도 인명 살상에 관여했지만, 방첩사의 살상은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 기관이 4·19혁명과 6월항쟁은 물론이고 촛불혁명 후에도 살아남았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방첩사는 그간 명칭을 많이 바꿨다. 그래서 이 기관의 역사가 정확히 언제 시작됐는지를 알기 어렵다. 만약 위와 같은 일들이 없었다면 이름을 자주 바꿀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대한관찰부 이래로 '대한군대'가 아닌 '대한국민'을 관찰하며 범죄를 많이 저질렀기에 '개명 신청'을 자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 할 듯하다.
당연한 언급이 되겠지만, 과거의 방첩사가 민간인 사찰 혹은 학살을 저지른 것은 그런 권한을 부여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정권과의 유착으로 인한 방첩사의 과도한 권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방첩사의 권한과 한계를 법으로 제한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이런 기구가 나타날 위험성은 방첩사가 해체된 후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민간인 사찰을 법으로 엄금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해낼 만한 조직과 예산을 갖고 있고 또 정치권력과의 유착이 가능한 경우에는 그런 위험성이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다. 민간 정보기관뿐 아니라 군사 정보기관에 대한 국민적 감시도 항상 일상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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