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청와대로 출근한 29일 청와대 본관 앞에 걸린 봉황기와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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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집무실이 29일 0시부터 용산 대통령실에서 청와대로 바뀌었다. 대통령을 상징하는 봉황기도 그리로 옮겨졌다. 대통령실 브리핑이 진행되는 청와대 춘추관은 지난 22일부터 운영되고 있다.
군부독재의 본거지였던 탓에 청와대는 오랫동안 권위주의 이미지를 풍겼다. 하지만 이 명칭 속에는 혁신적 의미도 있었다. 관저 지붕이 파랗다는 것을 뛰어넘는 의미 부여가 4·19혁명의 해에 있었다.
1960년 12월 30일, 경무대(景武臺)를 청와대로 개칭하는 대통령 담화가 발표됐다. 이 담화는 그해의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군 4·19혁명의 산물이다.
8월 12일 민의원·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선출된 윤보선 대통령은 연말의 그 담화에서 "내가 취임 후 전국의 수많은 국민으로부터 경무대 명칭을 갈라는 요청이 있었다"라고 언급했다. 그는 이날 <조선일보>에 실린 담화문에서 경무대가 이승만으로 인해 원망의 대상이 된 현실을 지적했다. "구 정권의 실정으로 미루어 국민들의 원부(怨府)가 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명칭 변경이 부득이하다고 그는 말했다.
'청와대'의 진정한 의미
1998년 2월 17일 자 <한겨레> '전문가 논평'에 기고한 윤흔 당시 서울문화연구회장 겸 한국땅이름학회 부회장은 "60년 2공화국 대통령으로 윤보선이 취임하자 '독재정치의 권부요 학정의 마전인 경무대 명칭을 바꾸라'는 국민들의 건의와, 무(武)자에서 무단의 냄새가 난다는 개명 의견이 많았다"고 썼다.
경무대의 '무'에서 이승만의 무단통치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12년 집권으로 인해 경무대는 국민들에게 지긋지긋한 이름이 됐다. 이 명칭을 없애라는 국민적 요구가 윤보선 담화에 반영됐다.
담화에서 윤보선은 청와대라는 명칭을 선택한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그중 첫 번째는 "지금 건물이 푸른 기와"인 점에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과거의 건물'이 푸른 기와였던 것에 있었다. 그는 "조선 초엽에 경복궁 건물들이 모두 푸른 기와로 덮여 있었던 사실"을 거론했다. "푸른 기와라면 우리나라 고전 문화를 상징할 수 있는 데다가 평화로운 인상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새해부터는 청와대로 국민들이 불러주기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그는 당부했다. 한국 전통을 복원하자는 취지를 청와대라는 명칭에 담았던 것이다.
조선왕조(대한제국)가 대한민국으로 바뀐 게 아니라, 조선이 일제에 망하고 그 일제와 싸워 대한민국을 세운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왕조의 경복궁 기와 색깔을 근거로 청와대로 명명한 것은 일제를 극복하고 한국 전통을 복원한다는 의미와도 연관됐다. 이승만 무단통치뿐 아니라 일제 무단통치도 극복한다는 의미가 담겼던 것이다.
대통령 선거 다음날인 지난 6월 4일, 이재명 대통령은 용산 대통령실 기자회견장에서 "지금 용산 사무실로 왔는데 꼭 무덤 같다"라고 한 뒤 "컴퓨터도 없고 프린터도 없고 황당무계하다"라고 탄식했다.
1960년 8월 13일 경무대에 입주한 윤보선은 컴퓨터·프린터보다 훨씬 더 절실한 것의 부재에 직면했다. 작고(1990.7.18.)하기 1년 전인 1989년 7월 11일, 그는 <동아일보>에 실린 회고록 제15회에서 "경무대의 첫모습은 썰렁했다"라며 "집무실이나 접견실엔 집기가 거의 없었다. 주방에는 그릇과 숟가락도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 글에서 윤보선은 경무대 명칭을 바꾼 동기를 설명하면서 "일제 때는 총독의 관저였고 자유당 때 독재체제를 강화한 곳이어서 오명의 잔영을 씻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라고 썼다. 이승만뿐 아니라 일제 잔재까지 씻어내고자 했다는 언급은 조선시대 경복궁의 기와 이미지를 살리고자 했다는 담화문 내용과 맥락이 닿는다. 청와대라는 이름은 4·19뿐 아니라 항일운동의 가치와도 연결되는 것이었다.
청와대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법

▲박정희와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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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제와 이승만을 씻어내겠다는 목표는 그 뒤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위의 윤흔 기고문은 "이름을 갈고도 훨씬 더 무시무시한 독재자가 나왔으니"라는 말로써 1961년 5월 16일 이후의 암울한 역사를 상기시킨다.
청와대 자리는 고려시대부터 신성한 곳이었다. 남경 천도가 논의되던 1104년에 고려 숙종이 남경 궁궐을 지은 곳은 북악산 중턱인 지금의 청와대 자리다. 음력으로 조선 태조 3년 9월 9일 자(양력 1394.10.6.) <태조실록>은 숙종 때의 궁궐터가 협소하다면서 그 아래에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정도전 등이 건의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경복궁 북쪽이 고려시대 남경 궁터였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청와대 터가 경복궁 후원으로 편입된 것은 조선 말기인 고종 임금 때다. 그 이전 오랫동안 조선왕조는 이곳을 신성한 서약의 공간으로 활용했다. 문화재청(국가유산청)의 2022년 보고서인 <역사문화공간으로서 청와대 권역의 활용 마스터플랜 기본구상 연구용역>은 "이곳에는 왕에게 신하가 충성을 맹세하는 회맹제를 치르는 회맹단이 있었다"라고 기술한다.
이랬던 곳이 일제 때 총독관저가 되고 해방 직후에 미군사령관저가 되고 정부수립과 함께 이승만 관저가 됐다. 이승만 집권기를 살았던 시인 김수영에 관한 서적인 최하림(1939~2010) 전 서울예대 교수 겸 시인의 <김수영 평전>은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로 들어가서 한 첫 번째 행동"을 설명한다. 이 책은 "그는 손수 망치를 들고 총독관저로 사용하던 때의 전구라든가 가로등을 모조리 부수어버렸다"고 알려준다.
이승만은 일본에 맞서는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했지만, 일제를 극복하기는커녕 도리어 친일파와 합세해 친일청산을 저지했다. 그는 일제 등과 함께 청와대 터에서 세상을 망친 주범이다.
청와대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신성한 공간이었다. 청와대라는 명칭이 생기는 과정에서는 한국의 전통을 계승하고 일제를 극복한다는 의미 부여도 있었다. 윤보선이 담화를 발표하기 12일 전에 태어난 윤석열은 청와대를 버리고 용산으로 갔지만, 청와대는 터도 좋고 명칭도 좋은 곳이었다.
그렇지만 청와대 개칭 뒤에 "훨씬 더 무시무시한" 민주주의의 적들이 거기에 들어가 폭정을 펼쳐 그곳 이미지를 타락시켰다. 청와대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일차적 방법은 그곳에서 반공과 비상계엄을 핑계로 공포정치를 펼쳤던 독재자들의 흔적을 우리 사회에서 지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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