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2.27 19:30최종 업데이트 25.12.27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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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의료계가 참고해도 될 만한 연구 결과가 1993년 겨울호 <한국사회학>에 실렸다. 그해 2월까지 연세대 예방의학교실에 근무했던 박종연 박사의 '한국 의사의 전문직업성 추이-의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 및 태도 변화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이다.

서울 시민 500명에 대한 면접조사와 전국 의사 242명에 대한 설문조사에 기초한 이 논문의 연구 항목 중 하나는 '시민들이 일반 전문직종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가'와 '시민들이 의사 직업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갖고 있는가'를 비교하는 것이다. 매우 그렇다(5점)-약간 그렇다(4)-보통이다(3)-별로 그렇지 않다(2)-전혀 그렇지 않다(1) 중에서 하나를 택하게 하는 식으로 이 조사가 진행됐다.
본문에 인용된 연구 결과.박종연·한국사회학회.

'전문직은 특수 지식을 가진 집단이다'(A)에 동의하는 응답은 5점 만점에 4.76으로 나오고, '의사들은 특수 지식을 가진 집단이다'(B)에 동의하는 응답은 4.59로 나왔다. B를 A로 나눈 백분율은 96.4%다. '전문직종은 보통 사람들이 근접하기 힘든 특수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일반인들의 기대치에 대해 의사 직업이 100% 가까이 부응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의사 직업은 권위를 갖고 있다', '영향력이 크다', '수입이 많다'와 관련해서는 105.8, 103.5, 114.0이라는 수치가 각각 나왔다. 의사의 권위·영향력·수입이 일반 전문직종에 비해 높다는 인식이 투영된 결과다.

반면, '의사는 재미있고 보람 있는 직업이다', '사회에 봉사하는 직업이다', '윤리가 확립된 직업이다', '신뢰하고 존경할 만한 직업이다'와 관련해서는 각각 75.6, 90.2, 81.2, 81.9가 나왔다. 의사들이 일반 전문직종에 비해 권위·영향력·수입은 높고 보람·봉사·윤리·신뢰성은 낮다는 사회적 인식을 보여주는 결과다.

위 논문은 "의사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고 있는 것이 근래의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라고 말한다. 논문이 나오기 얼마 전인 1980년대에 의사에 대한 평가가 많이 바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그 1980년대에 사회에 봉사하고 직업윤리가 철저하며, 신뢰받고 존경받을 만한 의사의 길을 추구한 인물이 있다. 1981년에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한 청년 이태석이 그 주인공이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사가 되고 싶다"... 이태석의 삶

이태석 신부의 살아생전 모습.연합뉴스

훗날 의사 겸 신부의 길을 걷게 될 이태석은 부산 자갈치시장 인근에서 1962년 9월 19일 출생했다. 이 가정은 한국전쟁 때 충청도에서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1962년 2월 판잣집과 천막집이 많은 부산 서구 남부민동의 천주교주택에 입주했다. 이곳이 그의 출생지다.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의 재정 지원으로 17평짜리 함석지붕집인 그곳에 들어갈 때만 해도 이 가족은 부부와 8남매였다. 이태석은 그해 가을에 태어난 아홉째다. 그 뒤에는 열째가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97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어머니가 '투잡'을 했다. 전기작가 이충렬의 <신부 이태석>은 "어머니는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낮에는 옷 장사를 하고 밤에는 삯바느질을 했다"고 알려준다. 이런 집안에서 아들이 의과대학에 합격했다. "(어머니는) 주변 상인들에게 막걸리를 한 사발씩 돌리며 기뻐했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런데 이태석은 어머니가 생각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1987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전공의시험을 준비하던 그는 시험 얼마 전인 1990년 12월에 중대 결정을 내렸다.

위 책은 그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의사가 되고 싶다"는 결심하에 "제대 무렵 전공의시험에 원서를 냈지만, 시험장에는 가지 않았다"고 말한다. 9년간 걸어왔던 발걸음을 전공의시험을 코앞에 둔 28세 때 멈췄던 것이다. 그런 뒤 그는 가톨릭 수도사의 길로 방향을 틀었다.

이 선택이 의사의 길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육신뿐 아니라 영혼도 함께 다루는 또 다른 유형의 의사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아들의 결정에 놀란 어머니는 전업 의사와 봉사활동을 병행할 수 있지 않느냐며 눈물로 타일렀지만 소용없었다. 이런 장면은 이태석의 어린 시절 일화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예견될 만한 것이었다.

2020년에 협성대학교에서 나온 신학석사논문인 탁동화의 '이태석 신부의 생애와 선교 연구'는 "어린 시절 이태석은 어머니를 보며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하나씩 배워나갔다"고 한 뒤 "새 옷을 가난한 아이들에게 벗어주고 돌아오는 날에도 어머니는 절대로 혼을 내지 않았다"고 말한다. 서른이 다 된 아들의 단호한 의지를 확인한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태석의 손을 잡았고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고 <신부 이태석>은 묘사한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던 것이다.

1991년 4월에 군의관을 전역하고 가톨릭 수도단체인 살레시오회에 들어간 이태석은 이듬해에 광주가톨릭대학교에 편입하고 1995년부터 2년간 구로공단 인근인 서울 대림동 살레시오청소년센터에서 청소년 선교를 수행했다. 그런 뒤 1997년 1월에 35세 나이로 로마교황청 살레시오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잠자코 성실히 매진하다가 막판에 '본색'을 드러내는 모습은 군의관 생활 막판뿐 아니라 살레시오대학 막판에도 나타났다. 의대 입학 9년 뒤에 전공의시험을 포기했던 그는 수도사의 길을 걸은 지 8년 만인 1999년 여름방학 때 수도회 관계자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태석의 병원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응급실 뺑뺑이'

이태석 신부의 삶을 담아낸 다큐멘터리 <울지마 톤즈> 스틸컷㈜마운틴픽쳐스

로마의 살레시오회 총본부는 1980년 이래로 '아프리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런데 살레시오회는 아프리카 동부인 케냐와 탄자니아에는 신학생 선교체험을 장려하면서도 그 이웃 국가인 수단에는 선교체험을 허용하지 않았다.

수단은 영국·이집트의 공동 지배에서 벗어난 1956년 1월 직전부터 남북 내전에 빠졌다. 그 결과, 1972년에 남수단의 자치권이 인정됐다. 그랬다가 1983년에 제2차 내전이 발발해 200만 명의 희생자를 낸 끝에 2011년에 남수단공화국이 독립했다.

1999년 당시는 제2차 내전 와중이라 신학생의 선교체험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태석의 머릿속은 남수단 톤즈라는 아프리카 최대 오지 구역으로 가득 찼다. '그곳에서는 아이들이 책가방 대신 넓적한 돌을 들고 등교해 그것을 깔고 수업을 듣는다', '의사가 없어서 치료가 힘들다', '한센병 환자들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가 그를 끌어당겼다. 결국 그는 어렵사리 허락을 받아 일주일간 그곳에서 선교 체험을 하게 됐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살레시오대학을 수료하고 서울 구로3동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해인 2001년에 그는 톤즈에 부임했다. 그가 원했던 의사의 길은, 진료비 수납이 거의 불가능한 이 지역에서 39세인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톤즈 땅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은 "흙과 대나무로 지어진 세 칸짜리 움막"(위 탁동화 논문)이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이 진료소의 유일한 의사인 그는 100킬로미터를 걸어오고 이삼 일간 밤새워 걸어온 환자들을 치료했다. 처음에는 하루에 보통 300명 이상, 나중에는 150명 정도를 진료했다고 한다.

개업하자마자 '대박'을 터트린 이 '개원의'는 쇄도하는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직접 설계하고 직접 짓는 방식으로 병원 건물을 건축했다. 처음에는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병원을 짓고, 다음에는 남수단 남쪽인 케냐에서 시멘트를 사 오고 강가에서 모래를 퍼온 뒤 그것으로 벽돌을 만들어 병실 12개짜리 병원을 만들었다.

병원 손님의 절반은 말라리아 환자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는 한밤중에 단잠을 깨우는 환자, 총상 입고 찾아온 환자들을 한 번도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를 그곳에 오게 만든 한센병 환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병원에서는 '응급실 위기', '응급실 뺑뺑이'가 있을 수 없었다.

의사이자 신부였던 그는 교육자 역할도 병행했다. 그곳에 학교를 세우고 중고교 과정을 개설했다. 얼마 뒤 이 학교는 남수단에서 가장 실력 있는 학교가 됐다. 인간의 몸을 치료하고 영혼을 치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신과 의식을 충만케 하는 일에도 헌신했던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의사는 철학적이고 종합적인 직업이었다. 그것은 전문직은 아니었다.

그는 내전 중이라 총과 칼을 갖고 노는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이들을 조직해 밴드를 만들었다. 그 자신도 기타를 치고 작곡을 했다. 이런 의사가 되기 위해 28세 때 전공의시험을 그만두고 먼 길을 돌았던 것이다.

46세 때인 2008년에 휴가차 귀국한 그는 대장암 4기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다가 2010년 1월 14일에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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