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임천택(에르네스토 임. 1903∼1985) 선생이 쿠바 마탄사스 주 마탄사스 시의 엘 볼로 마을에 세운 한글 학교 건물의 모습.
연합뉴스
그런데 그가 독립운동에만 기여한 것은 아니다. 쿠바 교민의 정체성 유지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처음에는 지리적 이유로, 나중에는 경제체제의 이질성 때문에 한국과의 교류가 힘들었던 이곳에서 한국 교민들이 민족정체성을 지킬 수 있었던 데는 그의 공로가 크다.
일본제국주의는 쿠바의 한국인들이 일본인의 정체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 압력을 행사했다.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018년 제95권에 실린 성주현 당시 전남대 강사의 논문 '쿠바 한인사회를 통해 본 천도교와 민족운동'은 "한인사회가 형성된 곳이면 어김없이 일본영사관에서 찾아와 한인의 등록을 요구"했다고 한 뒤 이에 맞선 임천택의 활동을 기술한다.
"이 시기 쿠바 한인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는 한글교육이었다. 쿠바지방회는 1923년 민성국어학교를 설립하고 후원하다가 1932년 지방회 직속기관으로 전환한 후 모든 운영비를 제공하였다. 임천택은 1925년부터 3년 동안 교사로, 1931년부터 5년간은 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 외에도 임천택은 야학강당을 개설하고 한인 노동자와 2세를 위한 한글교육을 1942년까지 지속하였다."
임천택은 고국에서 한글을 배웠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런 그가 쿠바에서 한글을 가르치는 데 청춘을 바쳤다. 그는 그 글자로 쿠바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본래 기독교인이었던 임천택은 인내천 사상에 감동해 1926년에 천도교로 개종하고 1930년에 천도교 쿠바종리원을 세웠다. 그러다가 1938년부터 흐지부지됐다. 보훈부의 <독립운동사자료집 제8권: 임시정부사 자료집>은 "최린 일파가 일본 정책에 협동하여 천도교 안에 친일 태도가 만연"한 것에 실망했다고 알려준다. 1937년 중일전쟁 이래로 일본이 독립운동가들을 집중 공략해 다수의 친일파를 만들어내는 상황에서 임천택이 천도교 본부의 일부 친일파들에게 실망했던 것이다.
쿠바 한국인들의 정체성을 위한 그의 활동은 해방 이후에도 변함없었다. 위의 <독립운동인명사전>은 "1952년 4월 1일부터 마탄사스와 카르데나스 지방에서 국어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54년 <큐바한인 이민력사>를 태평양주보사에서 출판하였다"고 기술한다.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쿠바의 구체제를 전복한 사건도 그의 집념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1997년 8월 28일 자 <경향신문>은 대한민국정부가 그의 사후 12년 만에 뒤늦게 그를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국장)로 지정한 일을 보도하면서 "쿠바가 공산화된 59년부터 임옹은 한국인 2, 3세를 상대로 한글교육운동을 벌이다 85년 9월 신경쇠약증세 등으로 숨졌다"고 전했다.
위의 "1952년 4월 1일부터"와 "59년부터"의 '부터'는 '이후에도'로 바꿔 읽어야 한다. 1952년 이전과 이후에도, 1959년 이전과 이후에도 그가 항상 신경을 쓴 것은 민족정체성과 한글 보급이다.
신경쇠약증의 발병 원인이 다른 데 있었을 수도 있지만, 일관된 인생 역정을 감안하면 그의 신경쇠약은 독립운동과 더불어 민족정체성 및 한글교육과도 무관치 않으리라 볼 수 있다. 어머니가 만 1세 때 자신을 데리고 떠난 고국을 지구 반대편에서 항상 그리워한 그는 독립운동과 민족정체성 및 한글에 온 신경을 기울이며 살다가 향년 82세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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