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솅겐 국경솅겐이라는 도시에서 결의되었기에 솅겐 국경이라 불린다. 사진은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넘어가는 곳. 검문소는 없고 EU 표지판만 서 있다. 그러나 난민을 막기 위해 검문소가 다시 생기고 있다.
위키미디어 공용
문제는 세계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근의 국제 정세는 노골적으로 힘의 논리가 다시 전면에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자원과 영향권을 둘러싼 강대국의 경쟁 - 독일에서는 미국, 중국,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정의한다 - 은 과거의 언어를 되살리고 있고, 특정 지역에 대한 압박과 개입은 21세기적 표현으로 에두르고 있지만, 그 구조는 낯설지 않다. 한때 식민주의와 제국 경쟁의 중심에 있었던 유럽이 이제는 그 장면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위치에 서 있다.
유럽은 오랜 시간 자기 성찰과 반성을 통해 군사적 패권과 결별하려 애써왔다. 전쟁과 식민주의의 주역이었던 과거를 반추하며, 계몽과 규범, 인권과 국제법을 강조하는 질서를 구축하려 했다. 그런데 세계가 다시 뒤집혀 버렸다. 힘 자제가 아니라 힘을 노골적으로 사용하는 정치가 다시 정상으로 복귀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유럽에 특히 잔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유럽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유럽이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공격 받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신뢰하며 살아온 태도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태도를 가능하게 했던 국제적 전제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군사력을 키워야만 안전해질 수 있는 세계가 문제인데 이것은 유럽의 실패라기보다 국제 질서의 퇴행에 가깝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무장을 하고 억지 주장을 펼쳐야 하는 현실은, 전후 유럽이 쌓아온 정치적 성취를 스스로 의심하게 만든다.
이 맥락에서 "강대국의 장기말"이라는 표현은 그동안 미국의 군사력에 의존해서 누렸던 평화에 대한 자각이고 이제는 자동으로 보호 받는 위치에 머물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동시에 앞으로도 강대국처럼 행동하지 않겠다는 결의이기도 하다.
힘을 갖지 않으면 휘둘릴 수 있지만, 힘을 갖는 순간 스스로 부정해 온 논리로 되돌아갈 위험도 있다. 그래서 총리의 이 문구는 의미심장하다. 깊은 딜레마의 언어다.
왜 평화를 지키는 일은 이렇게 어려운가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할까? 아니면 평화란 서로가 규칙을 존중할 것이라는 신뢰를 말하는 걸까? 그러나 힘의 논리가 다시 국제 질서를 지배하고 있는 지금 그 신뢰가 무너져 버렸다.
세계 평화를 지키는 일이 왜 이리 어려울까? 평화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평화는 민주주의처럼 너무 많은 것을 전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호 존중, 규칙의 준수, 무엇보다 힘의 자제.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작동해야 평화가 간신히 유지되는 것 같다. 그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평화는 가장 취약한 선택이 된다. 세계는 주먹이 먼저 올라가던 계몽 이전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
유럽이 잘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럽의 자기 성찰과 반성은 유럽의 경계에서 끝난다. 전후 유럽이 쌓아온 사회정치적 성취 역시 또 다른 '잘난 척'으로 귀결되었다. 우리가 잘하고 있으니, 세계도 본받고 잘 따라올 것이라는 망상이 배어있다.
아직 유럽 중심적인 사고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이다. 유럽연합으로 똘똘 뭉쳐 유럽 밖의 세상과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서구와 나머지 세상(The West and the Rest)'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때 서구에 미국도 러시아도 포함시키지 않는다. 미국은 군사력이 필요할 때만 끼워준다. 그것이 미국,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국가들의 반감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안다고 해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그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아직은.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