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1.03 14:31최종 업데이트 26.01.03 14:31
  • 본문듣기
1972년 12월 27일부터 시행된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한다"(제47조)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중임이나 연임을 제한하지 않았다. 또 국민들이 선출한 "2000인 이상 5000인 이하"(제36조 제2항)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게 대통령 선출권을 부여했다. 그런데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의장이 된다"(제37조 제3항)는 규정도 뒀다. 대통령 선출기관을 대통령 휘하에 둔 것이다.

이 헌법은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추천하도록 한 뒤, 일반 유권자가 아닌 위 대의원들이 이들을 선출하도록 규정했다. 의원 3분의 1에 대한 실질적 선출권이 대통령에게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제59조 제1항은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다. 대통령이 국회의 구성과 소멸을 좌지우지하게 했던 것이다.

이처럼 유신체제는 사실상의 종신군주제였다. 이 같은 성격은 이 시기의 대표적인 모반사건에도 투영됐다. 1973년에 일어난 '윤필용 사건'은 유신 체제하의 박정희 정권이 왕조시대의 감상에 젖어 지냈음을 잘 보여준다.

'후계자' 언급했다가 고문당한 윤필용

1973년 4월 29일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에서 특정범죄 가중처벌 위반 행위에 대한 선고에서 '윤필용 사건'의 당사자인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맨 오른쪽)이 재판 내용을 듣고 있다.연합뉴스

1970년을 전후한 때부터 박 정권에서는 4인방이 형성됐다. 3선 개헌 국민투표(1969.10.17.)가 통과돼 박정희의 1971년 대선 출마가 가능해졌을 때의 일이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박종규 경호실장, 김재규 국군보안사령관, 윤필용 수도경비사령관이 그 넷이었다. 이들이 상호 경쟁하며 정권을 떠받치는 속에서 박정희는 3선 관문인 4·27 대선을 통과하고 장기 집권 가도에 들어섰다.

그런데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4인방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이 공동성명을 위해 김일성을 만나고 온 이후락의 위상이 높아졌다. 이에 더해, 김재규와 윤필용 간의 경쟁 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김재규가 윤필용을 견제할 목적으로 수경사령관 사무실에 도청기를 설치한 사실이 발각돼, 1971년 9월 23일부로 김재규는 육군 제3군단장으로 밀려나고 강창성 소장이 보안사령관직을 맡았다.

이런 상황에서 윤필용은 이후락에게 밀착했다. 이후락의 승승장구에 편승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4인방 내부에서 힘의 균형이 깨지고 이후락에게 힘이 쏠렸다.

박정희는 3선에 성공한 이듬해인 1972년 10월 17일에 유신체제를 선포했다. 3선 가도를 떠받쳤던 4인방 체제가 동요하는 속에서 그는 종신군주의 길로 나아갔다. 자신의 장기집권을 불안정케 하는 이 상황을 박정희는 오래 좌시하지 않았다.

김충식 전 동아일보사 기자의 <KCIA 남산의 부장들>은 "73년 3월 2일 보안사령관 강창성은 박정희의 부름을 받고 청와대로 올라갔다"라고 한 뒤 박정희가 "수도경비사령관 윤이 괘씸한 짓을 하고 다닌다"라며 윤필용의 발언이 적힌 쪽지를 건넸다고 설명한다.

그로부터 얼마 전에 윤필용·이후락과 신범식 서울신문사 사장의 만찬 술자리가 있었다. 당시 41세의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과장으로 윤필용 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노태우는 이 술자리에서 윤필용이 이후락에게 "우리 영감님이 연세도 드시고 장래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미리 후계자를 정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을 했다고 <노태우 회고록> 상권에 썼다. 이 발언은 박정희의 골프 파트너인 신범식의 입을 통해 박정희의 귀에 들어갔다. 박정희는 괘씸하다고 느꼈다.

왕조시대에는 왕세자를 정해두시라는 대신들의 발언이 정치상황이나 역학관계에 따라 충성의 표시로 해석되기도 하고 역모의 조짐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왕권이 신권보다 강력할 경우에는 후자로 해석될 가능성이 커졌다. 박정희가 군주의 마인드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후계자를 정해야 하지 않느냐는 발언을 모반사건으로 비화시키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 사건에선 윤필용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불이익을 받았다. 훗날 민주정의당(민정당) 사무총장과 대표위원이 될 권익현을 비롯한 장교 10명이 구속됐다. 31명은 예편되고, 24명은 인사이동을 당하고, 160여 명은 감시 대상이 됐다.

술자리에서 윤필용의 추대를 받았다는 혐의를 받은 이후락은 초조한 마음에 김대중 납치사건(1973.8.8.)을 일으켰다가 이 때문에 중앙정보부장직에서 물러났다. 이 납치는 박정희의 최대 경쟁자인 김대중을 해하는 일이었다. 윤필용 사건 때문에 곤란해진 이후락이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을 어떻게든 증명해야 했던 상황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졌다.

윤필용 본인은 반란을 모의했다는 혐의를 쓰고 3월 9일 수경사령관직에서 해임됐다. 그런 뒤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과 폭행을 당하다가 26일에 구속됐다. 군복을 벗은 것은 4월 20일이다.

왕조시대 군주를 꿈꾼 박정희

1973년 10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경축사 동안 스탠드에 그려지는 대통령 초상화 카드섹션.연합뉴스

윤필용의 쿠데타 음모는 입증되지 못했다. 취중에 했다는 발언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결국 업무상횡령, 뇌물수수, 군무이탈방조, 기부금품모집법 위반, 총포화약류단속법 위반이 포함된 11개의 혐의가 적용됐다. 본건인 쿠데타 음모는 흐지부지되고, 엉뚱한 별건들이 부각됐던 것이다.

1975년 2월 26일 자 <동아일보>는 그가 고혈압을 이유로 형집행정지결정을 받아 그달 24일 석방된 사실을 보도했다. 2년 전 사건의 처리 결과를 "그해 4월 28일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항소, 다음달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뒤 상고를 포기했었다"라고 정리했다.

부정부패 죄목으로 징역 12년을 받았으니 형량이 적다고 할 수 없지만, 애초에 모반사건으로 거창하게 출발한 점을 감안하면 용두사미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청와대에 불려 갔다가 수사를 개시하게 된 강창성은 조사 과정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윤필용 주변의 군인들이 불법 사조직으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전두환을 비롯한 육사 11기 이하의 일부 장교들이 하나회를 결성한 상태에서 윤필용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포착됐다.

하나회를 운영한 것은 전두환이지만, 만든 것은 박정희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의 브레인 그룹인 육사 8기(김종필 등)를 견제하고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할 목적으로 1963년부터 하나회를 은밀히 운영했다.

그래서 하나회의 대부는 박정희여야 했다. 그런데 육사 8기인 윤필용이 하나회의 대부로 인식됐다. 윤필용이 하나회를 가까이 한 것은 7·4공동성명을 계기로 이후락에게 밀착한 것과 맥락이 비슷하다. 떠오르는 경쟁자나 그룹을 가급적 포용하겠다는 그의 스타일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윤필용 수사를 하나회 수사로 확대시키는 강창성의 수사는 하나회 장교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하나회는 이북 출신 강창성이 경상도 군인들의 씨를 말리려 한다며 내부 결집을 강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강창성이 보안사의 군용 기름을 유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윤필용에게 적용된 것과 비슷한 죄목이 강창성에게도 적용된 것이다. 결국, 박정희는 강창성을 해임했다.

불똥이 박정희 자신에게도 튈 뻔했지만, 윤필용 사건은 박정희에게 이익이 됐다. 이는 박정희의 후계자를 거론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정권 내부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박정희에 대한 충성 경쟁은 한층 가열되고, 외형상으로나마 유신체제의 결집력은 강해 보였다.

박정희 정권은 윤필용에게 역모죄를 씌우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자 횡령 혐의 등을 적용했다. 그런데 2015년 11월 9일에 재심 판결을 선고한 대법원은 뇌물수수를 제외한 나머지 혐의들을 모두 무죄로 인정했다.

이 사건 주심인 조희대 대법관은 윤필용이 1980년에 특별사면을 받은 점을 감안해 뇌물수수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하지 않았다. 특사를 받은 사람이 재심 사건에서 유죄를 선고받는 것은 불이익변경금지원칙 등에 위반된다는 이유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대법원이 유죄를 선고하지 않았으니, 1973년의 판결은 모두 뒤집힌 셈이 됐다.

박정희 정권은 횡령·뇌물 등의 별건을 내세워서라도 윤필용을 응징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혐의의 대부분도 실상은 무죄였다는 것이 재심에 의해 확인됐다. 후계자 발언을 괘씸해하며 역모 사건을 만드는 박정희의 모습은, 그가 민주공화국 지도자가 아니라 왕조시대 군주의 마인드에 탐닉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