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1.08 06:53최종 업데이트 26.01.08 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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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 19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신년사 녹화 중 사진 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AFP/연합뉴스

새해가 밝자마자 선물 같은 흰 눈이 내렸다. 올해는 이렇게 잘 시작되는가 했는데 웬걸, 곧 어지러운 소식들이 쏟아져 들려왔다. 베를린에선 송전시설이 또 테러를 당해 수만 명이 – 갓난아이들과 병원의 환자들, 요양원의 노인들 포함 – 지금까지 일주일이 넘게 고생하고 있다. 화산(Vulkan)이라는 이름의 극좌파 그룹에서 자백 편지를 경찰에 보냈다. 우리가 얼마나 에너지에 의존하며 사는지 경고하고자 했다고 설명하고 부촌을 노렸지만, 서민들도 피해를 본 건 죄송하게 되었다고 했다.

같은 날 트럼프 대통령은 베네수엘라를 침공하고 국가 원수를 납치했다. 이 명백한 국제법 위반 행위에 대해서 독일을 비롯 유럽의 국가 원수들은 눈치 보기 작전에 들어갔다. 트럼프를 비판했다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총리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독일 총리는 2025년에서 2026년으로 넘어가는 신년사에서 오늘의 세계를 급속히 변화하는 시대로 규정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국제 경제 질서의 불안정, 기술 혁명과 사회적 전환,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 변화까지. 그는 이 모든 것이 그저 먼 국제 정치의 이야기가 아니라 독일 시민의 삶과 직접 연결된 현실이라고 진단했다. 연설의 전체 톤은 위기의식에 가까웠고, 동시에 독일과 유럽이 자신의 자유와 안전, 번영의 토대를 다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중 유독 귀에 남은 문구가 있다.

"우리는 강대국들의 장기말이 아니다." (Wir sind kein Spielball von Großmächten.)

무슨 뜻인가? 물론 독일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심하다. 총리의 신년사에서도 덕담이나 근거 없는 희망은 기대하지 않는다. 덕담은 대통령의 몫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총리가 왜 굳이 이런 말을 해야 했을까. 그리고 그건 과연 독일만을 향한 메시지였을까. 신년사 전체를 관통하는 문제의식 가운데서도, 이 문구는 지금의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처럼 보인다.

독일은 정말 강대국이 아닌가?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위원장과 유럽 각국 정상들이 2025년 12월 17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EU 정상회의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한국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반문할 것이다. 독일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력을 가진 나라이고, 유럽연합의 중심국이며, 국제 정치에서 결코 주변부 국가가 아니다. 경제력만 놓고 보더라도 분명 강대국이다. 그렇다면 왜 독일 총리는 왜 "강대국의 장기말"이라는 표현을 썼을까.

이 문장은 독일이 약하다는 고백이 아니다. 그보다는 독일과 유럽이 오래 전에 더 이상 '강대국처럼 행동하지 않기'로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군사력과 패권 경쟁 대신 법과 제도, 통합과 협력을 통해 평화를 유지하려 했던 전후 유럽의 정치적 결단이 이 한 문장에 응축돼 있다.

2차 대전 이후 유럽은 전쟁을 통해 질서를 세우는 대신, 전쟁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유럽연합은 그 실험의 산물이었다. 한때 총칼을 마주했던 적국들과 국경과 자원을 공유하고, 무력 대신 협상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는 이상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끝에 도달한 고통스러운 결론이었다.

그 덕에 유럽은 비교적 긴 평화의 시간을 누렸다. 그 시간 동안 유럽 사회는 군사력보다 복지와 경제, 시민의 삶의 질을 우선순위에 두었다. 안보는 미국에 의존했고, 유럽은 경제와 규범, 통합의 공간으로 자신을 정의했다.

흔히 "경제적 거인, 군사적 난쟁이"라는 표현이 쓰였지만, 그것은 유럽이 무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선택한 역할 분담의 결과였다. 이 선택은 오랫동안 유효했다. 전쟁은 과거의 일처럼 보였고, 평화는 당연한 조건처럼 여겨졌다.

유럽이 평화를 '믿고' 살아왔다는 말은, 바로 이 경험을 가리킨다. 평화는 늘 불완전했지만, 적어도 유럽 내부에서는 다시 전면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공유되고 있었다. 미국의 군사력에 지나치게 의존한 것이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미국은 영원한 우방일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세계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유럽의 솅겐 국경솅겐이라는 도시에서 결의되었기에 솅겐 국경이라 불린다. 사진은 오스트리아에서 독일로 넘어가는 곳. 검문소는 없고 EU 표지판만 서 있다. 그러나 난민을 막기 위해 검문소가 다시 생기고 있다.위키미디어 공용

문제는 세계 전체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근의 국제 정세는 노골적으로 힘의 논리가 다시 전면에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자원과 영향권을 둘러싼 강대국의 경쟁 - 독일에서는 미국, 중국,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정의한다 - 은 과거의 언어를 되살리고 있고, 특정 지역에 대한 압박과 개입은 21세기적 표현으로 에두르고 있지만, 그 구조는 낯설지 않다. 한때 식민주의와 제국 경쟁의 중심에 있었던 유럽이 이제는 그 장면을 바깥에서 바라보는 위치에 서 있다.

유럽은 오랜 시간 자기 성찰과 반성을 통해 군사적 패권과 결별하려 애써왔다. 전쟁과 식민주의의 주역이었던 과거를 반추하며, 계몽과 규범, 인권과 국제법을 강조하는 질서를 구축하려 했다. 그런데 세계가 다시 뒤집혀 버렸다. 힘 자제가 아니라 힘을 노골적으로 사용하는 정치가 다시 정상으로 복귀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유럽에 특히 잔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분명하다. 유럽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유럽이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공격 받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신뢰하며 살아온 태도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 태도를 가능하게 했던 국제적 전제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군사력을 키워야만 안전해질 수 있는 세계가 문제인데 이것은 유럽의 실패라기보다 국제 질서의 퇴행에 가깝다.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다시 무장을 하고 억지 주장을 펼쳐야 하는 현실은, 전후 유럽이 쌓아온 정치적 성취를 스스로 의심하게 만든다.

이 맥락에서 "강대국의 장기말"이라는 표현은 그동안 미국의 군사력에 의존해서 누렸던 평화에 대한 자각이고 이제는 자동으로 보호 받는 위치에 머물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동시에 앞으로도 강대국처럼 행동하지 않겠다는 결의이기도 하다.

힘을 갖지 않으면 휘둘릴 수 있지만, 힘을 갖는 순간 스스로 부정해 온 논리로 되돌아갈 위험도 있다. 그래서 총리의 이 문구는 의미심장하다. 깊은 딜레마의 언어다.

왜 평화를 지키는 일은 이렇게 어려운가

평화란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말할까? 아니면 평화란 서로가 규칙을 존중할 것이라는 신뢰를 말하는 걸까? 그러나 힘의 논리가 다시 국제 질서를 지배하고 있는 지금 그 신뢰가 무너져 버렸다.

세계 평화를 지키는 일이 왜 이리 어려울까? 평화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평화는 민주주의처럼 너무 많은 것을 전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호 존중, 규칙의 준수, 무엇보다 힘의 자제. 이 모든 것이 동시에 작동해야 평화가 간신히 유지되는 것 같다. 그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평화는 가장 취약한 선택이 된다. 세계는 주먹이 먼저 올라가던 계몽 이전의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다.

유럽이 잘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유럽의 자기 성찰과 반성은 유럽의 경계에서 끝난다. 전후 유럽이 쌓아온 사회정치적 성취 역시 또 다른 '잘난 척'으로 귀결되었다. 우리가 잘하고 있으니, 세계도 본받고 잘 따라올 것이라는 망상이 배어있다.

아직 유럽 중심적인 사고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이다. 유럽연합으로 똘똘 뭉쳐 유럽 밖의 세상과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서구와 나머지 세상(The West and the Rest)'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때 서구에 미국도 러시아도 포함시키지 않는다. 미국은 군사력이 필요할 때만 끼워준다. 그것이 미국, 러시아를 비롯한 다른 국가들의 반감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안다고 해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그 방법을 모르는 것 같다. 아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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