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1.11 19:44최종 업데이트 26.01.11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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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궁정동 안가 비밀식당에서 박정희를 저격할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은 김정섭 중앙정보부 차장보와 함께 포도주를 마시며 저녁식사를 하고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오후에 정승화를 식사에 초대했던 김재규는 대통령의 급한 호출이 있다면서 '김정섭과 식사하고 계시라'고 정승화에게 양해를 구했다.

이 장면은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 겸 합동수사본부장이 정승화를 압박하면서 쿠데타를 일으키는 명분이 됐다. 그때 전두환이 유포한 논리가 <전두환 회고록>에 적혀 있다. 이 책 제1권은 "육군참모총장이 범인의 요청에 따라 그 현장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었다면 엄청난 내란음모가 아닌가"라고 말한다.

그런데 전두환 역시 45일 뒤에 비슷한 장면을 연출했다. 12·12 쿠데타 당일에 그는 거사에 방해가 될 장군들을 연희동 요정에 모아 놓은 뒤, '대통령과의 면담 때문에 저는 늦게 참석할 테니 먼저들 들고 계시라'며 보안사 우국일 참모장을 보내 양해를 구했다.

위 회고록에서 전두환은 자신이 모임 주선자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그 자신도 초대받은 입장이었다면 참모총장 체포작전이 진행되던 그 긴박한 시각에 굳이 참모장을 요정에 보내 양해를 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장태완 회고록인 <12·12 쿠데타와 나>에 따르면, 전두환은 장태완을 그 자리로 불러내기 위해 12월 5일과 8일에 측근들을 보내 장태완의 참석 의사를 타진했다.

이렇게 전두환의 초대를 받은 장군들이 술을 마시는 동안에 전두환은 정승화 체포 작전과 최규하 대통령 압박 작전에 착수했다. 전두환이 자신을 저지할 사람들을 정확히 골라내 술자리로 유인했다는 점은 12·12 때 가장 격렬히 저항한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이 그 자리에 있었던 사실에서 확인된다. 전두환은 이 모임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두 장군은 정 총장계의 핵심 장성들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날 장태완과 힘을 합쳐 전두환에 맞선 정병주는 반군과 최후까지 싸우다가 부상을 입었다. 53세인 그를 호위하던 35세의 김오랑 비서실장은 다수의 반군 병력을 상대하다가 여섯 발의 총탄을 맞고 희생됐다. 최측근 부관을 잃은 정병주도 과다 출혈로 중태에 빠졌다.

'참군인' 정병주

12·12 쿠데타에 맞선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 (오른쪽). 12·12 쿠데타 당시 팔에 총상을 입은 자리를 보여주고 있다.연합뉴스

1926년에 경북 영주에서 태어난 정병주는 육군사관학교 9기를 거쳐 1950년 1월에 소위가 됐다. 그런 뒤 한국전쟁(6·25전쟁)에 참전해 머리에 파편을 맞는 부상을 입었다.

41세 때인 1967년에 제1공수특전여단장이 된 뒤에도 큰 부상이 있었다. 1989년 3월 7일 자 <한겨레> 10면은 "공수여단장 시절 점프를 70~80회 했으며, 공중에서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예비 낙하산으로 내리다가 다리가 부러져 한동안 석고붕대와 목발에 의지"했다고 알려준다.

몸을 아끼지 않아 대형 부상들을 입었지만, 그는 육사 9기의 선두 주자로 승승장구했다. 1968년에는 준장이 되고 1971년에는 소장이 됐다. 1974년 광복절 때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피살된 뒤에 잠시 대통령경호실 차장을 지내다가 그 뒤 특전사령관이 됐다.

1972년에 경희대 법대생이 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1975년에 구속돼 집시법 위반죄로 징역 8개월과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뒤 강제징집을 당했다. 이때 그가 배치된 곳이 12·12 때 반군이 될 특전사 제1공수특전여단이다.

문재인 회고록인 <문재인의 운명>은 당시의 대대장이 장세동이고 여단장이 전두환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뒤 "6주간의 특수전 훈련을 마칠 때 정병주 특전사령관으로부터 폭파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고 말한다. <문재인의 운명>은 "(정병주는) 참군인의 표상"이라는 긍정적 평가를 담고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도 정병주를 좋게 기억했다. 1974년에 제9공수특전여단장이 된 노태우는 "인간미가 있는 분이어서 여단장들을 자주 모아 친목과 협조의 분위기를 잘 조성했다"는 말로 정병주를 회고한다.

정병주의 인격과 리더십은 무엇보다 김오랑의 최후에서 잘 증명된다. 사령관을 끝까지 호위했던 김오랑의 모습은 김오랑의 의리와 책임감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상관의 인격과 리더십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1950년부터 몸을 사리지 않는 용감한 군인, 부대를 잘 통솔하는 유능한 지휘관의 길을 걸은 정병주는 1979년 12월 12일 밤에도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행동했다. 이날 저녁 6시 30분부터 전두환을 기다리며 장태완·김진기·우국일·조홍과 자리를 함께하던 그는 정승화가 연행된 지 8분 뒤인 7시 35분에 자리에서 성급히 일어났다.

정병주가 서울 송파구 특전사 본부로 귀대한 것은 약 1시간 뒤다. 정병주는 장태완과의 통화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면서 특전사 병력을 운용했다. 또 전두환 측의 협조 요청도 뿌리쳤다. 검찰의 12·12 수사 결과를 실은 1994년 10월 30일자 <경향신문> 21면은 그날 밤의 정병주를 이렇게 설명했다.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20시 30분경 거여동 소재 특전사령부에 도착한 후, 21시 50분경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으로부터 '1공수여단 병력이 육본으로 쳐들어오니 9공수여단을 출동시켜 육본을 방어하라'는 지시를 받고, 윤흥기 9공수여단장에게 '육본으로 출동하라'고 지시하는 한편, 22시경 부대복귀 보고를 하러 온 최세창 3공수여단장과 그 시경(時頃) 전화를 해온 차규헌 중장이 '정승화 총장은 합수부에서 10·26사건에 관련된 혐의가 있어 연행한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협조를 요청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1978년까지 노태우가 맡았던 9공수특전여단은 인천에 있었다. 정병주가 9공수에 출동 명령을 내린 것은 9시경이지만, 차량 준비 지연 등으로 인해 11시 40분경에야 출동이 이뤄졌다. 11시 30분경에 정병주가 독촉 전화를 건 직후의 일이다.

그런데 9공수가 서울로 진격하던 시각인 13일 0시 5분에 김오랑이 쓰러지고 정병주가 체포됐다. 사령관을 잃은 9공수여단은 0시 30분에 이희성 중앙정보부장의 협박 전화를 받고 철수했다. 정병주를 적군에 빼앗긴 장태완은 힘겹게 분투하다가 4시 30분에 연행됐다.

전두환이 최세창 3공수특전여단장에게 정병주 체포를 지시한 것은 12일 밤 11시경이다. 장태완은 정병주가 9공수여단을 움직일 가능성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전두환이 그런 명령을 내린 것 같다고 회고했다.

정병주 집무실에 침투한 반란군 11명은 내실로 통하는 문 앞에서 M16 소총으로 집중 사격을 가했다. 그러자 안쪽에서 몇 발의 응사가 있었다. 이 때문에 반란군 몇 명이 팔등 부상을 입었다. 그런 뒤 반군이 다시 집중 사격을 가하자, 안에서 더 이상 소리가 나지 않았다. 반군이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비서실장은 쓰러져 있고 사령관은 총상을 입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의 회유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12·12 쿠데타에 맞섰던 정병주 장군 묘.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다.김종훈

소위가 된 지 얼마 안 돼 한국전쟁을 맞아 머리 부상을 당한 정병주는 공수여단장 시절에는 다리가 부러져 깁스를 하고, 12·12 때는 팔에 총상을 입고 두 차례 수술을 받았다. 군인 생활 막판에 전두환과 싸우다가 육체와 마음을 다 다친 그는 가톨릭에 귀의해 불우이웃돕기 활동을 하며 마음을 달랬다. 해마다 12월 12일이 되면 그는 국립묘지 김오랑 묘소 앞에서 오열했다.

12·12의 부정적 흔적을 지워야 했던 전두환 정권은 공직을 제의하며 회유했지만, 그는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전두환 세력과 손잡는 것을 불명예로 인식했다. "장성은 군복을 벗은 이후에도 명예를 중시해야 한다"라며 "취직하는 날부터 명예를 더럽힌다"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반격의 기회가 왔다. 1987년 6월항쟁으로 전두환 정권이 일대 타격을 받은 뒤에 그는 전두환 세력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노태우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그해 하반기에 그는 기자회견 등을 통해 '12·12는 하극상이었다'면서 노태우의 정통성 결여를 지적했다.

대선에서는 노태우가 승리했지만 민주화운동세력이 전두환 세력을 압박하는 속에서, 이듬해 4·26 총선에서 민정당이 패해 사상 초유의 여소야대 정국이 조성됐다. 그래서 정병주의 반격은 승산 가능성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격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9년 3월 6일 자 <경향신문> 1면은 "12·12사태 당시 공수특전사령관이었던 예비역 소장 정병주씨(61·서울 은평구 녹번동 76의 38)가 행방불명된 지 1백 39일 만에 야산에서 목을 맨 변사체로 발견돼 경찰이 사인 수사에 나섰다"라며 이틀 전에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송추유원지 야산에서 정병주가 발견된 사실을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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