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1.12 17:40최종 업데이트 26.01.12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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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탄생’의 한 장면. 말을 탄 상복 차림의 모방 신부(토마스 프레데릭슨)가 조신철(이문식)과 함께 전도 여행에 나서고 있다. 민영화사 제공

지난해 성탄절을 맞아 12월 24~26일 tvN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사제 일대기를 담은 3부작 드라마 '청년 김대건'이 방송돼 관심을 모았다. 2022년 개봉된 박흥식 감독의 극장용 영화 <탄생>을 재편집한 것으로, 6부작 확장판도 OTT를 통해 조만간 선보일 예정이다. 2026년 병오년은 1846년 병오박해로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180주기다.

첫 한국인 천주교 신부를 탄생시킨 주역은 파리외방선교회 소속 피에르 필리에르 모방 신부다. 그는 로마 교황청이 우리나라에 파견한 최초의 서양인 신부이자 프랑스인 이주민 1호다. 올해는 한불 수교 140주년이자 모방 신부 입국 190주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 처음 온 사제, 임진왜란 종군한 세스페데스 신부

우리나라에 첫발을 디딘 천주교 사제는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에 종군한 스페인 출신의 세스페데스 신부다. 그러나 일본군을 상대로 사목 활동을 했다는 기록만 있을 뿐 조선인에게 선교한 정황은 찾을 수 없다.

그로부터 2세기 가까이 지난 1779년 우리나라에 천주교 공부 모임이 생겨났다. 모임 일원인 이승훈은 1784년 중국 북경 북천주당을 찾아가 세례를 받고 돌아와 주변 인물에게 세례를 주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꾸려졌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고 목자 없는 교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천주교 교리에 따르면 사제만이 세례를 제외한 각종 의식을 집전할 수 있어 교회법 위반이었다. 1790년 북경교구는 조선교회에 전례 금지령을 내리고 선교사 파송을 약속했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인과 용모가 비슷하면 비밀리에 활동하는 데 유리할 것으로 판단해 중국인 주문모를 최초의 조선 선교사로 임명했다.

주문모 신부는 1794년 입국해 신앙의 씨앗을 뿌리다가 1801년 신유박해로 처형돼 첫 외국인 천주교 순교자가 됐다. 신도들이 몰살하거나 숨어버려 암흑기가 찾아왔다. 하지만 조정의 혹독한 탄압은 천주교가 지식인 중심에서 상민과 천민들에게 확산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교황청은 1831년 9월 9일 북경교구에서 조선교구를 독립시키기로 하고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바르텔레미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마카오에서 만주까지 왔다가 국경 경비가 삼엄해 때를 기다리던 중 1835년 10월 20일 뇌내출혈로 선종했다.

모방이 꼽은 한국인 사제 후보 기준 4가지

로마 교황청이 파견한 선교사 1호이자 첫 프랑스 이주민인 모방 신부 초상화위키피디아

브뤼기에르와 함께 만주까지 따라온 신부가 모방이었다. 그는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시골 마을 바시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바이어교구 대신학교를 졸업하고 1829년 5월 13일 사제로 서품된 뒤 고향 인근 본당에서 보좌신부로 활동하다가 아시아 선교에 뜻을 두고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이듬해 중국 사천교구 선교사로 임명돼 마카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난 뒤 조선 선교사를 자원해 교황청 허락을 받았다. 브뤼기에르 주교가 병사하자 1836년 1월 12일 상복 차림에 삿갓을 쓰고 조신철의 안내를 받아 압록강을 건넜다. 모방 신부는 조선에 들어온 뒤에도 얼굴과 신분을 감추려고 늘 상복 차림으로 다녔다.

정약종 아들이자 정약용 조카인 정하상의 도움으로 서울 뒷골(중구 주교동)에 자리 잡고 경기도와 충청도 등지로도 전도에 나섰다. 통역을 대동했으나 한문에 능통해 필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누추한 움막에 살면서 잡곡밥과 산나물로 끼니를 때우느라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지만 신앙심으로 견뎌냈다.

조선식 이름은 나백다록(羅伯多祿)으로 백다록은 반석이란 뜻의 세례명 베드로를 음차한 표기다. 그의 헌신 덕분에 신유박해 직전 1만 명에서 6000명으로 줄어든 천주교 신자는 9000명으로 회복됐다.

모방 신부는 입국하자마자 천주교 교세를 지속적으로 넓히려면 조선인 사제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해 후보를 물색했다. 선발 기준은 ▲때 묻지 않은 소년일 것 ▲천주교 집안일 것 ▲신앙심이 깊고 본인은 물론 가족도 신부가 되기를 바랄 것 ▲건강하고 근면할 것 4가지였다.

영화 <탄생>에서 모방 신부가 선발해 유학 보낸 한국인 사제 후보들이 마카오 조선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대건(윤시윤), 최양업(이호원), 최방제(임현수).민영화사 제공

이에 따라 뽑힌 세 소년이 각각 충남 당진 출신의 김대건, 청양 태생인 최양업, 홍성이 고향인 최방제였다. 최방제는 1820년생, 나머지 둘은 1821년생 동갑내기였다. 최양업은 최방제와 4촌 간이었고, 그의 외조부가 김대건 할머니와 친남매여서 김대건과는 6촌 간이었다.

1836년 2월과 3월 최양업과 최방제가 차례로 뒷골의 모방 은신처에 들어왔고 김대건은 7월에 합류했다. 모방은 이들에게 천주교 교리와 라틴어를 가르쳐 그해 12월 유학을 보냈다. 귀국하는 중국인 유방제 신부와 함께 압록강을 건넌 뒤 중국을 도보로 종단해 이듬해 6월 7일 마카오 도착했다. 세 소년은 파리외방전교회가 임시로 세운 조선신학교에 입학해 신학, 철학, 라틴어 등을 배웠다.

모방 신부는 북경신학교가 가톨릭 정통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고 포르투갈이 점령하고 있던 마카오를 택했다고 한다. 신학교 교장 칼레리 신부는 파리신학교에 보낸 편지에서 "조선의 학생들은 훌륭한 사제 덕목을 갖췄다. 신심,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최방제는 5개월 만에 열병으로 숨졌다. 김대건과 최양업은 조선 원정을 계획하던 프랑스 극동함대의 통역을 맡아 마카오를 떠났다가 계획이 취소되자 중국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김대건은 1845년 8월 사제품을 받고 10월 귀국해 부교구장을 맡았으나 8개월 만에 붙잡혀 석 달 뒤 순교했다. 1849년 신부가 된 최양업은 12년간 조선 전역을 누비며 선교·사목·저술 등에 힘쓰다가 1861년 과로로 순직했다. 한국인 사제 1호와 2호인 김대건과 최양업은 각각 '피의 순교자'와 '땀의 순교자'로 불린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왼쪽부터 모방 신부,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의 묫자리. 뒤에는 성모상, 왼쪽에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이희용

이들이 유학을 떠날 즈음 자크 샤스탕 신부가 두 번째 서양인 선교사로 입국했다. 1836년 4월 26일 2대 조선교구장에 임명된 로랑 조제프 마리위스 앵베르도 이듬해 5월 4일 들어와 조선 땅을 밟은 최초의 주교가 됐다.

서양인 신부들이 들어와 있다는 소문은 조정의 귀에 들어갔다. 앵베르는 1839년 8월 김여상의 밀고로 체포됐다. 의금부와 포도청이 나머지 서양인 신부들을 찾으려고 신도들을 혹독하게 고문해 희생자가 속출했다.

앵베르는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라는 요한복음 구절을 인용하며 모방과 샤스탕에게 자수를 권유했다. 세 신부는 그해 9월 21일 서울 용산의 새남터에서 참수된 후 목이 내걸렸다. 당시 모방과 샤스탕의 나이는 36세였고 앵베르는 47세였다.

이들의 유해는 20여 일 동안 한강변 백사장에 방치돼 있다가 몇몇 신자가 관헌들의 눈을 피해 지금의 서강대 자리인 마포구 노고산에 묻었다. 4년 뒤 관악산 옆 삼성산에 이장됐고 1901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를 거쳐 명동대성당 지하 묘역으로 옮겨졌다. 이들은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103위 시성식(諡聖式)을 통해 김대건·정하상·조신철 등과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삼성산(三聖山)이란 이름은 통일신라 초 원효·의상·윤필 스님이 삼막사(三幕寺)를 짓고 수도한 데서 유래했다는 기록이 있다. 민간에서는 세 고승 대신 고려 말 무학·나옹·지공 선사를 들기도 한다. 천주교에서는 앵베르·모방·샤스탕이 이곳에 58년간 묻힌 뒤 성인이 된 것을 예언했다고 여긴다. 서울대교구는 이들의 묫자리에 묘지석을 세우고 주변을 순교성지로 꾸몄다.

천주교 전래는 복음이면서도 비극의 씨앗

십자가상과 구상 시인의 기념 시비. 세 성인의 이름과 함께 ‘님들의 피로서 증거한 복음과 함께 님들의 자취도 이 땅에 영원하오리’란 시구가 새겨져 있다.이희용

18~19세기 조선에서는 천주교가 숱한 외래 종교의 하나에 머물지 않았다. 프랑스 선교사들도 단순한 신앙인에 그치지 않았다. 서양의 과학과 문명을 전해주고 평등사상을 일깨웠다. 선교사란 창을 통해 서구 열강은 조선을 들여다봤고 조선은 서양 세계를 이해했다.

다른 한 편으로 보면 모방 신부도 제국주의의 앞잡이 구실을 한 셈이었다. 미개한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배타적 종교관과 서구 중심 동양관(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천주교 전래는 혹독한 탄압과 숱한 비극을 낳으며 병인양요를 불러왔고 조불수호통상조약이라는 불평등조약과 제주민란(이재수의난·신축교안)으로 이어졌다. 모방 신부 선교 190주년, 김대건 순교 180주년, 병인양요 160주년, 한불 수교 140주년을 맞는 2026년 벽두에 모방 신부의 존재는 한민족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곱씹어보게 된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성인 약전>
<20세기 이야기>
<민족혼의 제단에 바친 밀알 –김대건과 민영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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