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0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경축사 동안 스탠드에 그려지는 대통령 초상화 카드섹션.
연합뉴스
윤필용의 쿠데타 음모는 입증되지 못했다. 취중에 했다는 발언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다. 결국 업무상횡령, 뇌물수수, 군무이탈방조, 기부금품모집법 위반, 총포화약류단속법 위반이 포함된 11개의 혐의가 적용됐다. 본건인 쿠데타 음모는 흐지부지되고, 엉뚱한 별건들이 부각됐던 것이다.
1975년 2월 26일 자 <동아일보>는 그가 고혈압을 이유로 형집행정지결정을 받아 그달 24일 석방된 사실을 보도했다. 2년 전 사건의 처리 결과를 "그해 4월 28일 육군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항소, 다음달 육군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뒤 상고를 포기했었다"라고 정리했다.
부정부패 죄목으로 징역 12년을 받았으니 형량이 적다고 할 수 없지만, 애초에 모반사건으로 거창하게 출발한 점을 감안하면 용두사미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청와대에 불려 갔다가 수사를 개시하게 된 강창성은 조사 과정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윤필용 주변의 군인들이 불법 사조직으로 묶여 있었던 것이다. 전두환을 비롯한 육사 11기 이하의 일부 장교들이 하나회를 결성한 상태에서 윤필용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 포착됐다.
하나회를 운영한 것은 전두환이지만, 만든 것은 박정희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의 브레인 그룹인 육사 8기(김종필 등)를 견제하고 군부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할 목적으로 1963년부터 하나회를 은밀히 운영했다.
그래서 하나회의 대부는 박정희여야 했다. 그런데 육사 8기인 윤필용이 하나회의 대부로 인식됐다. 윤필용이 하나회를 가까이 한 것은 7·4공동성명을 계기로 이후락에게 밀착한 것과 맥락이 비슷하다. 떠오르는 경쟁자나 그룹을 가급적 포용하겠다는 그의 스타일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윤필용 수사를 하나회 수사로 확대시키는 강창성의 수사는 하나회 장교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하나회는 이북 출신 강창성이 경상도 군인들의 씨를 말리려 한다며 내부 결집을 강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강창성이 보안사의 군용 기름을 유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윤필용에게 적용된 것과 비슷한 죄목이 강창성에게도 적용된 것이다. 결국, 박정희는 강창성을 해임했다.
불똥이 박정희 자신에게도 튈 뻔했지만, 윤필용 사건은 박정희에게 이익이 됐다. 이는 박정희의 후계자를 거론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정권 내부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박정희에 대한 충성 경쟁은 한층 가열되고, 외형상으로나마 유신체제의 결집력은 강해 보였다.
박정희 정권은 윤필용에게 역모죄를 씌우고자 했지만, 여의치 않자 횡령 혐의 등을 적용했다. 그런데 2015년 11월 9일에 재심 판결을 선고한 대법원은 뇌물수수를 제외한 나머지 혐의들을 모두 무죄로 인정했다.
이 사건 주심인 조희대 대법관은 윤필용이 1980년에 특별사면을 받은 점을 감안해 뇌물수수에 대해서는 유죄를 선고하지 않았다. 특사를 받은 사람이 재심 사건에서 유죄를 선고받는 것은 불이익변경금지원칙 등에 위반된다는 이유였다. 어떤 이유에서든 대법원이 유죄를 선고하지 않았으니, 1973년의 판결은 모두 뒤집힌 셈이 됐다.
박정희 정권은 횡령·뇌물 등의 별건을 내세워서라도 윤필용을 응징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혐의의 대부분도 실상은 무죄였다는 것이 재심에 의해 확인됐다. 후계자 발언을 괘씸해하며 역모 사건을 만드는 박정희의 모습은, 그가 민주공화국 지도자가 아니라 왕조시대 군주의 마인드에 탐닉해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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